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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2018 마가복음 15강
성경본문 마가복음 8:1-26
전한날짜 2018-06-17
ㆍ조회: 359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2018년 마가복음 제 15 강
말씀 / 마가복음 8:1-26
요절 / 마가복음 8:21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신 것과 제자들에게 역사관을 가르쳐 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영적으로 어리고 부족한 제자들을 영적인 지도자로 키우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소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첫째, 영적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내면성이 무엇인지와, 둘째, 영적 지도자로서 경계해야 할 세상의 악영향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 (1-10)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6장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내용이 비슷하지만 다른 사건입니다. 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그 무렵이란 예수님께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 주신 때를 말합니다. 또 큰 무리가 있었다고 했는데 6장에서 나오는 오천 명의 무리와는 다른 무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까지 오셨습니다. 이를 볼 때 주로 이방 땅에서 나아 온 무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 땅 두로와 시돈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거라사 귀신들렸던 사람이 그동안 예수님을 열심히 전파하여 데가볼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만민의 메시아가 되십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사람들의 근본 문제는 참 목자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목자의 사랑에 갈급하여 만사를 제쳐 두고 참 목자 되신 예수님을 사흘이나 계속 따라 다녔습니다. 이들은 배고픈 무리들입니다. 이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예수님은 6장 오병이어 사건에서도 큰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큰 무리를 보시자 유대인 무리와 똑같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동정심으로, 도와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문제 많은 양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이유는 큰 무리가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처음에 가지고 왔던 음식이 동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냥 그들을 보낸다면 그들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진맥진하여 길에서 쓰러질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배고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육의 문제는 무시하고 영의 문제에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사정을 모른 체하거나 무관심하게 놓아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현실 문제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사랑과 능력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자, 귀신들려 울부짖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물질문제, 건강문제, 성격문제, 학점문제, 취업문제, 결혼문제도 다 아시고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문제에 동참하셔서 함께 슬퍼하시고 함께 고통하시며 도와주시는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Everlasting Father)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무리들을 먹이는데 동참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자들을 양 무리들의 목자로 키우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어린 제자들을 무시하고 혼자서 모든 일을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장차 성숙한 하나님의 종들이 될 것을 믿고 그들과 의논하며 역사를 섬겨 나가셨습니다. 함께 의논하면 관심이 없던 자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자발적으로 역사에 동참하게 됩니다.

  우리는 목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상한 목자의 심정을 배울 때 양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목자생활 초기에는 열심히 양들을 돕고자 기도도 열심히 하고 교안도 잘 준비합니다. 열심을 내서 전도도 하고 심방도 합니다. 그러나 양이 영적 소원도 없고 말도 안 듣고 약속도 번번이 어기고 반발할 때 목자의 심정은 점점 식어 갑니다.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없어지고 양들을 부담스럽게 여기게 됩니다. 양들이 목자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양들을 멀리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양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양들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인내와 애정을 가지고 믿음으로 양들을 도와야 합니다. 양들에게 자주 연락하고 또 밥도 같이 먹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말씀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중에 만나 커피도 마시고 가끔 같이 운동도 하고 영화도 보면서 양들과 끈끈한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양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양들의 어려운 현실 문제를 같이 의논해야 합니다. 양들의 마음에 소망과 비전을 심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영적 부모의 마음으로 양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간절히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의 마음은 이미 딱딱해 지고 무덤덤해져서 양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양들을 불쌍히 여기는 심정을 가질 수 있을까요? 성령님을 통하여 내가 예수님과 연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서 교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희생하신 것을 늘 감사히 기억하면서 귀하신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할 때 예수님의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희생적으로 양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갈릴리 호수의 남동쪽에 위치한 이 지역은 황폐한 광야입니다. 주위에 촌과 마을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떡을 얻는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자들은 광야라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부정적이 되고 운명적이 되고 무기력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아직도 불가능한 현실에 도전하는 믿음의 용기가 없었습니다. 어떤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이를 타개해 나가고자 하는 도전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광야 가운데서도 꽃이 피게 하고 반석에서도 샘물이 나게 하는 믿음의 비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광야라는 현실만 바라보고 예수님은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슨 방향을 주셨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예수님은 광야를 바라보지 말고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아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항상 긍정적입니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가운데서 어떤 가능성을 찾으십니다. 이것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창조하고자 할 때 항상 광야라는 현실에 부딪힙니다. 이 때 믿음이 없는 자는 절망하고 부정적이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는 어떤 가능성을 찾고 믿음으로 도전합니다. 이 때 광야라는 현실은 오히려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아무리 광야와 같이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찾아보면 떡 몇 개는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떡 몇 개를 예수님께 드리면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지고 있는 것을 찾았을 때 떡 일곱 개를 발견했습니다. 생선 두어 마리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보잘 것 없지만 이것들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칠병이어가 예수님의 손에 들어갔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기뻐 받으시고 축사하사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차고 넘쳤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무리들에 대한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과 제자들의 순종은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은 광야입니다. 세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점점 상대화되고 소돔 고모라 같이 음란해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영향력 상실로 인해 신도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캠퍼스 선교도 위축되었습니다. 학생들은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초청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캠퍼스에 나가는 것이 부담이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역사를 내가 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큰 부담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라틴어로 ‘미시오 데이’(Missio Dei)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민족들을 불러 모아 선교를 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선교에 단지 동참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우리가 주체가 되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친히 이루어 나가십니다. 세상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죄인들을 위해 내어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 우리는 모든 부담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기쁨으로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캠퍼스 제자를 세우고 싶은데 막막하고 두려움마저 듭니다. 또 예수님의 세계선교명령에 순종하여 해외로 나가고 싶은데 광야와 같은 현실을 바라보면 막막해 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내가 가지고 있는 떡 몇 개를 찾아 믿음으로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축사하셔서 양들을 먹여 주시고 제자들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또 놀라운 방법으로 광야 가운데 길을 여시고 우리의 앞길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광야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먹이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며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Ⅱ. 제자들에게 역사관 훈련을 시키신 예수님 (11-26)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달마누다 지방에 이르자 바리새인들이 나와 예수님을 힐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것을 표적을 통해 증명해 보라고 요구 하였습니다. 그들이 표적을 요구한 의도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리들 앞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악한 의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신 목적은 이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도록 함이었습니다(요20:31).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역을 통해 보여 주셨던 증거들을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마귀의 힘을 덧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으로 생각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어떠한 기적을 보여 주더라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들은 불신과 완악한 마음 때문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지상 메시아관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표적만을 구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이들을 인하여 마음속 깊이 탄식하셨습니다. 탄식이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노도처럼 치밀어 오르는 극한 슬픔과 실망과 분노'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기에 익숙해 있는 그들을 인하여 심히 슬퍼하시고 실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불신을 슬퍼하시고 외식을 슬퍼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의 교만을 슬퍼하시고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슬퍼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세대를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세대를 깊이 염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교만과 불신으로 가득한 그들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배를 타고 가시는 도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너무 배부르게 먹은 나머지 칠병이어로 사천명이 먹고 남은 떡 조각 일곱 광주리를 가지고 오는 것을 깜박 잊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떡 한 개밖에 없어서 당장에 저녁 식사가 염려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경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여기서 누룩(yeast, leaven)은 좋지 못한 영향력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악영향을 누룩에다 비유하셨을까요?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밀가루 반죽 전체를 발효시켜 부풀게 하는 무서운 침투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지극히 작은 악영향이라 할지라도 순수한 성도들의 모임에 침투해 들어오면 모임 전체를 순식간에 오염시켜 버립니다. 특히 악영향은 침투력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빨리 제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 시대 지도자들의 악영향으로부터 보호하여 순수한 하나님의 종들로 키우시고자 경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늘 예수님께 도전하고 대항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방해하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헤롯당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헤롯당은 정치 지도자들이었으며 사두개인들은 사제직을 독점하고 유대의 최고 정치기구인 산헤드린을 장악한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주의자들이요 외식주의자들이었으며 전통에 얽매인 자들로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형식과 전통과 고정관념을 신봉했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깨끗한 체 했지만 속으로는 불신자와 같이 온갖 탐욕이 가득하여 이중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섬김 받기는 좋아했지만 섬기는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나쁜 영향력은 하나님 앞에 살지 않고 사람 앞에 사는 인본주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교훈으로 삼아 가르쳤으며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지도 않았습니다. 헤롯의 누룩은 음란과 불의입니다. 그는 동생의 아내를 빼앗았으며 이를 책망하는 의인 세례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백성들을 무력으로 폭압하는 공포정치를 자행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불의한 헤롯을 비판하고 정죄하였지만 그들도 권위주의에 젖어 남을 섬기기보다 섬김 받기를 좋아하고 정부의 높은 고관자리에 올라가기를 원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합리주의와 세속주의였습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부활과 내세와 천사를 믿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편함과 육신의 안락을 위해 세상의 권세와 야합하였습니다. 당시 이들은 모두 종교 지도자들이요 정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수는 많지 않았지만 조그마한 누룩이 빵 전체에 퍼지며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신앙에 큰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외형주의, 세속주의, 물량주의, 기복주의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신자들은 회개, 순종, 헌신, 십자가 등의 말들은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축복, 은혜, 무병장수, 자손의 번창 등의 말들만 좋아합니다. 이들은 신자의 기본생활인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말에는 귀를 막고 자기 원하는 대로, 자기 편리한 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러한 인본주의 신앙은 누룩과 같이 우리 마음에 퍼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고 사명이 없는 신앙은 편해 보이지만 능력이 없는 죽은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본주의 신앙을 경계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양 무리들의 목자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감당할 지도자가 되기를 소원하셨습니다. 그들이 누룩 없는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만민 구속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소원 가운데 제자들을 부르셨고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세상의 악영향으로부터 보호하며 또 그들이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배우며 본받기를 소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세상의 악영향과 싸우며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본받기 위한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상한 목자의 심정을 배워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의 자세를 배워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지신 사명의 십자가도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떡 생각만 하고 있다가 예수님이 누룩에 대한 말씀을 하시자 즉시 떡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들은 떡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책망하시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항상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물으셨기 때문에 최소한 떡 다섯 개는 있어야 하는데 한 개밖에 없어 염려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떡 생각으로 꽉 막혀 버렸습니다. 떡 문제로 서로 수군거리며 의논했습니다. 이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은 심히 답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깨달음이 없는 제자들을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칠병이어로 4천명을 먹이신 사건들을 상기시키셨습니다. 19-21절을 보십시오. “내가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그러자 그들은 힘없이 "열둘이니 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 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Don’t you remember?)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렇게 심하게 책망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영적 지도자로서 큰 소망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바리새인들로부터 악영향을 받아 불신의 죄악에 빠져 현실 문제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얼마 전까지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고, 나병환자, 중풍병자,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시고 광풍을 잠잠케 하시고 거라사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인을 고치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고 수로보니게 여인의 더러운 귀신 들린 딸을 고치시고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시고 칠병이어로 사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기적들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한한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는데 더 이상의 기적들이 필요할까요?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의 역사들을 직접 보고서도 염려하고 근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역사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역사관이 없고 떡으로 상징되는 현실적 삶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역사관이란 과거를 기억하고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배우는 것입니다. 역사관이 없을 때 과거에 체험했던 놀라운 은혜의 경험을 기억하지 못하고 따라서 오늘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눈앞에 닥친 삶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걱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역사관을 가질 때 과거에 나를 도우시고 놀랍게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현재도 도우시고 미래도 반드시 도와주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 때 우리는 염려 대신 주님을 의뢰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역사관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먹고 마시고 입고, 자녀를 양육하고 양들을 치는 것과 우리의 앞날까지 모두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역사관을 가지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2-26절은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쳐 주시는 장면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벳새다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단번에 고쳐 주시지 않으시고 단계적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을 보는 정도로 희미하게 고쳐 주시고 그 후에 모든 것을 밝히 보도록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는 제자들을 염두에 두시고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심한 책망을 듣고 절망했습니다. 깊은 불의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해도 무식한 갈릴리 촌놈들이라 할 수 없다는 운명주의에 빠져 자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을 잘못 택하셔서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아 제자생활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게 소경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현재 영적 상태는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을 보는 것같이 희미한 상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 것 같기도 하고 또 실제로는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적 세계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아리송하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이 언젠가 영적 눈을 활짝 떠서 영적 세계를 밝히 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소망 가운데 영적으로 둔한 이들을 오래 참으시며 인내로 키우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좇는 삶을 살아오면서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수없이 보고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세계선교를 위한 우리 모임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셔서 흥왕한 제자양성을 이루어 주시고 광야 가운데 길을 열어 주셔서 160명 이상을 선교사로 보내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인본주의 신앙의 영향을 받아 눈앞에 닥친 현실문제로 염려하며 근심하며 지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시간 예수님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고 우리를 나무라십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은 우리가 비록 영적으로 어리고 부족하지만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고 소망과 비전 가운데 이 시대의 양 무리의 선한 목자요 영적 지도자로 키우고 계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분명한 믿음의 역사관을 가지고 이 시대의 남은 자들로서 음란문화와 싸우고 물질주의와 싸우고 형식주의와 싸워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 없는 인본주의 신앙과 싸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양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상한 목자의 심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전 인격을 배움으로 예수님을 닮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요, 믿음의 아버지요, 기도의 어미로 자라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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