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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2018 마가복음 14강
성경본문 마가복음 7:24-37
전한날짜 2018-06-10
ㆍ조회: 245  
이방인의 메시아 예수님
마가복음 제 14 강
말씀/ 막 7:24-37
요절/ 막 7:34

이방인의 메시아 예수님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34)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을 여행하시면서 이방인 두 사람을 고쳐 주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간구하였을 때 더러운 귀신들린 딸이 낫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또 사람들이 데리고 온 귀머거리 벙어리를 보자 예수님은 탄식하시면서 ”에바다!”라고 말씀하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모든 만민의 메시아가 되심을 배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믿음은 어떤 것인지를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이방 여인의 믿음을 축복하신 예수님 (24-30)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 두로 지방을 방문하신 후에 시돈을 지나 데가볼리 지방을 거쳐 갈릴리로 돌아오는 긴 여행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 땅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두로는 가버나움 서북쪽 65km 지점에 있는 지중해의 항구도시로 과거 오랫동안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했던 페니키아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이곳은 예수님 당시에 헬라화 되어 있던 곳으로 이방 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방 땅에 가셨을까요? 예수님은 6장에서 오병이어로 남자 오천 명을 먹이셨는데 요한복음 6:14-15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잠시 몸을 피하신 것입니다. 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비판을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떠나 2년 6개월간의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 지으시고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는 한적한 북쪽의 이방 땅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방문목적을 잘 알 수는 없으나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사역기간을 제자양성에 더욱 주력하시고자 제자들과 함께 방문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셨지만 숨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두로에 오셨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누가 제일 먼저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요?

1.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수로보니게 여인 (25-26)

25, 26절을 보십시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수로보니게는 시리아-페니키아의 합성어인데 그리스에서는 이 지역을 페니키아로 불렀고 로마제국에서는 시리아로 불렀다고 합니다. 두로 사람들은 주로 페니키아인(베니게인)이었는데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진출한 페니키아인과 구별하기 위해 시리아계 페니키아인이라고 해서 수로베니게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페니키아인들은 장사와 무역에 수완이 뛰어난 자긍심이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니키아인들은 바알을 심하게 섬겼으며 인신제사를 많이 드렸습니다. 노예는 물론이고 심지어 딸이나 아들까지 제물로 바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인신제사를 하는 페니키아인들을 징벌하셨는데 카르타고는 로마에 의해, 두로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이 여인은 시리아-페니키아 지역(지금의 레바논)에서 태어난 그리스인이었습니다.  당시에 그리스인, 즉 헬라인은 지성인을 의미했습니다. 마태에 따르면, 그 여인은 가나안 사람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내쫓은 민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과는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낙후되고 가난했던 갈릴리 지방에 비해 문화가 발달하고 잘 살았던 두로 지방에 사는 페니키아 출신 헬라인 여자라면 아주 도도하고 콧대가 높은 여자였을 것입니다. 물질적 여유도 있고 귀족 가문의 세련된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소위 강남 스타일의 여자였을 것입니다. 남부럽지 않을 이 여인에게 인생의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잘 살던 못 살던 누구나 다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귀족이든 부자이든 다 인생의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집에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여인의 어린 딸입니다. 이 어린 딸이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어린 딸이 귀신 들렸습니다. 그것도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쉬울 것 없는 부잣집의 딸입니다. 여인은 온갖 기대를 걸고 이 딸을 애지중지 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습니다. 돈 많은 부잣집 자녀가 균형 있는 인격과 인간미를 가지고 자라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우매함이라고 하시면서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어린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려 있다고 했습니다. 어린 딸이 이렇게 된 것은 가정의 영향이 큽니다. 부모의 가치관과 성격, 라이프 스타일과 부모가 평소 자녀 앞에서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가 자녀의 인격형성에 영향을 줍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마음이 자책감과 온갖 상념으로 무너져 있었을 것입니다. 여인은 “내 잘못이 크구나. 나의 과도한 자식 사랑과 나의 과도한 욕심으로 혼탁한 이 세상에서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주고 악하고 음란한 세상문화에 내버려 두어 순수한 어린 영혼이 악한 더러운 영들에게 붙들리도록 하였구나”라고 탄식하였습니다. 후회한들 이미 늦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에 붙들리면 사람의 힘으로는 쫓아 낼 수가 없습니다. 어린 딸의 어머니는 절망 속에서 자책하며 슬퍼하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병도 고치실 수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여인은 “아! 예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라고 소망하며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이 자기가 사는 지방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여자가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와서’ (as soon as she heard about him) 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여인은 즉시 달려와 체면과 자존심 모두 내려놓고 필사적으로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여기서 발아래 엎드렸다는 말은 예수님을 경배하였다는 말입니다. 여인의 이 자세는 회당장 야이로의 자세와 똑 같습니다. 마태복음 15:22에 보면 여인은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주”요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로 영접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어떻게 자녀들을 키워야 할까요? 황금만능주의, 출세지상주의, 음란문화 등 혼탁한 어두움의 시대에서 어떻게 자녀를 보호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키울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발아래 꿇어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님들이 하나님 앞에서 깨져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모의 욕심대로 자녀를 키우지 말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발아래 엎드려 자녀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님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 이방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축복하신 예수님 (27-30)

여인의 애타는 간구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반응이 매우 냉담해 보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모두 따뜻하게 맞아 주시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찾아 온 이방여인에게 왜 냉담해 보이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사람들 몰래 제자들과 조용한 시간을 가지시기를 원하셨는데 이방여인이 불쑥 찾아와서 불편하셨기 때문일까요? 어떻게 예수님께서 ‘개’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까요? 이 말은 자존심이 강한 헬라여인에게는  참기 힘든 모욕적인 말로 들립니다. 성경에는 ‘개’(dog)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들을 ‘개들’로 비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거짓선생들인 ‘개들’을 조심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녀’는 이스라엘의 자녀, 곧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으로 이방인들을 ‘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방숭배와 음란문화에 빠져있던 가나안사람들을 경멸했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등 이방군대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린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개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할 만 합니다. 그런데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을 유대의 개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민족을 오랑캐라고 불렀습니다. 중국인을 되놈, 일본인을 섬오랑캐(왜적)로 비하해 불렀습니다. 중국인들은 우리나라와 일본, 만주족을 동이, 즉 동쪽의 오랑캐로 불렀습니다. 다른 민족을 비하하는 말들은 자민족 중심주의 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개’라는 단어는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지칭할 때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떡(bread)을 안 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이스라엘의 특권적 위치를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의 역사 속에서 메시아를 예언하셨고 약속하신대로 메시아 예수님을 유대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대부분이 유대 땅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나중에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시작되고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곳도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에서 복음을 먼저 전달받으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먼저 체험할 수 있는 첫 번째 대상이 유대인들이고 그 다음이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식탁문화를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손을 씻고 식탁에 둘러앉아 빵을 나누어 먹고 손으로 빵을 찢어 빵조각으로 수프에 찍어 먹기도 하고 고기나 기타 음식과 같이 먹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개는 유대인들이 욕할 때 쓰는 사나운 개가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사랑스러운 강아지를 가리킵니다. 공동번역을 보면 강아지(puppy)로 번역되어 나옵니다. 강아지들은 주인가족이 식사하는 동안 식탁 밑에서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다가 주인이 식사를 끝내고 식탁 위에 남은 빵 부스러기와 음식을 주면 꼬리를 흔들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의 은혜가 임할 때는 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애타게 간청하는 이방여인을 그렇게 박대하실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전에도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 주신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또 다른 이유는 7장 첫 부분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대조된 이 여인의 믿음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믿음을 통해 새로운 복음시대에 요구되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여인이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온 그 믿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여인를 테스트를 하심으로 열심을 자극하시고 그 입으로 믿음을 시인케 하여 믿음을 온전케 하시고 축복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녀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고 기적을 체험케 하심으로 이방지역의 복의 근원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여자는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여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소문과는 다른 분이구나 실망하며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나요? 아닙니다! 여인은 딸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룰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인은 예수님께서 반드시 자신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고쳐 주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더욱 간절히 예수님의 발아래 꿇어 엎드려 “주여,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Yes, Lord!” 하고 응답하였습니다. 이 말은 여인의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이 말은 이 여인이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계획의 순서와 섭리를 인정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 주님 말씀이 옳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고 자신은 자격이 되지 않지만 부스러기라도 주실 수 있지 않느냐고 간청하였습니다. “상아래 강아지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고 겸손히 말하면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자기 의에 빠져 교만하였으며 형식을 최고로 생각하며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반면에 이방여인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여인의 말에 큰 감동을 받으시고 그녀의 믿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마태복음 15:28에는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이 말’은 모든 불신과 의심을 뛰어넘는 믿음의 말입니다. ‘이 말'은 감정을 이기고 자신을 이긴 긍정적인 말입니다. ‘이 말’은 겸손하게 은혜만을 간구하는 지혜의 말입니다. 이를 통해 평소에 우리가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웁니다. 예수님은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운 생각을 하면 더러운 말이 나오고 불신의 생각을 하면 불신의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의 생각을 하고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자가 집에 돌아와 보니까 아이가 침상에 누워 있는데 귀신이 나갔습니다(30). 여인은 사랑하는 딸을 끌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Thank you, Jesus!”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축복하시고 더러운 귀신들린 딸을 고쳐 주셨다는 소문이 두로와 시돈과 데가볼리 등 이방 땅에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이방여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인정해 주시고 그녀의 딸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이방인을 위한 때가 온전히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복음의 새로운 시대는 모든 민족에게 개방되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메시아도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요구하시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실제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해서 비관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온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낙심하며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부스러기라도 사모하는 심정으로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겸손히 간구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 (31-37)

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셨습니다.” 시돈은 두로에서 약 20km 지점에 위치해 있고 데가볼리는 갈릴리호수의 남동쪽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갈릴리호수에서 있었던 일인데 이스라엘 안에 있는 곳이 아니고 갈릴리호수와 연결되어 있는 데가볼리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곳은 유대인들이 어느 정도 살고는 있었지만 이방문화가 지배했던 곳이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이 때 사람들은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귀머거리(deaf)이었습니다. 요즈음 말로는 청각장애인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습니다. 또 이 사람은 말을 더듬는 언어 장애자였습니다. 공동번역에 보면 ‘귀먹은 반벙어리’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중으로 신체 장애자였습니다. 귀가 있어도 들을 수도 없고,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을 때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지도 못하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개들이 짖는 소리,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아이들이 노래하는 소리, 엄마가 아이들을 부르는 정겨운 소리들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쓸쓸한 가운데 답답하고 고독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귀먹은 반벙어리를 어떻게 고쳐 주셨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무리를 떠나서 그 사람이 좀 더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따로 데리고 은밀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보통 말씀으로 병자를 고치셨는데 이번에는 그가 말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특이한 방법으로 고치셨습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왜 이런 방법으로 그를 고치셨을까요?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예수님을 경험하도록 그들의 형편과 사정을 고려해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귀먹은 반벙어리의 신체적 장애에 맞는 방법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귀와 혀에 손을 대실 때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의 손길을 느끼면서 마음이 뭉클하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방법으로 그에 대한 따뜻한 위로와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34절을 보면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사람이 듣지 못하는 답답함을 마음 깊이 공감하시고  불쌍히 여기셨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귀먹고 어눌한 사람은 영적으로 귀와 입이 막힌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과 대조적으로 선민인 유대인들의 불신을 생각하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귀먹고 어눌한 것을 보실 때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탄식하신 후에 “에바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아람어로 ‘열려라’ 는 뜻입니다. “에바다!” 이는 영적으로 귀와 입이 막힌 그 시대를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즉시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해졌습니다(35).
우리는 자유롭게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늘 감사하면서 듣고 말할 수 있는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그 귀한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영적 귀머거리요 벙어리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 귀머거리였습니다. 또 예수님이 잡히셨던 밤에 예수님을 적극 변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 베드로는 영적 벙어리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입을 열어 적극 전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육신의 귀와 입은 멀쩡하지만 영적 귀와 입이 막힌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영적인 말을 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영적인 말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자들은 영적으로 참으로 불쌍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쳐 주실 때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또 영적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셨지만 사람들은 그럴수록 소문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사람들은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도 말을 하게 하시니 그분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하다"며 경탄해 마지않았습니다(37).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아로 유대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셨으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귀먹은 벙어리 같은 유대인들을 생각하시며 탄식하시고 “에바다!”(열려라)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에 오셨지만 이방인과 만민의 메시아가 되십니다. 우리들도 이방인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귀를 열어 주셔서 주님의 귀한 음성을 밝히 듣게 하시고 닫힌 우리의 입을 열어 주셔서 복음을 널리 전하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캠퍼스 영혼들의 영적 부모로 사용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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