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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2018 마가복음 18강
성경본문 마가복음 9:30-50
ㆍ조회: 267  
첫째가 되고자 하면
2018 마가복음 제 18 강                          
                              첫째가 되고자 하면
■ 말씀 : 마가복음 9:30-50
■ 요절 : 마가복음 9:35“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우리는 최근 갑질에 관한 뉴스를 많이 접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은 서두에 한다는 것이 민만하기는 하지만 얼마 전에는 한 한 항공사 회장 딸들이 땅콩 회항이다 물컵사건으로, 그리고 그 회장 부인이 여차여차 했다는 비판이 있었고 지금 어떤 것에 대해서는 수사가 진행 중입니다. 그런가 하면 며칠 전부터는 또 다른 경쟁 항공사의 회장이 그랬답니다. 그 회사 승무원들은 회장이 본사를 방문하면 로비에서 일렬로 대기하다 박수를 쳐야 한답니다. 그리고 회장님을 만나면 들고 있던 가방을 던지고 뛰어가서 인사하고 팔장도 끼어주고 포옹도 해주어야 한답니다. 그런가 하면 이 항공사는 비행기 승객들에게 주어야할 기내식을 공급하지 못해 소위 No meal 운항을 했답니다. 승객을 비행기 태워 저 하늘 꼭대기에서 쫄쫄 굶겼다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된데는 나름대로 피치못할 이유가 있겠지요. 그런데 그 이유도 알고보니 그 회사 회장의 사업 문제 때문에 결국 승객이 피해를 입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분들은 모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비행기를 날리는 분들이라 그런 것일까요? 그런데 민망하다하면서도 오늘 굳이 이런 말을 해보는 이유는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고 이것을 아신 예수님이 진정한 첫째는 무엇인가에 대해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첫째가 되고자 하는 권력에 대한 욕망은 사실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무릇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는 첫째가 있기 마련이고 우리는 거기서 첫째가 되고 싶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째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잘못된 첫째는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첫째는 많은 사람들은 위로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사람을 구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앞서서 섬겨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만큼 첫째에 대한 우리의 문제의식은 각별해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첫째가 무엇인가 함깨 배우고 우리가 하나님이 쓰실 만한 첫째로 살고자 내면의 방향을 잘 잡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변화산상에서 제자들에게 영광스러운 당신의 모습을 보이신 후 이제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가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제자들에게만 은밀히 가르치셨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31b). 이것은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요 복음 그 자체입니다. 이런 만큼 예수님은 이것을 중요하게 여겨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하는지 이해되지 않았고 죽었다가 살아나신다는데 이것도 도무지 말이 안되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인가? 지금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왕권을 잡으시면서 펼쳐질 이스라엘 해방과 메시아 왕국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봐도 그렇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위해서도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이제까지 모든 것을 참고 기다려왔는데 예수님이 자꾸 죽는다, 삼일 만에 부활한다고 계속 말씀하시니 이거 정말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시는 예수님도 답답하시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이렇게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해가며 반복해서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반복교육은 하나님의 교육방법입니다. 사람은 머릿 속에 자기 생각이 가득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봐도 다 자기 잘된다는 말씀만 밑줄 그으며 ‘잘되는 나’를 생각하지 헌신하고 희생하는 나, 썩는 나에 대해서는 생각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지상 꿈이 깨질 것 같은 말씀은 근처에게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반복해서 가르치고 또 가르치십니다. 신명기가 그거 아닙니까? 신명기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서 가르쳤던 것을 반복에 반복을 더해 계속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 말씀을 안듣는 존재인지라 하나님은 이렇게 반복에 반복, 또 반복을 하며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며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효과는 어떠했습니까?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 하더라." 사람이 관심 없으면 누가 옆에서 아무리 뭐라고 해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유달리 복잡하게 들리고 이해가 안됩니다. 우리는 어떤 때 묻기를 두려워합니까? 우려한 것이 현실로 나타날까 두려울 때 아예 처음부터 묻지 않습니다. 양이 ‘나 수양회 안갈래요’하고 말할까봐 수양회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묻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면 지금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머리 속에 꽉 차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잠했습니다. 왜 이럴까요? 뭔가 말 못할 부끄러운 내용이었는가 봅니다. 건설적인 것이면 왜 말을 못하겠습니까? 이는 노중에서 "누가 크냐? - who is the greatest?" 하는 문제로 쟁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좀 달리 말하면 ‘우리 중에 누가 제일 잘났느냐’는 것을 놓고 서로 싸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내각을 구성할 때 총리는 내가 해야 하다는 식으로 서로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제자들은 다른 아홉 제자들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희와 달라. 예수님이 변화산에 우리 셋만 데리고 올라간 것 보면 몰라? ” 그러자 열받은 다른 제자들은 “얼씨구, 그것은 너희들이 각별히 문제가 많으니까 따로 데리고 올라가서 고쳐줄라고 한 것이지 너희가 잘라서 그랬냐? 베드로, 너는 오죽하면 예수님이 사단아 하고 책망하셨겠냐. 너희들은 심각한 사람들이야 그걸 알아야지”  “빌립, 너는 빠져, 오병이어를 들고나간 사람은 바로 나야” “마태, 너는 전직이 세리였다는 것, 제발 잊지말어줘..” 그들은 이렇게 서로를 깍아 내리며 자기가 첫째가 되어야한다고 다툰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제자들의 다툼을 사람이 모여 있는 곳, 어디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누가 크냐’는 다툼이 있습니다. 감방 안에서도, 노숙자 사이에서도 누가 크냐는 문제는 항상 대두됩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면 이제는 더 이상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소위 대권이라는 것을 손에 쥐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각 나라 정상들이 모이는 G12 모임에 가면 누가 누구 옆에 서는가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의전’이라는 것 있지 않습니까? 이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권력 서열을 정확하게 파악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네가 날 뭐로 보고 거기 서게 한거야’ 그래서 좌석 배치가 너무 어렵습니다. 이름을 발표해도 순서껏 잘해야 불만이 없습니다. 왜 내 이름을 아무 아무개 다음에 부르는가? 그러면서 여기에 대해 각가지 해석을 합니다. 기자들이 이런 것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별 문제도 아닌 것을 문제로 부각시켜 골치 아프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서열에 민감하고 특별히 어디서든 첫째가 누구되는가에 더욱 민감해집니다. 왜냐하면 첫째가 되면 권력을 갖게 되고 자기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자기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모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이런 갑질하는 첫째 밑에 들어가 눈치보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누가 크냐의 문제를 놓고 다투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서로 비방하며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 나아가서는 상대방이 자기 출세의 길에 거추장스럽다고 생각되면 그를 제거해버립니다. 온갖 비방과 모함을 하고 가찌 뉴스를 만들어 퍼뜨립니다. 폭력을 동원하고 집단 패싸움도 하고 살인도 합니다. 그리고 전쟁도 일으킵니다. 이렇게 해서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미움, 저주, 원망, 불신, 부정, 부패, 죽음 등 온갖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뿐입니다.    이것을 안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35절 첫머리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리에 앉으셔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이것은 걸어가면서 가르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35b절을 보십시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첫째가 되지 말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해 그 비결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첫째,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합니다. 이는 영어로 ‘ he must be the very last 로서 순서상의 맨끝, the very last 맨 끝 자체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열상 가장 낮은 위치에 가서 서라는 것입니다. 아니, 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겨우 살아가는 이 세상에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좋은 것 다 챙겨가는데 맨 끝에 서서야 어디 자기에게 돌아올 국물이라도 남을까요? 그래서 ’아, 뭐해, 빨리 빨리 너도 챙겨야지~ 누가 너 기다려준데?  세상은 꼴찌를 생각해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남들을 자기보다 앞세우는 것, after you 하면서 맨끝으로 내려가는 것, 이것이 첫째되는 사람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자기 보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좋은 것을 나보다 먼저 가져간다, 그러면 그만큼 자기는 무시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남 보다 앞에 서려고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절대 맨 끝자리에 서면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정말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누가 꼴지로 하는가에 대해 은근히 관심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 누가 나에게 양보했는가, 누가 자기 권리와 특권을 포기하고 그것으로 남을 앞세웠는가를 보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이상하게 그런 사람에게 ‘위인’이다 ‘진정한 지도자’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존경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게 사람입니다. 분명히 서열상으로는 첫째인데 맨 끝에 설 때 사람들은 그를 따르고 존경하고 그를 첫째로 인정합니다. 미국 해병대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작전을 나갔는데 야외에서 배식할 때입니다. 통상적으로는 대장의 양식을 먼저 떼어놓기 마련인데 이 대장은 식량을 자기 부하들에게 먼저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는 맨 끝에 먹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양식이 대장 앞에서 끝나버렸습니다. 대장은 굶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부하들이 잠시후 돌아왔는데 그 손에 대장이 먹을 것은 조금씩 모아 가져온 것입니다. 그 부하들은 자기 대장을 진짜 대장으로 인정했고 존경하게 되었고 자기들에게 그런 대장이 있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해병대의 전통은 ‘리더는 나중에 먹는다’- Leaders eat last- 말이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아시아나 항공사 회장님은 승객을 굶었는데 회장은 기내에서 특식으로 따뜻한 밥을 먹고 왔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 겁니다. 리더는 나중에 먹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남을 앞세우는 사람을 세우십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땅을 나눌 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 하면 나는 좌하겠다”면서 조카에게 after you 하면서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조카 롯이 자기가 보기에 좋은 땅을 다 차지해 뒤도 안돌아 보고 떠났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에게는 거친 땅만 남았습니다. 아브라함은 after you 하다가 엄청 손해 보았습니다. 또 이때 얼마나 섭섭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이런 양보심, 겸손하고 넓은 마음을 깊이 인정하시고 그를 축복하시고 복의 근원으로서 구속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첫째가 된다는 것은 서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바로 뭇사람의 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모양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시되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인생들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이 거할 곳이 못되는 the very last 의 장소 ‘말구유’ 에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시하는 비천한 목수의 직업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면에서 당연히 첫째의 모습으로 사셔야했지만 이렇게 모든 사람의 끝이 되시고 만물의 찌끼 같은 모습으로 인생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 형틀로 죄인들에게는 가장 끝에 있는 저주의 형틀입니다. 이것은 만민을 구하기 위해 우리의 으뜸이신 주 예수님이 가신 길입니다. 사람은 게을러서 꼴찌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능력이 있으시지만 모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맨 끝에 서셨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뭇사람의 끝이 된 사람이 결국에 사람의 마음을 얻고 지도자가 됩니다. 사람들이 때가 되면 the very last의 넓은 마음과 희생을 알아보고 감동받고 귀하게 여겨줍니다. 뭇 사람의 끝이 되기로, 뭇사람을 섬기기로 선택하는 사람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첫째입니다.  
둘째,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뭇 사람을 섬기는 자입니다. 이는 앞의 ‘뭇 사람의 끝이 된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말씀이지만 그래도 좀 구분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뭇사람의 종’이라는 말은 servant of all입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영광 받고 섬김 받기를 좋아합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고자 할 때가 있습니다. 최고 권력자나 최고 권위자, 혹은 재벌 총수의 종이 되는 것은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존경하여 섬길 만한 사람은 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뭇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은 섬길만한 사람, 존경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까? 이해 안되고 감당 안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상식에 벗어난 일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골치 아픈 사람, 잘라버리고 싶은 사람, 미운 사람, 원수, 각종 죄인들, 아무리 섬겨도 변하지 않는 사람, 언제나 자기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사람들... 세상에는 정말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내 상식과 지식으로는 들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무릇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의 종이 되어야한다고 하십니다. 종이 되어야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을 가져다주며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고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연히 자기 희생이 따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가 안해준다고 생각하면 내가 첫째가 되어 상대와 싸우게 되지만 이것과는 반대로 지금 저 사람이 저러 저러한데.. 도대체 그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그것을 파악해 자기를 희생하며 섬겨나가면 문제가 해결되어가기 시작합니다. 거기에는 화해와 사랑 존경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첫째 가 되는 사람은 남의 사정을 늘 살펴야하고 그들을 위해 언제든지 자기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종이 되어 섬기고자 할 때 때로는 합리적인 내 사고방식으로 용납이 안되어 괴롭습니다. 그렇게 섬기다가 무시받고 자존심도 상하는 일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참아야 합니다.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참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도무지 섬길 수 없습니다. 한 기자가 마더 테레사에게 “어떻게 나병 환자들을 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까?”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나병환자들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돌보는 것 뿐입니다.” 자기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인간적인 한계에, 자기감정의 한계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면 이런 모든 한계를 극복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있어서 낮아짐과 섬김의 표준은 언제나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뭇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섬기는 사람의 내면은 행복해집니다. 그 내면은 주님이 주신 은혜로 가득해집니다. 자기를 희생해야하기 때문에 몸은 피곤하고 힘들지만 그러나 이렇게 섬기는 사람은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를 얻고 더욱 섬겨나갈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첫째 삼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세우시면서 당신의 구속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어느덧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위인’이다 ‘첫째다’하는 이ᄅᅠᆷ을 붙여줍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십니다. 36,3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은 팔을 벌려 welcome 하며 품에 안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 아이는 순수하고 진실됩니다. 그러나 부족한 면이 더 많아 어른들에게 늘 성가시게 굽니다. 자립을 못해 뭔가 끊임없이 챙개주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는 연약해서 아프기도 잘하고 또 아직 교육이 되지 않아 범사에 자기중심적이어서 끝없이 요구합니다. 말도 잘 안듣고 떼쓰고 문제도 많이 일으키고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별로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유대에서도 이런 아이들은 별 도움이 못되고 미성숙하다하여 사람 수를 셀 때 숫자에도 넣지 않았습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돈 벌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어린 아이를 공장에 데려다가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열악한 환경에서 마구 일을 시켰습니다. 아이들은 연약하고 두려움이 가득하고 무지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들을 억압하며 심한 노동 착취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병들면 무자비하게 내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를 데려다가 먼저 팔 벌려 그 품에 안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welcome! 예수님은 아이를 한 인격으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계산없이 어린이를 영접하고 사랑해주는 것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길이요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김진홍 목사님이 빈민촌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그 안에서 목회를 할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안에는 정말 이해안되는 사람들, 골치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못하겠다하면서 그만 두겠다 그만두겠다 하며 결심에 결심을 하고 어느날 그곳을 떠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면서 마지막 돌아본 판자집에 한 가난하고 병든 아이의 얼굴이 갑자기 그 앞에서 예수님의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이때 김진홍 목사님은 아무리 힘들어도 그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고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빈민촌 사역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로 병든 우리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참 부족하고 연약하고 말썽많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정말 어린 아이같이 미성숙하고 막무가내로 고집피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우리를 영접해주시고 섬겨주셨습니다. 우리의 끝이 되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희생으로 드리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섬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만큼 진정으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끝이 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된 지도자입니다. 세상의 리더들, 첫째들은 갑질에 익숙해있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받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저는 최근까지 항공사의 조종사나 승무원들이 귀한 대우를 받는 고급 직종인줄 알았습니다. 영어도 잘하지 친절하고 헌신적이지... 사람들이 참 귀해 보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비행기 스튜어디스는 여성 최고의 직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알고보니 이들이 얼마나 갑질을 당하며 함부로 취급받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겉보기와는 달리 그 이면에 다들 이렇게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첫째인 사람은 자기가 정말 어떤 첫째인가에 대해 많은 부분을 살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감동적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종의 마음을 가지고 맨 끝에 서서 섬겨주는 첫째가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고통받는 사람들, 권력에 의해 갑질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구해줄 수 있습니다. 이런 첫째가 있는 조직원들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의 그런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세상의 권세자들과 같이 된다면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뭇사람의 끝이 되고 뭇사람의 종이 된다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구속사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첫째로 기억되는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들은 양들의 목자입니다. 하나님 역사의 종들입니다. 우리가 누가 크냐며 다투기보다는 모든 사람들의 끝이 되어 섬기고 기도하는 종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 뭇 사람들을 웰컴 하면서 그들의 약점과 허물을 감당해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종들이 되고 이로서 복된 공동체들 이루어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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