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뿌쉬낀의 '대위의 딸'을 읽고
(출판사 – 열린책들)
이 책은 고려대 인근에 있는 북카페에서 구입했다. 어떤 곳일까 궁금해서 한 번 들어가 보았는데 책을 사면 아메리카노 한 잔을 무료로 준다고 해서 책을 사게 되었다. 대학교 앞에 서점 하나 없는 것을 한탄한 고대 90학번 선배들 몇 명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차렸다고 하니 참 의미가 있는 북카페 같다.
‘대위의 딸’은 시인으로 더 잘 알려진 뿌쉬낀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18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실제로 있었던 뿌가초프의 반란을 소재로 쓰여진 역사소설이기도한데 거대한 역사의 흐름보다도 반란과 진압의 혼돈 속에서 꽃 피웠던 평범한 인간들의 사랑, 개인 간의 우연한 만남과 선의에 더 초점을 두고 쓰여졌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장교가 된 귀족 자제 뾰뜨르 그리뇨프는 임지인 벨로고르스끄 요새로 가는 도중 극심한 눈보라를 만나 길을 헤맨다. 그러던 중 어느 농부가 나타나 길을 안내해 주어 여인숙에서 안전하게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하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리뇨프는 자신이 입고 있던 토끼털 외투를 벗어서 그 농부에게 선사한다. 요새에 도착한 그리뇨프는 사령관인 미로노프 대위의 가족과 친해지고 대위의 딸인 마리야와 사랑에 빠진다. 마리야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선임 장교 쉬바브린은 둘 사이를 질투하여 여러 가지로 방해를 한다. 그러던 중 뿌가초프의 반란군이 벨로고르스끄 요새로 쳐들어와 미로노프 대위 부부는 처형을 당하고 쉬바브린은 변절하여 뿌가초프 군에 가담한다. 그리뇨프 또한 반란군에게 처형당할 위기에 놓였으나 그가 자신에게 토끼털 외투를 선사한 장교라는 것을 알아본 뿌가초프는 그리뇨프를 살려준다. 뿌가초프는 점점 세력을 넓혀가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면서도 그리뇨프와 그의 약혼자 마리야만은 안전하게 지켜준다. 반란이 진압된 뒤 그리뇨프는 뿌가초프와 친했다는 이유로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혀 정부군에 의해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리뇨프의 약혼자 마리야는 예까쩨리나 여제를 찾아가 그리뇨프의 사면을 탄원한다. 진실을 알게 된 여제는 그리뇨프를 풀어주라고 명령하고 사면된 그리뇨프는 마리야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산다. 그러나 그 둘은 자신들에게 선처를 베풀었던 반란자 뿌가초프의 처형을 목도하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의 소설들을 접해본지라 러시아 소설의 특징이나 분위기를 잘 아는데 같은 러시아인이 쓴 뿌쉬낀의 소설은 다른 러시아 소설들과는 차이점이 확연하다. 이 소설은 현대적이면서도 서구적인 느낌이 물씬 난다. 무거운 역사적 사건을 굉장히 가볍게 그리고 있고, 간략하게 서술할 뿐 구체성이 없다. 또한 유머가 있다. (유머가 흐르는 러시아 소설을 본 적이 있는지?) 번역자의 작품해설을 보니 이 작품은 리얼리티의 축소와 왜곡을 통해서 오히려 더 진솔하게 리얼리티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작가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적 사건을 사소하게 처리하고 개인사와 개인 간의 만남을 오히려 중요하게 처리함으로써 역사란 개인을 배제한 거창한 흐름이 아니라 개인의 일상적인 삶과 사랑, 만남, 우정, 갈등, 화해 등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이러한 개인의 삶이 없이는 역사도 의미가 없다는 역사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리뇨프와 마리야의 사랑보다도 그리뇨프와 뿌가초프간에 주고 받은 선의가 더 인상 깊었다. 자신이 받은 선의를 잊지 않고 보답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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