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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 미술 순례’를 읽고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창비 출판사) 공지영 작가가 항상 끼고 다니며 읽는 책이라고 해서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그래서 한껏 기대를 하고 책을 펼쳤는데 첫 장부터 실려 있는 괴괴망측하고 잔혹한 그림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 했다. 그것은 헤랄드 다비드의 <캄비세스왕의 재판>이라는 그림인데 살아 있는 한 남자가 나체로 나무 탁자위에 누워있고 4명의 형리가 그의 살가죽을 벗기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몇 권의 미술에세이들을 읽어보았지만 이런 그림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과연 뒷장부터 펼쳐질 그림들은 어떠할까. 혹시 비슷한 그림들? 아니면 처음 그림과는 다른 그림들? 어떤 그림들이 펼쳐질까 궁금해 하며 아니 조마조마해하며 책장을 넘겨 그림들을 쭉 살펴보았다. 그런데 맙소사. 전부는 아니지만 이런 무시무시한 그림들이 많이 실려 있는 것이었다. 시체를 해부하고 있는 그림. 잔인한 형벌을 받고 있는 순교자 그림, 십자가 형벌을 당하고 계신 예수님 그림, 우물 옆에서 늙은 사내 둘이 발가벗은 여인에게 달려드는 그림, 사람들이 총살당하는 그림, 뱀과 지렁이에게 몸이 파 먹히고 있는 시체 그림들이 그것이다. 고흐의 그림도 있고, 수태고지 그림도 있고, 일견 평범해 보이는 초상화들도 실려 있지만 대체로 모골이 송연해지게 만드는 그림들이 많았다. “공지영 작가가 분명 이 책을 엄청 치켜세웠는데... 공지영 작가의 취미가 독특한 것인가? 그냥 읽지 말까” 하다가 “그래도 한번..”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무시무시한 그림에 담긴 사연과 속 깊은 의미를 알게 되니 그림에 대한 오해(?)가 풀리기 시작했다. 또한 작가의 통찰력 있고 예민한 감수성이 느껴지는 글에 매료되었다. 작가 서경식은 1951년에 동경에서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나 와세다 대학 불문과를 졸업했다. 두 형이 한국에서 유학 중 간첩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는데 어머니는 9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자식들 옥바라지를 하다가 암으로 죽고, 3년 뒤 아버지마저 어머니 뒤를 따랐다. 부모님을 잇 따라 잃고 허탈해있던 때 저자는 뚜렷한 목적 없이 유럽여행길에 올랐다. 발길 닿는 대로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 그리고 성당을 순례하며 미술작품들을 감상하고 글로 남겼는데 많은 사람들이 익히 들어봤을 법한 또는 보았을법한 작품이 아닌 우연히 들른 곳에서 작가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끈 작품을 위주로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 소개된 그림 <캄비세스왕의 재판>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원전 6세기에 재위한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군주 캄비세스는 시삼네스라는 재판관이 뇌물을 받고 부정한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죄에 대한 형벌로 산 사람의 껍데기를 벗기는 가장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일반인보다도 훨씬 더 무겁고 엄한 형벌을 내림으로써 부패한 법관과 관리들에게 일대 경종을 울리고자 했던 것이다. 화가 헤랄드 다비드는 고향인 브뤼주 시청사의 시참사회실에 걸릴 그림을 의뢰받고 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렸는데 모든 판사와 시참사들에게 영원히 타락, 부패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을 잃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 그림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담겨있는 글을 발췌해서 옮겨 적어 본다. “나는 무엇보다도 우선 흐르는 피 한 방울까지도 놓치지 않고 그려내려고 하는, 가열한 사실정신에 압도당했다. 브뤼주에 오기 전, 암스테르담에서 이미 렘브란트나 로이스달 그리고 고흐를 숱하게 보았다. 그것들을 직접 내 육안으로 보는 일은 오래된 나의 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 못지않게 내가 흥미 있었던 것은 이곳 플랑드르 지방 특유의 정물화들, 구체적으로 말해서 새우며 생선토막, 병, 은그릇, 껍질이 반쯤 벗겨진 레몬 따위 그 질감이나 양감에 있어서 사뭇 묘사해내기 어려운 대상들만을 골라서 더 바랄 나위 없이 정밀하게 그려낸 17세기의 숱한 정물화들이었다. 급기야 그것은 오직 신기에 가까운 사실력만을 과시하는 트롱프뢰유(실물로 착각할 정도로 정밀하고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로 이어졌다. 그보다 거의 2세기나 앞선 시대에 이 브뤼주의 화가는 벗겨지는 살껍질의 주름살과 그 밑에 드러나는 근육의 부풀어오른 혈관 따위를 묘사하는 데 17세기 플랑드르 사실화의 선행자다운 집요함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이 그림은 신이나 교회에 바쳐진 것이 아니라 지상의 인간에게, 그들의 시민적 자치제도에 바쳐진 것이다. 부정부패에 내려지는 것은 신벌이 아니라 인간들 스스로가 내린 형벌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여기 표현되어 있는 것은 구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시 한자동맹의 자치상업도시로서 번영을 구가하던 브뤼주 시민들의 각박하고 가열한 합리정신이었던 셈이다. 이것은 또 북방 르네상스의 정신적 풍경이었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흔히 문예부흥, 인간성 부활이라 말하는 르네상스의, 몸 전체로 피를 철철 흘리며 근대를 향해 탈피해나간 추상열일의 모습이 여기 있다. 나는 이 한 장의 으스스한 그림으로 하여, 중세로부터 근대로 이어지는 서양 역사의 계승과 전환이 응축된 현장에 문득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여행길에 무심코 들른 미술관이나 성당에서 갑자기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발길이 얼어붙는 경우가 있다. 한 장의 그림, 한 덩어리 조각상이 시공을 초월해서 사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마력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내가 그런 경험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돌이켜보건대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시작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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