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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문헌 전쟁과 하나님의 주권(지평서원,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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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

‘전쟁에 대한 신앙인들의 관점과 태도’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낯선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과 태도에는 언제나 두드러지는 두 가지 경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전쟁의 문제를 하나님과 거의 무관하다고 보든지, 혹은 아주 간접적으로만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경향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전쟁을 오로지 인간의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오로지 전쟁과 관련된 인간 행위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들의 관심은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전쟁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등의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일반적인 원인들, 혹은 특정한 전쟁이 발발한 원인들을 찾아내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 심리적, 철학적 이론들이 그 비밀을 풀 만한 실마리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종교가 정당하고도 지속적인 평화를 만들어야 열정적으로 믿으며, 그런 평화를 만들기 위해 택해야 할 다양한 수단들에 대해서 토의합니다. 이런 모습은 특히 스스로를 평화주의자로 부르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데, 사실 그들 중에는 평화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전쟁이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끼치는 영향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스도인이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어떤 종류의 평화 조약을 옹호해야 하는가?” 등이 그들의 쟁점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쟁점들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이 때대로 영적이거나 기독교적인 측면을 강조한다하더라도 실제로는 여전히 전쟁을 하나님과 직접 관련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이 말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것이며, 인간의 어리석은 죄의 결과일 뿐 하나님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기본 전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너무나 당연한 사실로 여겨 토론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 전쟁은 오직 인간적 차원의 문제요 순전히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질문인 것입니다.

두 번째 경향은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특히 두드러진 차이점은 하나님이 전쟁에 직접 개입하신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과 관련된 질문들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가장 주된 관심은 ‘전쟁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가 아니라, ‘전쟁이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에 부합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전쟁의 발단이나 그와 관련된 그들의 당면 과제에 대한 설명이 아닙니다. 그들이 알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질문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전적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문제가 명쾌하게 풀리지 않는다면, 다른 모든 문제들은 그들에게 무의미하고 불필요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점도 이 두 번째 경향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방법(길)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을 주로 주관적인 차원에서 숙고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더욱 객관적인 질문을 다루려고 합니다. 물론 이 배경에는 ‘하나님은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라는 주관적인 의문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매우 객관적인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용하신다는 사실과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 이러한 질문은 1914-18년의 전쟁(제 1 차 세계 대전) 동안 매우 빈번하게 제기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 전쟁(제 2 차 세계 대전)의 상황에서는 그런 질문이 그리 자주 제기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이 우리의 불신앙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 두려워집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이 그만큼 불경건해지고 타락하여 결국 단지 태도나 견해나 이념이나 행위의 수준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 두렵습니다. 아무튼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으므로 우리는 그 문제를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전쟁의 관련성에 대한 견해

그런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크게 세 분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무례하고 거만하게 묻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전쟁이 하나님이 아예 존재하시지 않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해도 틀림없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라는 데 대한 궁극적인 증거가 된다고 단정합니다. 그들의 질문은 의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선언에 더 가깝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사례들처럼, 여기서의 실제적인 문제는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입니다. 전반적인 태도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과 같은 특정 질문과 관련하여 그들에게 조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권면해야 합니다. 가장 주된 문제에 대하여 명백히 옳지 않는 견해를 가진 사람과 부차적인 문제에 대하여 명백히 옳지 않는 견해를 가진 사람과 부차적인 문제들로 토론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않는 사람과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길)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애써야 할 대상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진실하고도 정직한 의문을 품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아마도 ‘경건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과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들의 신앙이 결코 가볍지 않으며, 절대 의심의 악한 풍조로 그 신앙을 파괴하거나 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정통파요, 그리스도인이 믿어야 할 모든 신조를 제대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자기의 신앙을 기뻐하며, 신앙이 삶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그 관심은 거의 전적으로 개인적입니다. 구원의 경험의 측면에서도 개인적이며, 기독교 신앙을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만이 그들의 주된 관심과 숙고의 대상이라는 점에서도 개인적입니다. 성경 공부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기 영혼의 양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연구합니다. 그리고 ‘경건하다’고 알려진 주석들을 참고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학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험하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에 관심이 없습니다. 지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세상에 대해 문을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 그런데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만 관심이 있을 뿐 다른 세상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평화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모든 일이 만족스럽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발발은 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 큰 문제로 고민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먼저 ‘전쟁이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에는 이 문제에 직면해 본 적이 없으므로, 이 문제 앞에서 종종 그들은 아주 곤란한 처지에 빠집니다. 특히 앞서 언급한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전쟁에 대해 토론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개인적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이 문제로 당혹스러워하는 세 번째 부류는,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에 대해 희미하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 중에서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사랑’에만 집중합니다.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을 무시하거나 때로는 전적으로 배제한 채로 오직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들의 신념마저 감상적이고 연약합니다. 특히 이런 관점은 평소에 그들이 용서해 대해 견지하고 있는 입장과 시각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무조건 용서하시는 분으로, 마치 의나 거룩함을 가지고 있지 않는 분처럼 묘사합니다. 그들에게는 상황에 따라 하나님이 벌하시기도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낯설기만 합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그들은 오직 그분의 용서와 인류를 향한 자비로움만을 인식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시려는 분으로만 믿는 그들로서는 하나님이 그토록 잔혹하고도 고통스러운 전쟁을 어떻게 허용하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믿음과 충돌하는 관점입니다.

성경적 접근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견해 중 뒤의 두 견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숙고해 봅니다. 그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지적인 혼란뿐 아니라 실제적인 고통까지 야기시키는 진지하고도 정직한 고민거리입니다. 그에 대한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분명한 것은, 한 번의 설교만으로 이 문제를 철저하게 다루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일반적인 원리들을 제시할 수 있는 뿐입니다. 덧붙이자면,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라는 이 현실적인 질문이 성경에서 동일하게 직접적으로 제기되거나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이 본문 역시 가장 근접한 내용일 뿐입니다. 본문이 우리의 관심사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기는 하지만, 전쟁의 발단에 관해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의 해석이 아니라 이 주제에 관한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가장 쉽게 긍정적인 차원과 부정적인 차원의 대답으로 나누어 생각해 봅시다.

부정적인 차원의 대답

부정적인 차원의 대답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용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분이 전쟁을 허용하실 수 없다거나 전쟁이 전적으로 그분의 통제를 벗어난 일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문제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런 불평을 검토해 보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추정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질문이 왜 잘못되었는지 그 근거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의심할 여지 없이 대부분 그런 실수는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그 가르침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읽는 수고도 하지 않은 채, 자유분방하게 크게 떠들며 가르치는 사람들의 주장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됩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아마도 이것이 사람들이 예전보다 금세기에 더욱더 빈번하고 심각하게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원인인 듯합니다. 예전에는 신학과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삶이 성경과 그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점점 더 철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그림을 그려 놓고는 거기에 들어맞지 않는 듯한 일들이 생기면 놀라며 애를 태우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깨닫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았던 사람들은 전쟁과 하나님의 관련성에 대한 문제 때문에 걱정하거나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쟁이 신앙의 기초와 토대를 흔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쟁이 신앙의 기초와 토대를 흔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 그 어디에서도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전에 전쟁이 사라질 것이라고 약속한 적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이 그와는 정반대로 가르치고 있음을 그들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예언하신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세대가 끝나기 전까지는, 특히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전쟁과 전쟁의 소문’ 그치지 않으리라는 주님의 예언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마 24:6,7) 그들은 계시록에서도 같은 점을 지적하는 어둡고도 신비로운 예언들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말씀도 기억하였습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딤후 3:13)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살후 2:7)

이 세상이 한편으로는 그 자체의 내적 역학 관계가 작용함에 따라,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 선포와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획과 목적에 따라 점점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해 간다는 사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사상이 여러 해 동안 널리 유행해 왔으며, 불신자들은 물론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스며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런 말들을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다양한 교육적, 문화적 매체들을 통해 가르침과 정보를 얻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지나면 전쟁이 사라지고 우리 모두가 평화와 풍요와 보편적인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인간은 지성과 계몽에 의해 전쟁의 어리석음과 끔찍함을 직시하고서 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도 틀림없이 인간 이상으로 전쟁을 미워하시기 때문에 전쟁을 막고 피할 수 있게 하시리라 주장되어 왔습니다. 만일 ‘우리가’ 완벽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면 전쟁이 사라질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틀림없이 우리보다 더 간절히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며 그렇게 행하실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 식의 주장은 널리 퍼져 나가 매우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실제로 그렇게 믿었고, 어떤 이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거나 검토해 보지도 않은 채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믿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전쟁을 막으시리라는 것이 그들의 ‘신조(dogma)’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관련된 그들이 주된 사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것이 순전히 허구요 상상일 뿐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세계를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에게 지금과 같은 전쟁의 시대가 오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전쟁의 소문이 들릴 때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마 2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과 마음으로 미리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최고 계시로 간주한다면, 전쟁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정도로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적인 ‘세계관’은 철저히 비관론적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면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약속들을 발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덧없는 우리의 희망 사항과 욕구를 하나님의 계획에 반영시키려 하다가 그렇게 되지 않아 놀라고 실망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왜 전쟁을 허용하시는가?”라는 질문을 숙고하면서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전쟁을 막거나 금지하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두 번째 대답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전쟁을 금지하셔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왜 하나님이 전쟁을 반드시 막으셔야 하는가?” 전쟁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막으셔야 한다는 이론적인 이유 말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전쟁을 막아 주시기를 기대하는 실제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고 또 그렇게 살 권리를 가진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즉시 또 다른 의문을 불러 일으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이 문제 전체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누릴 어떤 권리가 있는가? 우리는 왜 평화를 바라는가?”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 얼마나 많이 생각해 보았을지 궁금합니다. 우리에게 평화롭게 살 권리가 당연히 주어져야 한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평화의 진정한 가치와 목적과 기능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런 생각과 질문에 관심을 가졌어야 합니다. 특히 가까스로 전쟁의 발발을 피했지만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위기에 직면했던 지난 12 개월 동안 말입니다.
성경은 적어도 두 곳에서 우리가 왜 평화를 바라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먼저 사도행전 9장3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말씀은 박해와 불안의 시기 이후에 교회에 일어났던 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시 교회에 일어났던 그 역사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도록 평화를 갈망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디모데전서 2장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 말씀도 동일한 점을 강조합니다. 단지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또는 그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삶의 혼란과 고초와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서 평화를 바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보다 더 고귀한 목적을 위해 진정으로 평화를 열망해야 합니다. 곧 경건하고도 거룩한 삶을 영위할 기회를 얻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 자신을 믿음 위에 세우는데 충분히 시간을 사용하고 최선을 다하기 위하여 평화를 열망해야 합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삶을 선물하신 이유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다른 모든 선물들과 즐거움들은 우리의 삶의 주된 목적에 뒤따르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를 바라는 것도 평화를 누림으로써 전쟁의 때보다 더 자유롭고도 온전하게 그 의무를 감당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참으로 그것이 우리가 평화를 바라는 이유입니까? 진정 그것이 지난 수년 동안 우리가 평화를 원했던 이유입니까? 그것이 평화를 위한 우리 기도의 진정한 동기입니까? 그에 대한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동기가 단지 전쟁의 결과를 피하고자 하는 순전히 이기적인 것일까 봐 두렵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단지 자신의 삶을 마음껏 영위하는 데 방해받지 않으려고 평화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삶은 우리가 방금 살펴본 성경 구절에 묘사된 바와 전혀 다릅니다.

1914-18년 전쟁(제 1 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잠시 복된 평화를 누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하나님과 신앙을 버리고 물질적이고도 죄악된 삶에 안주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전쟁을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거짓된 안도감 속에서,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여러 가지 안전보장 장치들과 조항들을 버팀목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 쾌락을 따르는 삶으로 치달았으며, 결국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나태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눈에 띄게 종교가 쇠퇴했을 뿐 아니라 도덕이 땅에 떨어졌으며,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퇴보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이기적이고도 육적인 쾌락을 따르는 삶과 모든 면에서 나태한 삶을 낳았습니다.

또한 그러한 삶은 독일 지도자들의 타락과 그 타락에 근거한 잘못된 계산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영적인 이유로 평화를 바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기력을 잃어버려서 우리의 여유로운 삶을 조금도 방해받기 싫어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1938년 9월 (뮌헨 회담)에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으로 몰려와 평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평화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평화를 오직 하나의 선한 목적을 위해 활용하고자 결심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까?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함이었습니까? ‘성령의 위로 가운데 주를 경외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함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음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까? 그럴 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평화를 주시고 유지시켜 달라고 간청하는 합당합니까? 만일 우리가 평화를 누리기에 부적합하고 그럴 만한 자격이 없으며, 우리의 불순종과 불경건함과 악함으로 인해 평화의 복을 남용해서 전쟁이 일어난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지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하는 삶을 영위하고자 하나님께 평화를 유지시켜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겠습니까?

긍정적인 측면의 대답

이제 우리는 이 중대한 질문을 소위 ‘긍정적인 대답’이라고 할 수 있는 측면에서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용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전쟁을 허용하실까요? 성경은 이 문제를 어떻게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을까요? 여기서는 구체적인 진술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와 관련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기본적인 원리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우리는 ‘전쟁에 관한 성경적 관점’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무엇인지를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전쟁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니라 죄의 결과이며, 죄가 표현된 한 가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정론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구분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여전히 논쟁거리는 남아 있습니다. 성경은 전쟁의 최종적이고도 궁극적인 원인을 파헤칩니다. 물론 성경이 그토록 많이 제시되었던 여러 가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원인들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원인들은 전쟁 당사자들에 의해 개입된 피상적인 요소에 불과합니다. 진짜 원인은 더 은밀히 숨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은 ‘정욕과 욕심’입니다. (약 4:1,2 참고). 죄의 결과 우리의 일부가 되어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 탐욕, 금지된 것과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애끓는 욕심이 바로 전쟁의 궁극적인 원인입니다.

정욕과 욕심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는데, 개인의 사생활은 물론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것은 절도와 강도, 시기와 다툼, 교만과 증오, 배신과 이혼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 간에 다툼과 분쟁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동일한 방식으로 국가 간에 전쟁까지도 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전쟁을 따로 떼어서 마치 그것이 다른 것과는 동떨어진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다루지 않습니다. 전쟁 역시 단지 죄가 표출된 한 가지 형태이자 죄의 결과일 뿐입니다.

규모만 생각한다면 아마도 전쟁이 더욱 끔직한 모습이긴 하겠지만, 그 본질은 다르게 나타나는 죄의 결과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전쟁으로 인하여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대문에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명을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고 단지 탐욕과 복수 때문에 생명을 취하는 것을 금지하는 동시에 하나님 편에서 볼 대 영혼이 육체의 생명보다 무한히 더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몸속이 이 땅에서 몇 년 정도 더 유지되고 연장되는 것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영화롭게 하면서 사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시간과 삶의 지속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면서 궁극적으로 삶의 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가 원인이 되어 나타나는 다른 형태의 불행한 결과들과 전쟁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조용하게 나타나든지 혹은 요란하게 나타나든지, 죄는 언제나 고통과 불행과 수치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겉으로 부각되거나 큰 규모로 나타날 때에야 비로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본질적인 원인을 찾는 일에는 소홀합니다. 그것이 진정 중요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하나님께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결국 죄로 인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가 나타나지 않도록 막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혹은 우리가 전쟁 그 자체를 실제적인 죄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특정한 죄를 막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기도에 이기심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요소가 들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쟁이라는 죄의 형태나 결과가 특별히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께 그것을 막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러한 것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그분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막아 달라고 기도할 것이며, 모든 불의를 억제시켜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분에게 우리의 술 취함을 막아 달라고 구할 것이며, 도박과 부도덕과 악덕과 안식일을 어기는 죄와 우리가 탐닉하고 있는 온갖 죄들을 짓지 않게 해 달라고 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나서서 그렇게 기도하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곧바로 자유를 들먹이면서 거세게 저항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크게 자랑하며,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 개입하신다는 사상이나 가르침에 분개합니다. 그러면서도 바로 그 자유를 행함으로써 전쟁의 공포와 괴로움에 빠진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면, 마치 안절부절못하는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항의하고 불평을 터뜨립니다. 왜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으로 전쟁을 미기 막지 않으셨냐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무한하고도 영원한 지혜로 죄를 미리 막거나 죄의 결과를 전적으로 억제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전쟁은 영적인 차원과 종교적인 차원으로 분리되어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라고 하는 거대하고도 중요한 문제의 일부, 또는 그것이 표출된 한 형태일 뿐입니다.

둘째, 성경의 교훈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용하신다는 사실을 더욱 긍정적으로 설명해 주는 이유들을 제시합니다. 그 이유들을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전쟁을 허용하시는 첫 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의 결과를 징벌로써 감당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본적인 법칙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6:7)
모든 징벌이 다음 세상으로 미뤄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벌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보면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분의 거룩한 율법을 조롱했습니다. 잠시 동안은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고통받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한 보호의 손길을 거두시고 그들이 대적의 손에 떨어져 공격받고 강탈당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진정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죄와 불법의 결과로서 형벌을 선언하셨습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모든 고통스러운 죄의 결과는 죄로 인해 부과된 형벌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반대로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지만 왜 죄 없는 사람들까지 고통을 받아야 합니까?” 이에 대해서는 여기서 충분히 대답할 수 없으므로 몇 가지 핵심적인 대답만 제시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입니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자신의 개인적인 죄의 결과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의 결과를 거두어야만 합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국가나 특정 부류의 죄의 결과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한 개인인 동시에 국가와 인류의 구성원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구원합니다만, 그것이 우리가 국가와 인류의 구성원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태양 아래 있으며 같은 비를 맞고 같은 질병과 죽음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산업의 침체나 다른 원인들로 인해 동일한 불행과 어려움을 겪기도 하며, 전쟁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죄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한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할지라도 죄에 대한 징벌의 일부를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용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전쟁을 통해 인간들의 이전에 행했던 일, 즉 죄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평화로울 때에 우리는 죄를 가볍게 여기고 인간의 본성을 낙관적으로 바라봅니다. 반면 전쟁의 때에는 인간의 참모습이 드러나고 인간 내면에 감춰져 있는 악한 본성이 고개를 듭니다. 1914-18년의 전쟁(제 1 차 세계 대전)은 그토록 오랫동안 인간 사회를 지배하던 낙관적인 전망을 산산이 부수고, 인간 본성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것을 폭로했습니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는 칼 바르트(Karl Barth)에게 영향을 받은 신학적 갱신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위기와 전쟁 앞에서는 피상적인 장밋빛 전망이나 낙관적 이상주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위기의 우리로 하여금 삶의 토대를 점검하도록 만듭니다. 우리를 그러한 재난으로 이끈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직접적인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듭니다.

그 원인을 단지 특정한 사람들의 행동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이기심과 증오, 시기심과 질투, 악의와 반감 등이 개인적, 사회적 관계에서,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에서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이에 대해 변명하고 발뺌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더 큰 국면에서는 그것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교만하고 어리석은 인간은 죄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배당에 가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는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은혜롭고도 자비로운 복음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잘 안다고 믿으며, 하나님 없이도 인간이 합력하여 완전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전쟁을 허용하심으로써 그들이 평화로울 때에 인정하고 배우기를 거절했던 것들을 그들에게 밝히 드러내시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참된 본성과 죄의 결과를 깨닫게 하십니다. 인간은, 사랑의 손길로 건네졌을 대에는 거부하고 거절했던 것이 종종 고통 속에서 건네질 대에 그것을 받아들이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허용하시는 세 번째 이유는, 이를 통해 결국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곧 우리도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탕자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곤고하고도 비참한 처지가 되어 고통을 예민하게 느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미련함을 깨닫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와 집을 생각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묘사하는 말씀 가운데 가장 흔히 등장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시 107:6)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시 107:13) 그들은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사랑과 은혜의 호소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기억했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고통을 당하고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나서야, 우리의 전적인 부패와 무력함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그분을 의지합니다.

인간의 본성과 삶에 대해 수고할 때에 저를 놀라게 하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전쟁을 허용하셨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분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입니다.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십니다.’9마 5:45 참고). 그분은 수세기 동안 이스라엘들의 악과 패역함을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이천년 동안 세상에 대해 참아 오셨습니다. 독생자를 통해 내미시는 사랑의 손길을 거부하는 세상에 대해 참아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은 왜 전쟁을 허용하십니까?”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이 불의와 죄악 가운데 스스로 파멸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까? 왜 하나님은 붙잡으시는 은혜로 죄와 악을 제한하시고, 그것으로 하여금 정해진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하십니까?”

오, 악한 이 세상을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가 얼마나 놀라운지요!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경이로운지요!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이것을 보지 못하고 또 보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전쟁과 같은 것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전쟁을 통하여 우리를 징계하고 벌하고 가르치시며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무엇보다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그분의 은혜로운 제의를 받아들이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작 우리가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은 왜 이 전쟁을 허용하시는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 교훈을 얻었는가? 이런 결과를 초래한 우리 마음의 죄와 인류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참으로 회개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각과 참된 회개의 영을 허락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상, 전쟁과 하나님의 주권(지평서원, 2010년, 마틴로이드 존스)의 제 4 장을 워딩한 것입니다)
     
이름아이콘 황노아
2010-08-08 16:00
하박국 선지자도 비슷한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합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 악을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약속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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