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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2018 마가복음 17강
성경본문 마가복음 9:1-29
전한날짜 2018-07-01
ㆍ조회: 283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2018년 마가복음 17강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말씀/마가복음 9:1-29
요절/마가븍음 9: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엎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나름대로의 목표를 가지고 간절함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자기 꿈을 얼마든지 키울 수 있고 또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고자 할 때는 이야기가 좀 달라집니다. 고차원적인 신학적 사고를 해야 하고 이에 따른 자기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신학적 사고란 전문 영역에 속한 특졍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사람은 원래 신학적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은 만드셨을까?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일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곧 재림하실 것같이 말씀하셨는데 왜 20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오지 않으시는 걸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는 끊임없는 사고의 나래를 펴 나갑니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답을 얻고자 성경을 연구하고, 세상 만물의 이치를 살펴보고, 역사를 공부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하면서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습니다. 그런면 그것에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에도 신학은 있어야 합니다. 신학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가 어떻게 이 세상을 경륜하시는지, 다시 말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세상을 운영해가시는지 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은 이런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십니다’하고 신앙고백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고백한 그 그리스도의 길은 예수님이 가시고자 하는 그 길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그리스도 관에는 예수님이 죽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죄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하는 길이기 때문이요 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세워놓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이 말씀에 예외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래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소위 십자가의 신학을 발견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이 십자가를 빼놓고는 우리는 기독교의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모든 것은 십자가를 통해 이해되며 그 깊이를 날마다 더해 갑니다.  

문제는 우리의 본성이 이 십자가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부담스럽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의미있는 것이라고 해도 피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내가 이루고 싶은 것과는 상반되는 것이라 십자가라는 말은 듣기도 싫습니다. 그렇다고 십자가 없이 제자의 삶을 살려고 하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으니 이게 고민입니다. 어떻게 십자가 없이 신앙생활을 잘 할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그러면 지난 주 말씀과는 달리 오늘 말씀은 이것에 대해 답을 줄까요?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십자가를 부담스러워하는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의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무엇인지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한 것이라고도 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사흘만에 부활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로 인해 마음이 복잡해진 제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심으로시고자 한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엿새가 지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간 동안 많은 것을 생각하고 제자들과 대화하시며 그들을 살펴보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예수님을 통한 지상 메시아 왕국의 꿈을 그들이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이해 못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둘 수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이제 곧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을 어떻게 도와야할 것인지 많이 생각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우리 등산 가자” 하시고 그들만 데리고 높은 산위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중에서 리더 격인 이들을 먼저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들 세명이 먼저 십자가의 말씀을 영접해야 나머지도 영접할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 십자가 말씀으로 인해 심령이 천근만근인데 갑자기 높은 산을 오르자는 예수님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또 힘들게 산에 오르고자 하시다니 ...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마침내 높은 산 위에 도달했습니다. 올라와 보니 온 세상에 눈 아래 있었습니다. 마음이 답답했던 제자들은 ‘야호~’하고 소리를 지르며 스트레스를 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홀연히 변형시더니 옷에 광채가 났습니다. 세상이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때 예수님의 얼굴은 해같이 세차게 빛났습니다. 예수님은 빛 자체였습니다. 이 예수님은 계시록에 나온 것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바뀐 것입니다. 평소의 예수님은 마르고 옷도 허름해서 볼 폼이 없었습니다. 마치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고운 모양도 없고 아름다운 풍채도 없으셨습니다(사 53:2). 사람은 외모를 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삼상 16:7)?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무리 귀한 말씀을 가르치고 권능을 행해도 예수님의 외모를 보고 무시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예수님이 만만했는지 예수님이 자기 맘에 안드는 말씀을 하시자 따로 데리고 가 ‘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며 따지고 책망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갑자기 이렇게 원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제자들에게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대표적인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이요 하나님과 그 백성들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해 많은 고난을 당한 종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 이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무슨 대화를 했을까요? 같은 내용의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실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생각해보면 힘드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고난의 종이었지만 지금 영광중에 있는 모세와 엘리아와 더불어 대화하시면서 예수님도 곧 영광에 들어가실 것을 확신하셨을 것입니다. 고난 후에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광경은 단순히 예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접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광경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죽으시는 십자가의 죽으심은 무기력이 아니라 이런 영광을 들어가기 위한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 영광의 예수님을 보고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십자가를 지며 살 때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중에 있는 것같이 이렇게 영광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영광과 보상이 없는 제자의 길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제자들에게 반드시 영광의 댓가를 반드시 지불하십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하십니다. 십자가는 십자가 고난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영광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높은 산 꼭대기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이 광경에는 예수님의 간절한 메시지가 있는 겁니다. “베드로야, 야고보야, 요한아, 너희들 잠시만 나와 함께 고생 좀 하자. 그리고 이 고난의 끝에서 우리 함께 이 영광을 나누자”
그러면 이 영광의 모습을 본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제자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보면서 기쁨에 충만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바로 이런 은혜를 주시고자 우리를 데려오셨구나 하면서 갑자기 이렇다면 주님을 얼마든지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님과 위대한 주의 종 모세와 엘리야를 섬기며 영원히 살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압도되어서 세상에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냐며 저 산 아래 땅에 대해서는 다 잊어벼렸습니다. 저, 아래는 정말 문제 많은 곳이었습니다. 배고프고, 각종 병 걸린 사람도 많고, 귀신이 날뛰고 바리새인은 괴롭히고... 물가는 오르고 입시지옥이고.. 양들은 말을 안듣고...  월드컵 16강도 못올라가고... 제대로 되는 것이 없고 골치만 아픕니다. 그래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주님, 우리는 여기가 좋습니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확실히 모시겠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반응은 이해가 됩니다. 너무 너무 이해가 잘 됩니다. 누가 힘들게 신앙생활하고 싶겠습니까? 좋은 게 좋은 것 아닙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하나님 역사를 섬길 때도 고난보다는 언제나 은혜와 영광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이런 식으로 말하면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그것은 바로 ‘그러면 구원역사는 누가 섬기는가.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 대속의 사랑, 구원의 소식을 누가 전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TV의 어느 앵커가 이런 말을 한 적 있습니다. ‘그러면 소는 누가 키웁니까?’ 인생의 허무, 죄의 세력에 시달리며 고통하는 양들은 누가 돌봅니까? 이 말을 한 제자들의 문제는 한마디로 역사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역사의식이 없으면 당장에 자기 살 동안 자기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이기적이 되고 그 삶에 내 가족 외에는 이웃도 나라도 없습니다. 그리고 고난이 다가오면 ‘왜 이런 고난이 오는가’ 불평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의식이 결여된 신앙은 대체적으로 구복적입니다. 당장에 눈앞에 있는 편하고 좋은 것만 추구하지 나의 이 작은 희생과 헌신을 통해 장차 일어날 구원 역사, 은혜의 역사, 생명의 역사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이런 신앙은 힘도 없고 지성도 없으며 그 열매도 없습니다. 어려운 현실, 고난에 대한 비판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신앙이 앞에서 말한 신학이 없는 신앙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때 영광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몹시 무서워했습니다. 그랬을 것입니다. 세상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눈 앞에서 벌어졌으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런 가운데 그들은 무슨 말을 해야 몰랐습니다. 다만 영겁결에 마음 속의 있는 것이 나와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7절을 보십시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예수님이 그냥 사람인줄 아는가 본데, 그래서 예수님을 끌면서 따질 수도 있는 분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신앙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곧 이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이심을 아는데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으로 생각하면 이 예수님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생각과 뜻에 있어서, 능력에 있어서 perfect 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그가 하시는 모든 것에 경외심을 갖는 것이 예수님에 관한 우리의 기본 자세입니다. 둘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Listen to him. 기독신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주장을 하기보다 그가 하시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환상이나 기적을 보고 나름의 가치나 합리를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믿고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종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각별히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제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그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영접하지 않는 것에 대해 깊이 우려하시며 이렇게 구름가운데 임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빽빽한 구름 가운데 임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성막에 임하실 때 구름 속에서 강림하셨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 올라왔을 때 구름가운데 임하셔서 말씀하시면서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변화산 위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임하셨다니 이 사건의 의미는 참으로 무거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 없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제자의 길도 십자가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왕으로 오셨지만 우리를 귀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것만이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의미있는 일을 이루고자 할 때 거기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의미있고 중대한 일이 룰루랄라 하면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어느 일에서든 고난을 사랑하면 세위질 것이고, 안일과 쾌락을 사랑하면 무너질 것입니다. 한 국가가 세워질 때는 거기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어느 나라든 건국의 조상들은 피와 눈물로 나라를 세웁니다. 그러나 나라가 그렇게 세워져도 이제 살면하다 하며 쾌락을 즐길 때 그 나라는 무너집니다. stoic 한 사람들, 금욕적이고 절제하는 사람들은 세웠고 epicuran , 쾌락주의자들이 소비에 열중하고 즐기면서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자 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자 하면 세울 것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하고자 하면 분렬과 갈등이 있을 것이고, 십자가를 사랑하면 거기에 질서와 은혜,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충만히 임할 것입니다. 여기에 참된 영광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곧 주의 말씀의 듣는 것, 그것이 신앙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구속사의 주인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도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는 아픔을 담당하셨고, 예수님은 지옥에 떨어져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죽으시고 우리를 온전히 대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명을 다 감당하신 후 부활하셔서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영광의 주님은 때가 되면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접하시고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 가운데 주와 함께 있는 것처럼 우리와 함께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땅에 우리의 고난, 우리의 사명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광은 영원합니다.

고난 후에 있을 영광에 대해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한 목자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에서 행군할 때 군화가 잘 맞는 것도 아닌데 그걸 신고 해야 했는데 수십 km 행군을 해야했다고 했습니다. 또 여기에 무거운 총과 함께 각가지 군장을 매고 철모 쓰고, 날이 덥든지, 춥든지 할 거 아닙니까? 그러나 그 먼길 행군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올 때 부대 입구에 군악대가 기다려 힘찬 승리의 연주를 했을 때 그동안의 힘들었던 생각이 다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영광의 행군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제자의 길에 고난이 있지만 마침내 그 긴 행군을 끝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 입구에서 천군 천사를 동원해 화려하고 웅장한 나팔 소리를 우리를 영접하실 것입니다. 그 우렁찬 나팔 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라니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때 아브라함과 모세, 엘리야가 달려나와서 꽃다발을 안겨주고 예수님이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를 위해 예비된 이 축복에 참여하라’하실 때 얼마나 감개무량하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사모하며 달려가는 제자의 길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저는 과거 목자 초년기 때에 요한계시록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자주 요한계시록을 한밤에 다 읽었습니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결국에 악은 심판받으며 성도는 승리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은 마음의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21장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였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새 하늘과 새땅, 그리고 온갖 보석으로 이루어진 찬란한 새 예루살렘 성과 어린 양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의 강을 생각하면 힘이 생겼습니다. 이 소망 앞에 이 세상에서의 소망이 사라지고 힘든 사명도 감당할 수 있었고 어려운 양들을 돕는데 필요한 인내와 믿음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런 놀라운 영광과 축복을 예비하셨다니 너무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힘드십니까? 그러면 그때마다 작심하고 계시록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것은 무슨 말인지 몰라도 그래도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분명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자주 읽어보세요. 배를 깔고 엎드려 읽어도 금새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우리의 제자 생활을 이끌어주십니다. No Cross, No Crown 이라는 말이 있듯이 십자가를 회피하는 것은 결국 자기 손해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사모하는 자는 이 땅에서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의 썩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사모하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날마다 인도하시고 능히 소망 가운데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게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제자들이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과 자기들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한 귀신들린 아이를 구원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얼마전만해도 그들은 귀신을 쫓아내기도 했는데 지금 왜 그러지 못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사람들이 믿음이 없으면 무능해지고 그 무능을 다른 데서 원인을 찾느라고 서로 변론하고 다투는 겁니다. 귀신들린 아이는 지금 엎어지고 뒹굴고 있는데 이 사실을 외면하면서 이렇게 변론만 일 삼는다니 그 세대는 과연 믿음 없는 세대입니다. 얼마 전에 제자들은 전도를 나가서 담대하게 사람들도 회개시키고 병자도 고치고 귀신도 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귀신을 내쫓지 못했을까요? 마음 속에 인간적 복잡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지금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 말씀으로 분위기가 말이 아닌데 ‘예수님은 왜 또 세명만 데리고 등산을 가셨는가’, 이런 생각이 마음에 가득하니 지금 안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주로 경험을 의지하려고 하는데 그래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무능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면서 그들에게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아이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비결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으니라.’ 기도하는 자만이 인간적인 생각,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가 스피릿이 충만한 권능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능력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역사를 섬길 때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 열심히 기도할 때 주께서 믿음을 더해주시고 권능의 역사를 이루어주십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도 기도하는 종은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기도하므로 성령의 감동이 충만한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오늘 말씀을 볼 때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을, 그리고 날마다 기도하며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배워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평생에 십자가 신학을 우리 신앙의 기조를 삼아 늘 진리 가운데 거하며 기도하며 은혜와 능력의 역사를 섬겨나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시대일수록 주님과 동행하며 제자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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