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BF > 안암 > 컬럼 > 모세컬럼(김모세 목자님) |
ㆍ작성자 |
mk
|
ㆍ작성일 |
2019-11-04 (월) 22:50 |
|
ㆍ추천: 0 ㆍ조회: 683
|
|
ㆍIP: 175.xxx.60 |
|
|
비탈리의 '샤콘느'
수년 전에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의 한 선교사님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튿날 시내에 있는 제법 큰 성당에 들어가 본적이 있는데 성당 홀 어디선가 의외로 비탈리(Vitali) 의 '샤콘느(Chaconne)'가 흘러 나왔었다. 이 음악을 들으면서 성당의 중엄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며 그의 죽으심에 마음이 압도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후 사콘느를 들을 때면 언제나 그리스도의 고난, 곧 십자가 고상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음악이 17세기 후반이나 18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종교개혁기 이후 100년이 더 지난 때인데 웬지 이 음악은 나를 종교개혁시대의 슬픔과 비참함을 생각하게하며 아주 깊은 역사의 회한에 빠져 들어가게 한다. 구교와 신교가 싸워도 싸워도 끝이 나지 않는 전쟁을 하다가 우리 이제 그만 싸우자 끝도 없겠다 하며 웨스트팔리아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렇게 손에서 칼은 놓았지만 뭐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서로의 다름을 할 수 없이 인정하면서 각자의 길을 가게 되는데 이러기에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느냐를 가지고 그토록 죽이고 죽고 죽고 죽이며 싸웠으니 이것을 보는 그리스도의 고통은 어떠했을까를 상상해보게 된다. 십자가에 달려 손과 발에서, 그리고 머리에서,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며 생명을 잃어가는 흐린 시선으로 그들의 피묻은 칼을 내려다보는 그리스도의 처절함이 속수무책으로 보인다.
인간의 역사에는 아무리 가르쳐도 알지못하고 아무리 말해도 서로 통하지 않는 그래서 그렇게 서로 죽이고 죽는 그런 비극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갚아야하는 죄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지 한없이 절망스럽다. 십자가 고상 앞에 잠시 서 보면 그의 고통과 절망 안에 우리의 역사가 있고 내가 있어 심장이 터질 것같은 슬픔을 겪는다. 우리는 참으로 비통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번에는 역으로 그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 구원의 감동을 비로서 누리기 시작한다. 그의 그런 고통이 있었길레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이 있는 것이다.
사라 장은 이 힘든 음악을 도대체 무슨 심장으로 연주할 수 있었을까! 이 음악 영상을 누가 만들었는지 음악이 새롭개 해석된다. 역사는 높은 산꼭대기에서 부터 떨어져 내리고 구르며 흐르는 물줄기가 긴 강을 이루며 하염없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 그 종말은 멸망이고 심판이다. 지구는 갑자기 날아들어온 유성과 충돌해 폭발하며 최후를 맞는다. 그런데 잠시후 그 멸망의 터 위에 싹이 나고 꽃들이 아름답고 화려하게 피어나는데 ... 그래서 한없이 슬프게만 들렸던 샤콘느는 갑자기 희망의 음악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으심의 터 위에서 마침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탄생되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역사가 이 땅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샤콘느는 우리의 슬픔과 고통, 희망의 음악이 되어준다. 2019 07 03
|
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