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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F > 안암 > 컬럼 > 지성과 영성(이창무 목자님)
작성자 이창무
작성일 2012-12-28 (금)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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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교훈과 인격과 사역

다음은 제가 사도 바울의 교훈과 인격을 그의 사역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원리를 
바울 서신을 중심으로 고찰해 본 내용입니다. 목자로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우리들이 바울에게 배울 점이 무엇인
가를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해서 나눕니다.

사도 바울의 교훈과 인격과 사역

말씀과 성령으로 사역하다.

 사도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충만하다고 하였다. 그 안에 모든 것이 있다. 그러므로 엉뚱한 곳에 가서 지혜와 능력을 찾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이외의 것들은 헛된 것이다. 무엇인가 있는 것 같은데 가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사실은 헛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삶은 단회적으로 주어져 있다. 우리는 삶이 1분 1초가 아까운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일에 시간과 가치를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마귀는 그리스도 이외의 것에 시간을 허망하게 무가치하게 보내도록 만든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고자 나머지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삶 전체는 그리스도를 얻고자 하는 삶이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사역의 원칙 한 가지 제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할례이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곧 말씀과 성령이다.
첫째는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또한 풍부하게 가르쳐야 한다. 단순히 구원의 복음만을 전하면 구원 받은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게 된다. 사람은 사상을 가지고 산다. 자기 사상이 가지고 있는 관점이 바뀌어야 삶이 바뀐다. 성경적 관점을 풍부하게 가르쳐야만 신자가 신자답게 살수 있다. 복잡한 관계 속에서 우리의 생활이 유지되고 있다. 그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풀어 가르쳐야 한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면 신자들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란도 서원에서 성경을 풀어 가르치면서 말씀을 풍성하고 정확하게 가르치고자 했다. 또한 편지를 여러 교회에 보내어 교훈과 도를 가르쳤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선택하여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은 미리 예비하시고 계획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이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셨다. 사도 바울은 구원의 능력인 복음을 전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그 복음을 진실로 믿고 구원을 받고 합당하게 된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물론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복음의 말씀이 전파될 때에 그 말씀을 듣고, 사람이 말로 전하는 것이지만 그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사람들이 있다. 구원 받기로 예정된 사람은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안다. 중생한 신자는 참된 교훈을 듣게 되면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알고 있다. 선택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고, 그 말씀이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에서 입증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에 사산된 아이, 죽어서 태어난 아이는 젖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는 본능적으로 젖을 원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처럼 거듭난 신자는 영적 생명이 살아나고 자연스럽게 말씀에 대한 굶주림을 느끼고 바른 말씀을 들으면 만족하고 기뻐하게 된다. 이런 신자에게는 고난이 있더라도 고난마저도 유익이 된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는 적당한 고난이 있었다. 그들은 적당한 고난을 통해 오히려 더욱 믿음에 굳게 서게 되었다.
둘째로 성령께서 그 말씀을 쓰셔야 한다. 아무리 잘 가르쳐도 성령께서 쓰시지 않으시면 말씀이 다 소용이 없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실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그 마음을 열어서 복음을 받게 되려면 성령께서 그 말씀으로 하여금 역사하셔야 한다.
사람들을 구원하고 양육하는 일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영적 전쟁에 있어서도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 영적인 세력과의 싸움의 성격을 잘 이해해야 한다. 마귀가 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은 지금 불신자를 마귀가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마귀는 악으로 뭉쳐진 존재이다. 악 그 자체이다. 사람은 악한면도 있지만 착한 면도 있다. 하지만 마귀라는 존재는 오로지 악밖에 없는 것이다, 마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밖에 없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고 심판밖에 없는 것이다. 마귀는 굉장히 세련되고 학문적이고 훌륭한 사상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사람들이 빠져들게 된다. 예를 들어 진화론이 있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인간사회가 동물의 사회로 보기 때문에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당연하다. 그런 생각이 인간 사회를 도덕적인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동물적인 사회로 바뀌게 만든다. 곧 연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사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밟아야 자신이 살아남는 사회를 형성한다. 사탄이 배후에서 이렇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으로 가르치면 마귀를 인식하고 싸울 수 있는 분별력이 생긴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은 마귀의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초대 교회 당시 교회에 역사하는 수 없이 많은 마귀의 역사와 상대해야 했다. 이때 바울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로 마귀와 대결했다. 그 결과 교회는 진리를 보전하고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화해시키고 하나되도록 하는 사역을 감당하다

본래 이 세상은 한 분 하나님 안에서 갈등이나 부조리가 없는 세상이 되어야 했다. 세상은 완전한 조화 가운데 있는 것이 정상이고 정당한 것이다. 이는 사도바울이 엡 4:4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분열 속에 있다. 먼저 하나님과 사람이 분열되어 있다. 엡 2장 3절에 보면 본질상 인간은 진노의 자녀이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적대감이 형성되어서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에게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서에 보면 사람과 자연이 분열되어 있다.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므로 자연 환경이 인간과 대립 구도를 형성하였다. 또한 사람과 사람이 분열되어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열이 당시에는 큰 문제였다. 이러한 분열이 통일로 나아가도록 것이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었고 사도 바울의 사역의 목적이 되었다.

교회 안에서 화해와 통일
하나님은 지상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통일을 이룬 사람들을 교회를 통해서 교회 속으로 부르심으로 사람과 사람의 통일을 만드시고 그 관계를 넓혀 가신다. 그것의 시작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었다.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세례가 이날 주어졌다. 한 불꽃 안에서 한 성령 안에서 통일이 되어서 여러 지방에서 모인 사람들이 한 몸이 되었고, 지체가 되었다.
여기서 바울의 교회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하였다. 또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지체들 상호 간에는 하나이지만 다름이라는 신비한 연합을 이룬다. 지체인 성도인 한 사람이 가져야 하는 목표는 자신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자기에게 부여된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성도의 이상적인 상태는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지체의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 온 몸이 조화로운 상태를 이루는 것이다. 성도가 홀로 성자가 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다. 성도는 교회를 이루라고 부르심 받은 자이다. 흔히 갖게 되는 생각 중 하나인 교회를 통해 자기 자신이 인격이 성장하고 훌륭하게 된다는 것은 일종의 망상이다. 교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다만 지체 의식을 가지고 한 몸을 이루려는 사람이 필요하다. 첨단 비행기가 온갖 좋은 부품으로 만들어져도 나사 하나만 빠져도 제 기능을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시든 지체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서로 돕고 격려해서 교회를 세워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신자가 개인적으로 탁월한 무엇이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을 충실하게 세워가라는 목적으로 그에게 부여된 것이다. 교회를 떠나서 개인의 회복을 찾는 개인주의 사조는 매우 현대적인 것이며 바울에게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낯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교회관을 교훈으로 각 교회를 지도해 나갔다. 특히 고린도 교회의 분열 문제를 놓고 매우 마음 아파하며 때로는 책망으로 때로는 위로로 치유해 가고자 했었다.
성도들이 함께 한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하나가 되었으므로 그들은 서로 그리워하고, 서로 염려하고 서로 걱정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를 성도의 교통이라는 확정된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한다. 성도의 교통은 communio sanctorum 즉 하나님께서 건지시기로 작정하고 예정하신 모든 무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성도의 교통이라는 필연적인 사실을 가지게 된다. 이로 인해서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이는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한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외적 조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깊은 교제를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본능적으로 그들은 서로에게 이끌린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하나된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 주인과 노예가 오로지 복음이라는 사실 의해서 서로 사랑하는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교회는 이러한 구원의 확신과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는 이해에서 깊이 사랑하는 교제가 이뤄지는 곳이다. 바울이 세운 이 같은 교회의 모습에 불신자들과 이방인들은 분명 큰 감명을 받아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을 것이다.

가정 안에서 화해와 통일
바울은 교회 뿐 아니라 가정을 이러한 기능을 하는 기관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만유를 통일하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전개되어 나간다. 신자들은 여기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 특별히 사도바울이 길게 다루는 문제가 가정 안에서의 통일이다. 가족들은 늘 만나기 때문에 오히려 분열되기 쉬운 사람들이다. 교회도 오래 만난 사람들끼리 분열이 일어난다. 교회이든 가정이든 공동체를 신자에게 부여하시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에 대해서 훈련하게 만드신다. 신자는 사람과의 부딪치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한다.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사람이 사람과의 부딪힘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겸손하게 된다. 바울은 서신서의 많은 부분을 가정에 대한 교훈에 할애한다. 가정 내에 문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도록 성도들을 교훈해 주었다. 가족은 실제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감독의 직분을 볼 때 자녀가 존경하는 부모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가정에서 인정받아야 감독(목사,장로)의 직을 할 수 있다. 그것이 구원의 성화의 증거이다. 구원과 성화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능력이 남편과 아내의 사이에서 발휘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서 구원의 능력을 찾을 것인가? 옛사람을 그대로 가지고는 사랑의 존경의 관계를 만들 수 없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자녀가 부모에게 생명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녀의 영혼을 무시하지 못하게 하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친다. 성인들을 대하듯이 자녀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라고 한다. 잘못은 꾸짖되 독립된 인간으로서 대우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자녀가 노여워 하지 않는다. 부모는 자녀를 어려서부터 존중해 주어야 한다. 부모가 자녀를 맘대로 하면 안 된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화해와 통일
이 관계는 사회적 관계인 종과 주인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도 바울은 주인도 자신이 종이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권면한다. 주인에게는 ‘너도 하나님의 종이다. 너도 너의 주인이 어떻게 해주는 것이 좋은지 잘 알 터이니 너도 그렇게 하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종도 주인에게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진심으로 섬기라고 한다. 종과 주인의 관계가 주종이 아니다. 구약의 히브리인 종에 대해서 연구해 보면 사실은 종이 아니라 품꾼이다. 종의 위치에서 잘 하면 잘못한 주인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큰 칭찬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어느 위치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기에게 부여된 삶에 최선을 다하느냐가 중요하다.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다.

신자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 이스라엘 백성이 왜 망했는가? 이스라엘 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다른 목적을 가진 나라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아는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한 분자가 되어서 율법을 지키는 공동체가 되어서 이방인들에게 빛이 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망각하고 이방인들처럼 잘 먹고 잘사는 것에 의미를 두어서 망하게 된 것이다. 신자는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 삶의 목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된 교회 공동체가 되어서 분열되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의미와 목적이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지체가 되는 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신자는 자신의 힘과 재물과 시간을 드려서 이 숭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
요즘은 개인의 문제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도바울에게도 자신의 문제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정말 큰 문제를 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모든 문제들의 유일한 해결의 길은 그리스도이시다. 가장 큰 문제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며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하며 그리스도를 추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집중을 하다 보면 자기 개인의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하늘에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점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져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 중에 세상에서 육신적인 행복도 추구하고, 영적인 행복도 느끼기를 원한다면 성경은 그것은 두 마음을 품는다고 말한다. 기독교를 사적 이익의 재료로 삼는 사람이 있다. 진리가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다. 이익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때문에 결국 돈 문제에 집착한다. 이런 사람들과는 교제를 끊어야 한다. 반면 사도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유익만을 추구했다. 사적 유익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다. 이렇게 그리스도 중심, 교회 중심으로 온 마음을 드려 헌신했던 사람이 사도 바울이다.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사는 신자들을 만들어라

육신을 따라서 사는 모든 생각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육신은 악과 타락에 오염된 생각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삶은 우리 안에 내재된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밖에서 안으로 와야 한다. 나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서 이루어지는 거룩이다. 불신자 중에도 굉장히 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타적인 희생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육신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 선, 악을 구별하기 앞서서 육신이냐, 성령이냐를 구분하여야 된다.
교회 내에서 진심이 무조건 진리는 아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교회 내에서 성령의 이름으로 일컫는다고 해서 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기가 중심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나를 중심으로 한 주변 인물로 본다. 이러한 자기 중심에서 떠나서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사도바울의 신자를 향한 권면에 중요한 것은 단순한 악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는 것까지 나아간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한다. 버리는 것뿐만 아니라 선한 행동을 하라는 것이다. 또 신자는 진실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진실하지 않으면 불신이 생긴다. 사람은 자신이 불신을 주는 사람을 믿지 못한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투명해야 한다. 마치 투명한 유리병과 같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들여다 보고 무슨 말을 해도 하등의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누가 와서 보더라도 문제가 없어야 한다. 기독교 도덕은 적극적인 도덕이다, 죄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것 즉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금지한 것을 하는 것 즉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이다. 신자는 자신의 일을 해결해야 할뿐더러 다른 사람을 돌아보아야 할 의무가 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전도해서 교회를 세우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항상 자신이 세운 교회들을 돌아 보면서 그 교회에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며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지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사도 바울의 주옥 같은 서신서들인 셈이다.

깨끗한 양심으로 사역하라

양심은 디모데 전후서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선한 양심, 착한 양심, 깨끗한 양심, 청결한 양심으로 언급한다. 믿음은 선한 양심을 낳는다. 반면 화인 맞은 양심도 있다. 양심이 무감각해진 상태를 말한다. 또는 더러운 양심이라고도 부른다. 양심을 청결하게 하려면 양심의 소리를 듣고 잘못을 인정하고 주님께 나아가 사죄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자신을 고쳐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 이런 상태가 계속 되면 죄악이 습관이 되어 양심의 소리를 이겨낼 인내력 갖추게 된다. 하나님께 설명하고 직고할 수 있을 정도로 청결해야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오직 복음을 전했지 대가를 원하거나 이익을 취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양심의 깨끗함이 있어야지 확신을 가지고 전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양심의 깨끗함, 정결한 마음을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말로만 너희에게 임한 것이 아니고 능력과 성령으로 역사한다고 고백할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복음 증거자였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사표다. 그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산 증거이며 계시다. 사도 바울은 그가 개척한 교회에 짧은 기간 머물렀지만 그들을 완전히 복음으로 바꾸었다. 바울은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들에게 풍부하게 가르쳤고, 그의 인격과 삶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떠난 다음에도 교회는 바울의 복음을 기억했다. 물론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배후에서 역사한 결과였다.

고난으로 겸손과 순종을 배우다

사도 바울이 깨달은 계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자고, 스스로 높아지게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바울에게 자극을 주시고 그를 낮추셨다. 사도 바울의 삶, 그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계시의 도구가 되었다. 그가 여행하거나 이야기 하거나 하는 등등이 모두 계시의 도구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도구가 된 사도바울을 친히 하나님께서 다루셨다. 그러한 다루신 방식을 보면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이 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 된다. 그 그림의 중심에는 고난이 있다.
우리를 하나님께 중보해야 될 그 중보자는 우리의 연약함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때때로 유혹에 넘어질 때, 그 분께 가서 우리를 도와달라고 이야기 할 때 그 중보자는 우리를 이해하신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사건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끊임없이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다 담당하셨다. 그 억울함과 분노가 죄가 아닌 것은 그것이 정당했기 때문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는 ‘할 만 하시면 내게서 잔을 옮겨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웠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도 그와 같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셨던 삶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삶이었다. 신자에게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약속했다는 말씀이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씨름하지 말라고 하셨다. 다만 하나님 나라의 그의 의를 추구하라고 하셨다.
사도 바울 당시에 그리스 로마에 자신들이 굉장히 종교적이며 굉장히 신비한 세계 거룩한 지식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 같은 거룩한 지식을 획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비결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이 매우 특별한 사람처럼 보였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종교 사기꾼이다. 하나님의 종은 자기가 특별한 비결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인간적인 사람이다. 그는 인간적인 것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슬퍼할 때 슬퍼하고 분노할 때는 분노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특별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주의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겸손한 척 한다. 하지만 말씀과 성령으로 분별해 보면 그 실체를 알 수 있다. 사도 바울 당시에 이런 부류 중에는 천사를 숭배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이 갈라디아서 등의 서신서를 통해 나타나 있다. 오늘날에도 종교를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이 특별히 영적인 세계에 접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욕심은 더 위험하고 맹목적이다. 복음은 정당하고 합리적이며 아름답다. 복음에서 불신자가 흉내내지 못하는 참된 인간성이 흘러 나온다. 참된 신자는 지식과 총명(건전한 판단)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풍성해진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사랑이 Impassioned love 그 대상에게 무엇이 도움이 될지를 지식과 판단을 가지고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사랑을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만약 고난을 통해 겸손과 순종을 배우지 못했다면 바로 위에서 말한 종교 행상인으로 얼마든지 전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난과 순종을 통해 삶으로 예수님을 배웠고 그것이 그를 일세기의 위대한 사도로 인격을 형성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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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영혼 평안해 [2] 이창무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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