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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2018 마가복음 19강
성경본문 마가복음 10:1-31
ㆍ조회: 270  
부자와 하나님 나라
2018년 마가복음 19 강                                              
영생의 길
말씀: 마가복음 10:1-31      
요절: 마가복음 10: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우리 신앙생활의 긍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부자가 되고 잘 사는 것입니까? 제자를 많이 세우는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런 것을 바랄 수는 있지만 긍극적인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말씀이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노른자 없는 달걀을 생각할 수 없듯이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뺀 기독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영생, 이것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소망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영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는 한 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가 나옵니다. 그런데 청년은 예수님이 알려준 영생의 길을 영접하지 못하고 그만 떠나 버렸습니다. 이 청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를 함께 생각해보는 가운데 참된 영생의 길에 대해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I. 결혼의 진리를 가르치신 예수님 (1-12)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유대로 가서 나룻배를 타고 요단강을 건너가셨습니다. 이제 예수님j이 인류의 죄값을 치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고 생각해보면 이 강은 ‘돌아오지 않는 강’(a river of no return)이 됩니다. 이때 예수님은 심적 부담감을 가지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몰려온 큰 무리를 전과 같이 똑같이 영접하시고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도 이렇게 변함없이 양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하였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여기에 어떤 시험이 있습니까? 만일 이때 예수님이 ‘이혼할 수 없다’ 고 하면 이는 ‘그러면 결혼하면 끝까지  억지로 살아야하느냐’ 고 주장하는 진보파들에게 공격을 받게 됩니다. 혹은 ‘이혼할 수 있다’과 대답하면 이는 남자들의 이혼의 횡포를 방임하는 일이 된다며 이번에는 보수파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시든 이것을 꼬투리로 예수님을 공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에 대해 뭐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모세의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어있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대답했습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3) 이때 예수님은 모세가 왜 그랬는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  

모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혼 문제를 마치 자기중심적으로 감정과 정욕에 따라 처리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아내를 함부로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를 막고자 법에 따라 이혼증서를 써주고 여자도 다시 결혼할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도 ‘아, 이혼 증서만 써주면 이혼할 수 있어’하며 이혼을 함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사회에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혼은 마음이 완악한데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시면서 창세기의 결혼의 진리를 기초를 올바른 결혼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결혼관이 올바르면 이혼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우리는 이 말씀에서 첫째로 결혼의 창설자와 주권자는 하나님이시오  결혼을 축복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혼을 늘 하나님 안에서 생각해야함을 말해줍니다. 둘째로 ‘결혼하면 그 두 사람은 이제 한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몸’이란 영어로는 ‘one flesh’로서 이제 둘은 ‘아교’같은 강력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만큼 부부가 이혼하여 갈라지면  두 사람 모두에게는 아주 큰 상처가 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9절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부부는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서로 운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노래에도 있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냐 나의 운명이었기에...’ 나누어질 수 없는 짝 - 그래서 부부는 서로 뗄레야 뗄 수도 없고 서로 없어도 살 수 없는 거에요. 부부 싸움하는 사람들은 종종 ‘저 웬수 ~  아이구 내 팔자야’하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게 다 상대방이 자기 짝이니까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짝이 아니면 누구에게 이런 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눈치 안보고 막 할 수 있는 사이, 이게 짝입니다. 그렇다고 이걸 듣고 ‘그래요. 당신 남편 아주 나쁜 사람이군요’하고 함께 같이 마구 욕하면 큰일납니다. 정말 그랬다가는 그 짝이 가만 있을 것 같아요? 왜 당신이 뭔데 내 남편을 욕하느냐고 하면서 큰 싸움납니다. 짝은 이리 가나 저리 가나 짝입니다. 슬플 때 같이 슬퍼하고 서로 싸울 때 진탕 싸우기도 하고 즐거울 때는 같이 즐거워하고 같이 외식도 하고 같이 애도 낳고 같이 키우고...외국 나가면 자기 짝에서 먼저 연락합니다.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이 맺어준 짝- 그렇다면 그 사람을, 그녀를 잘 들여다 보세요. 그 안에 보물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배우자를 대할 때 연구하게 되고 그 결과 자연히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히 ‘그대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에요’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녀가, 혹은 그가 과연 하나님이 주신 내 짝임을 알고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고 섬겨주면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기 짝을 무시하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짝을 무시하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부부간의 행복은 서로 상대를 위해 노력하는데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은 영어로 joined together입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Reader's digest라는 잡지를 자주 읽었습니다. 언제가 이 잡지에서 together란 ‘to get her’을 붙여놓은 거라고 써 있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남자가 노력을 많이 해야하는 것 같습니다.^^ 남편 분들은 자기 짝인 그녀를 얻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그녀가 행복해지고 나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짝이 있는 사람은 완악한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엄격합니다.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 요즘 뉴스에 ‘me, too’ 가사가 많습니다. 지금 전 도지사 한분이 이 문제로 재판을 받고 있는데 자기 짝을 버리고 몰래 음행을 했다가 너무 민망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법정에 서서 뭐라고 뭐라고 하며 슬픈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음행 때문에 그 많은 능력이 이제 다 쓸 데없게 되었고, 그동안의 행적도, 명예도 다 날라가고 욕만 남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혼인의 순결을 잘 지키며 자기 짝을 귀하게 여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II. 어린아이들을 영접하신 예수님 (13-16)  
13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이때 아이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이것을 보시고 노하셨습니다. indignation 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수요 어린이 찬양예배에 아이들이 얼마나 순수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지 아세요? 예배를 사모하여 모이고,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그대로 아멘하고 찬양하고, 고사리 같은 손을 모아 정말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받듭니다. 어린 아이들의 찬양을 들으면 마치 천국 찬양을 듣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성령의 감동을 받게 됩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머리에 복잡한 계산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순수하게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아이를 가르치려고만 하기보다 아이들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 대한 순수한 소원과 믿음을 배워 하나님 나라의 합당한 자 되길 기도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품에 안으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III. 영생의 길을 가르쳐주신 예수님 (17-31)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길에 나가실 때 한 청년이 무엇이 급했는지 달려와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막고 길바닥에 꿇어 앉아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2절을 보면 그는 부자였습니다. 돈도 많겠다 거기에다가 젊겠다 아직 인생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데 그는 왜 이렇게 달려 나와 ;벌써부터 영생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일까요?  지금 그 나이에 ‘ 영생 ’ 이 그렇게도 절박한 것이란 말입니까? 천로역정을 보면 젒은 크리스챤이 ‘영생’, ‘영생’, ‘영생’을 외치면서 장망성- 장차 망할 성을 뒤로하고 천국을 향해 도망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젊은이는 지금 젊어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지 사실 이것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본문 속의 청년도 그런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예수님께 나와 엎드릴 정도면 그동안 영생을 위해 진지하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까요? 19,20절을 보면 그는 어릴 때부터 모든 계명을 다 지켜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율법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그 말씀을 따라 그는 열심히 계명을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그는 마음이 늘 불안하고 답답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 문제를 들고 이렇게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먼저 잘못된 선에 대한 개념부터 바로 잡아주고자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선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 청년이 아직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모르고 다만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기초해 나름대로 판단하며 예수님을 선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요지는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영생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계명을 열심히 지킨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아담의 범죄 이후 누구나 다 죄 가운데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습디다.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왜 그가 영생을 확신하기 못하는지에 대해 단계적으로 돕고자 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계명은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에 쓰여있는 계명입니다. 이것은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이웃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에 관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이것을 다 지키는 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자인 청년에게는 그래도 지키기 쉬운 것입니다. 돈 많고 잘 사는데 거짓말하고 도적질을 하는 등 이웃에게 못할 짓 하면서 살 이유가 있을까요? 청년으로서 정욕의 유혹이 있기는 하지만 부자 청년이 간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마지막에 부모님 공경하는 것도 부자가 조금만 신경쓰면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에 대한 청년의 대답이 어떻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다~ 지켰다. 거짓말 한번 안하고 부모님도 잘 공경하고... 어릴 때부터 그랬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본인이 그랬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영생을 얻어야하는데 거짓말하며 이럴 수 있겠습니까?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자녀들을 잘 키우기 위하여 여섯 살이 되면 율법을 암송하도록 하고 계명을 다 지키게 했습니다. 이 사람도 이들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하는 그 청년을 보셨습니다. 청년이 영생을 얻고자 성실하게 살아온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 것을 아시고 그를 도와주고자 사랑의 마음으로 말씀하셨습니다. 21절을 보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계명의 근본정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에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이 있어야합니다. 사랑은 단순하게 ‘... 하지 말라’, ‘.. 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세의 십계명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도덕이 기록된 것이지 ‘.. 말라’를 문자 그대로 지켰다고 계명을 다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계명의 본래 정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의 가르치는 바를 요약해 말씀하실 때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의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 사랑도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며 자기 몸을 사랑하듯 적극적으로 마음을 드려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이렇게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기서 이 청년의 문제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지 말라.. 하지 말라.. 하며 자기 돈 안들이고 몸으로 떼우며 할 수 있는 이런 것 말고 너의 재물을 다 팔아- 다시 말해 너를 희생해가면서 -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주는 것.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이 너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이웃사랑의 문제를 지적한 것입니다. 처음에 첫 번째 돌판에 하나님 사랑에 관한 계명을 말씀하지 않고 두번째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사랑이 바로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 어디를 봐도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구약에도, 신약에도 없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재물을 얻고 그것의 십일조를 내며 하나님 역사를 섬기고 가족을 양육하고 또 이웃을 위해 구제 헌금을 하라는 말은 있어도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다 주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없습니다. 이것은 루터, 칼빈 등 유명한 종교지도자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입니다. ‘아니 프란체스코는 자기 재산을 다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것은 프란체스코는 그렇게 했다는 것이지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하며 물질를 가지고 이런 식으로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다 팔아주면 처자식은 누가 먹여 살려줍니까? 그러면 우리는 무책임한 아빠,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열심히 일하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물질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잘 쓰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이 부자청년의 경우는 그가 물질을 꽉 붙들려, 하나님과 이웃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죄인이 되게 하고 영생의 길을 막고 있으니 그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21b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 Then come, follow me.- 결국 이제까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한마디 요약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인생의 목표삼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 영생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17:3절은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인간적인 노력을 하고 계명을 지키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데서, 예수님을 아는데서 주어집니다. 재물에는 영생이 있지 않습니다. 무거운 재물을 끈에 묶어 질질 끌고 다니면서 영생을 얻을 수도 없고 그래서는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 하시며 그를 예수님의 세계로 초청한 것입니다. 이 예수님 안에 죄사함과 함께 은혜와 영생이 있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부자 청년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고 가니라’ 그는 이 땅의 재물이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했습니다. 영생을 갈구하는 것은 좋은데 그는 아직 물질에서 놓여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질를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슬퍼하면서, 자기가 이 물질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하리라는 사실로 인해 근심하면서 돌아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데 끝까지 자기 금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금괴를 붙들고 침몰하는 배와 함께 죽어버렸습니다. 지금 남들과 함께 수영해서 나오면 살 수 있는데 어째서 그는 그렇게 끝까지 그 무거운 금덩이를 불들고 있었을까요? 한마디로 그 마음이 물질에 꽉 매여있어 결정적인 순간에 여기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구원을 놓친 것입니다. 그는 그 물질 때문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을 잘 쓰면 얼마나 유익하고 좋은 것입니까?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자꾸 풀어 나누어주면 이웃도 행복해지고 그러는 자기도 행복해집니다. 그러면서 하늘에 보화를 쌓아가는 것입니다. 앤드류 메레이가 쓴 ‘돈’이란 얇은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금이나 은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위로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 얼마나 신적인 특권이고 행운인가. 우리가 내어주는 돈을 우리 자신들을 위해 쓰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의 원천으로 만드는 기독교는 얼마나 축복스런 종교인가!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은 일시적이고 육욕적인 것이나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영원한 가치를 가지며 이중으로, 즉 자신과 타인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다.’

마태복음 13:44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본문의 천국보화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천국보화 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투자해 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그리스도를 얻고자 이전에 자신이 귀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만나보니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예수님께 견줄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요 자신의 진정한 인생 투자는 예수님을 배워나가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할까요? 이 세상에 주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을까요?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94장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예수 보다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음 다 버렸네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

 23절을 보십시오. 부자 청년이 떠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 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 부로 선한 일을 행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귀한 일이며 또한 복된 일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물질에 마음이 묶여 함께 가라앉는다면 이것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젊은 날 예수님을 배우면서 영적 가치관을 쌓아가면서 잘못된 물질관을 바로 잡아가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 예수님을 더욱 열심히 배워야하겠습니다. 이로서 하늘의 보화를 쌓아가며 영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심히 놀라 말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제자들도 부자가 되고 싶은 소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다 부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자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언제까지나 가난하게 살아야 되지 않는가? 그들은 갑자기  운명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 사람이 부자이든 아니든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하고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좇을 만큼 용기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귀한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하여 버리는 데에는 반드시 이런 백배의 보상이 따름니다. 거기다 핍박을 받게 될 때 내세에 반드시 영생이 따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사람에게 무시받고 애매한 고난과 미움을 받을 때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우리가 영생을 얻은자 되었다는 것의 증거가 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는 베드로에게 경고하신 말씀으로 자기 의만 내세우고 투쟁하지 않으면 나중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경제, 경제하며 살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왜 저러는가 살펴보면 다 경제문제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경제가 잘 풀려가고 잘 사는 나라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면서도 우리가  세상 어떤 것보다도 더 귀한 천국 보화 예수님을 따르는 분명한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로서 영생의 기쁨을 충만히 누려야하겠습니다. 우리의 보화는 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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