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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2018 마가복음 20강
성경본문 마가복음 10:32-52
ㆍ조회: 344  
섬기러 오신 예수님
2018년 마가복음 20강  (박준은)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말씀/마가복음 10:32-52
요절/마가복음 10:45

저는 신문에서 일부 음식점에서 ‘남의 집 귀한자식’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는 경우가 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는 갑질 손님에 대처하기 위한 ‘알바 전용 티셔츠’인데 손님에게 갑질을 당하는 아르바이트생들에 대한 사장님의 배려라고 합니다. 그 신문기사는 갑을관계는 사회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이처럼 갑이 을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사회 모습은 변화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런데 인류역사를 보면 변화할 것 같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 좋아지는 것 같아도 갑과 을의 관계는 역사상 항상 어떤 형태로든지 존재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갑을 관계와 완전 반대되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원과 심판의 권세자이신 하나님깨서 죄 짓지 않고 살 능력이 없는 한없이 무력한 인간을 섬기러 오셨습니다(복음).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세상의 갑을 논리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적용해보면 복음은 갑이 도리어 을을 섬긴 것이 됩니다. 갑이 을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세상논리와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이 세상의 갑은 조금만 있어도 권세를 어찌하든지 부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갑이신 영원한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 나 같은 죄인까지 섬기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섬기러 오신 예수님’입니다. 이 시간 이 예수님을 배우고자 할 때 주님께서 저희 마음에 감동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절 :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요단강 건너 편 베뢰아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시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하실 것입니다. 죽음을 향한 길을 예수님은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이 비장한 결의를 가지고 적극적인 자세로 전진하듯 걸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앞서가시는 예수님의 이 결연한 모습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심과 부활에 관해 말씀하실 때 한 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지만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이들의 생각을 아신 예수님은 12제자를 따로 불러 놓으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33절, 34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여기서 ‘인자’라는 단어는 예수님 자신이 다니엘서 7장 13절에서 말한 그 메시야이심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벌써 3번째입니다. 제일 먼저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8:31)고 고백하였을 때 곧 이어서 인자의 고난과 죽으심을 말하였고, 갈릴리를 가로질러 가실 때에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꾸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는 것은 아직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제자들이 받아들이기 싫어서 못 깨닫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십자가와 부활을 영접한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지만 본성상 영접하기가 쉽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이 시점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장차 시험에 빠져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이방인에게 넘겨주실 것도 말씀하십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더라도 유대인들에게는 사형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 총독에게 넘겨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능욕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라는 것까지 자신이 당할 일을 구체적이고 자세히 미리 말씀하시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당할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이 정하신 뜻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지금은 모르지만 예수님의 부활 후에라도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반복해서 말씀하시면 제자들은 그의 죽으심에 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나오더니 “선생님,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지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 세계에서는 가장 영광스런 자리는 주인의 오른편이고 그 다음이 왼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왕으로 등극하실 때 가장 영광스런 자리를 부탁한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자매지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이들은 이종사촌간입니다. 마태복음(20:20절)에는 그들의 어머니가 나와서 직접 청탁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올해 5월에 SRT (수서철도공사) 직원채용비리 사건이 터졌습니다. 채용비리 특혜로 채용된 사람과 연류자등 수 십 명의 (35명등) 사람이 퇴출되기도 했습니다. 부정 채용 청탁자 대부분이 코레일 또는 SR의 가족이나 지인들이었다고 합니다. SRT는 김일권 목자님이 다니시는 회산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일권 목자님은 비리 채용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에 SRT에 잘 다니십니다. 부정한 청탁이라도 해서 남보다 앞서 먼저 영광과 권세를 쥐하고자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면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다른 제자들보다 한 발 앞서 청탁해야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드로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아래서 제자생활 할 때에 늘 베드로가 자기들보다 한 발 앞서는 것 같았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예수님은 먹는 문제에 걸려 떠나는 무리들을 보고 예수님이 ‘너희도 가려느냐?’물으니까, 베드로가 먼저 부저를 “삐” 누르면서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하고 멋진 대답을 했습니다. 또 한번은 예수님이 자신에 대해 사람들의 견해를 물으신 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자 그 때도 베드로가 먼저 “삐”하면서,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하여 예수님께로 부터 ‘네가 복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멍하니 있다가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베드로에게 최고의 자리를 빼앗기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나서서 예수님께 좌우편을 약속 받고자 하였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예수님은 야심차지만, 한편으로는 우둔한 두 제자들을 보면서 답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는 더 큰 고난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고난 없이는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먼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실 잔이라는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마셔야 하는 고난의 잔을 뜻합니다.(막14:36). 예수님은 끔찍한 육체적인 고난뿐만 아니라 죄의 형벌로서 잠시 하나님께 버림받기까지 합니다.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성찬식에서 예수님의 잔을 마시고 그분과 함께 세례를 받는 것은 그 분의 죽음과 고난을 참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구하는 그 영광의 자리는 예수님이 받으시는 고난과 죽으심을 같이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잔과 세례를 두 제자가 깊이 이해했더라면 함부로 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질문이 암시하는 바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할 수 있나이다”하면서 자신있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도 기꺼이 받고자 하는 충성스런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감수하면서까지도 영광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야심과 세상의 헛된 허영심으로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말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모르는 영적인 소경과 같았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것이다”고 하시면서, 영광을 얻기 위해 고난을 감수하고자 하는 그들의 뜻은 꺽지않고 받아주십니다. 실제로 야고보는 열두 제자들 중에서 첫 번째 순교자가 됩니다(행 12:2),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서 인생의 말년까지 박해를 받으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이어 예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라고 하시며,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누가 좌우편에 앉고, 누가 더 큰 고난을 받게 될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 아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를 거절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합당한 요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권력에 대한 욕망은 제자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톨 킨이라는 작가는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를 통해 이 세상은 권력을 향한 유혹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세상 권력의 유혹을 다스리지 못하면 파멸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했습니다. 주인공, 프르도은 키도 아담하고 먹고 놀기 좋아하는 낙천적인 호빗족속의 평범한 소년입니다. 그는 아무 욕심이 없는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이 소년이 절대반지를 없앨 주인공으로 선택됩니다. 그러나, 이 순하기만 할 것 같은 주인공도 마침내 반지를 손에 넣었을 때는 막상 그것을 용암에 던져야할 때 던지지 못하고 머뭇거립니다. 자신의 사명을 잃고 순간 유혹을 뿌리지지 못합니다. 사람 마음에 절대 권력에 대한 유혹이 얼마나 큰지를 말해줍니다. 저는 그곳에 나오는 한 장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름답고 착하게 생긴 한 요정도 이 반지보자 갑자기 욕심이 생겨 눈에 불이 나고 주위가 깜깜해 지면서 악마처럼 될뻔한 장면이 나옵니다. 권력을 소유를 향한 욕심은 세상 모든 사람의 본능입니다.    

그러면 다른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열 명의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보좌 좌우편을 요구했다는 소식을 듣고 눈이 휘둥그래해지고 화를 내었습니다. 그들 또한 지상 메시야의 왕국에서 그러한 영광을 얻고 싶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인 자신을 제치고 먼저 예수님께 부탁한 이들을 보고 세상에 믿을 친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이 치사하게 자기들만 좋은 자리 차지하려는 이기심에 분노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의 청탁 사건으로 인해 제자들 상호간에도 서로 시기하고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만약 제자공동체가 서로 사랑하지 않고 섬기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 나라나 왕궁에서 일어나는 일과 똑같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세우신 하나님나라는 세상나라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섬김과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12제자들을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41절-44절을지 읽겠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 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어야 하리라.” 이방인의 권세자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임의로 사람들을 주관하고 섬김을 요구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와 헤롯의 지배 하에서 그들이 임의로 휘두르는 권력 때문에 숱한 고통을겪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행동에서 이런 이방인의 집권자와 같은 모습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겸손을 가장 낮은 가치로 취급했습니다. 왜냐하면 겸손은 힘없는 자들이 하는 비굴한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자신을 자랑하고 높이고자 했습니다. 조그만 권세를 가진 자라도 그것을 이용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였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병중에 하나가 소위 ‘갑질 문화’ 병입니다. 갑질은 권세자가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는 것을 말합니다.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을 주관하는 문화가 거의 모든 분야에 뿌리 박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땅콩회항 사건을 시작으로 우후죽순 격으로 많은 갑질이 수면위에 떠오르고 있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에 대한 갑질, 군대 사령관 부부의 공관병 갑질, 공공기관 채용비리 관련 갑질, 일부 재벌 오너 일가의 거래처와 부하 직원에 대한 폭언 등, 갑질의 다양한 형태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권세자들과 지도자들의 불의한 권세행위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분석들도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가 서열 문화와 권위주의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서로 존중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수직적인 상하 관계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은 갑질 같은 불의한 권세를 부리는 행위를 자기애적 인격 장애라고 봅니다.

게다가 이러한 갑질은 ‘낙수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갑질을 많이 할수록 사회 전체의  갑질이 증가하는데, 갑질로 억눌린 사람은 위로부터 받은 억압과 설움을 조그마한 권력과 자산만 있어도 자기 아랫사람에게 풀어버리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갑질이 만연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는 지난 5일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특혜 요구, 인격 모독 등 갑질을 생활 적폐로 규정하고 공공분야의 갑질부터 근절할 종합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권세만 있어도 사람을 주관하고 이용하고자 하는 인간의 죄악 된 마음이 있는 한, 이런 법을 아무리 만든다고 해도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세련된 형태의 갑질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세상 권세자들을 행위를 잘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영향을 받기 쉽지만, 예수님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 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제자들은 분명하게 세상 지도자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 공동체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를 세우시고 제자공동체를 남기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세상나라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세상나라는 힘과 권력으로 지배하는 원리로 유지된다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겸손과 섬김의 가치가 있습니다. 세상나라는 조그마한 권력이나 힘만 있어도 다른 사람들을 부리고 종 삼고자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지도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참된 지도자는 섬기는 마음으로 기꺼이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도울 줄 알아야 합니다. 종이 된 지도자는 함께 일하면서도 결코 지위나 권세를 얻으려고 하거나 애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은사에 대해서도 시기하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충성스럽게 감당합니다.

44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어야 하리라.” 섬기는 자는 servant, 하인이고, 종은 slave, 노예를 말합니다. 당시에 하인이나 종은 전쟁포로들이나 죄수 같은 사람들이 되기도 하였는데, 죽여야 하는데 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주인에 속한 자로서 주인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고 주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자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할 말이 없고 그저 몸을 굽혀 “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자입니다. 진짜 종은 종의 마음을 가진 자 입니다. 주인을 위해 섬기는 것 자체를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입니다. 주인을 위해 일해 놓고 자기가 뭐나 잘하고 있는 줄 알아도 안됩니다. ‘언젠가 나의 모든 수고를 주인이 알아주고 자기를 높여줄 거야’ 하여도 안됩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7:10절에서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를 무익한 종이라.”하라고 하심으로 섬기는 자는 종의 마음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큰 자, 으뜸이 된자는 세상에서 말하는 조직이나 권력 서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영적으로 큰 자를 말하는 것으로 내면성을 말합니다. 교회 내에 권위주의는 말씀의 권위보다 개인의 권위를 더 내세울 때 생겨납니다. 교회에서 주의 종이라는 명칭이 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에 중간 정도 되는 위치로 여겨지는 수가 있습니다. 주의 종이라는 단어가 교회 내에 다른 사람과 구분시키는 계급같이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의 종으로서 섬겨야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의 종이 되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이 말 대신 ‘모든 사람의 종’이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영적으로 큰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은 내가 섬겨줄만한 사람만을 위해 종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담스런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셨고, 지성인이지만 자존심있고 영적으로 꽉 막힌 니고데모와 밤늦도록 대화해주셨습니다. 당시 매국노로 손가락질 받는 이기적인 세리 레위를 아예 제자로 불러 함께 하셨습니다. 얼마나 친하게 지냈으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리와 창기의 친구로다’라고 말했을까요?  누구라도 조금이라도  권위적으로 굴었더라면 절대로 세리와 창기의 친구는 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의 친구가 된 것은 전혀 이런 분들과 격의 없을 정도로 겸손히 낮아지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으로 존경이 안가고 영접도 안 되는 사람의 종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섬겨도 돌아오는 것이 원망과 불평뿐이더라도 계속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크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들던 안 들던 어떤 사람도 마치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10장 4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인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영원한 권세를 가지고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는 분을 말합니다. 이 인자는 메시야로서 구원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이 인자가 이 땅에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에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근본이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영광, 존귀,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피조물인 인간은 당연히 그분을 경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섬김 받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아니 섬김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예 없으셨습니다. 영원 무한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죄인의 모습이 되고 종의 모습을 하신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자기 비하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다미안신부가 나병환자를 섬기기 위해 자기도 같은 나병환자가 된 것과도 같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죄로 냄새나고 부담스런 죄인들을 섬기고자 자신을 낮추어 오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그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이 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대속물이 된다는 것은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을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대신 돈을 지불하거나 희생의 재물이 되어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께서 죄인들 대신 십자가에서 대속물이 되어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서 그 영광과 존귀와 권세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일 신적 본질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한 구속 계획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에 대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표현했습니다.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왼쪽 오른쪽 자리를 차지하고자 야심에 찬 것과는 전혀 상반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사흘이 멀다 하고 잘 체하고 위장병으로 고생을 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나갔기 때문에 기독교신앙 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받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교회 여름수양회를 참석하였는데 요한복음 1장 12절의 말씀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나니”하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봄 요한복음 축제 때에 요한복음 9장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병 문제로 운명주의에 빠진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해 여름수양회에서 불신과 운명주의를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고 죽으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 대속의 은혜에 기초해서 대학생들 복음증거자인 목자로 살기로 하였고, 평생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을 결단하였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를 병문제로 겸손하게 하시고 때마다 말씀을 들려주시고 예수님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배우도록 인도하여 오셨음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다니는 의대는 기본적으로 늘 경쟁적입니다. 그래서 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많은 경쟁을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실패를 경험하고 뒤처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을 가만히 생각하면 화가 나고 나의 강한 자존심이 더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 제 마음은 너무 비참해졌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내 죄를 담당하기 위해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를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은혜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행했던 것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웠습니다. 주님은 이런 저를 도우시며 자존심이 상하고 굴욕적인 일을 당할 때 묵묵히 겸손하게 수치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도와주셨습니다. 이 은혜에 기초해 하나님은 이런 저를 양들의 목자로 세우시고 이제까지 많은 양들을 섬기게 해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제가 의사로서 일할 때 모든 환자들을 종과 같이 낮아져서 섬길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본과 2학년때에 백혈병에 관한 강의를 들은 뒤에 많은 환자들이 백혈병으로 인해 죽는다는 것을 알고 백혈병을 전공하여서 많은 사람들을 고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위해 기도했을 때 주님은 우리나라에서 별로 많지 않은 소아백혈병을 치료하는 의사 중에 한 사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소아 백혈병은 어른 백혈병과는 다르게 치료를 잘하면 80% 정도 완치가 되지만 나머지 환자의 20%가 결국은 하나님 나라에 갑니다. 아무리 10명을 치료를 정성껏 잘해도 2명은 결국 하늘나라에 가야 하는 현실은 환자의 생명을 담당하고 치료하는 의사로서 참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환자들을 어찌하든지 살리기 위해서는 모든 환자와 부모들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1 살도 아직 안된 영아가 치료하다가 나빠져서 하늘나라 가게 되면 도저히 주치의로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아직 20 대인 젊은 엄마가 아이를 붙잡고 울 때 정말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럴 때면 항상 내가 뭘 잘못한 것 같기도 하여 마음이 힘들 때가 많았습니다. 사단은 너는 의사도 아니라면서 자꾸 마음에서 고소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허물과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을 붙들 때 다시 일어나서 다른 환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최선을 다해서 집에도 가지 않고 열심히 치료했지만 환자가 좋아지지 않아서 하늘나라 가게 되었을 때 환자 친척들이 나를 비난하고 똑바로 치료하라는 식으로 면박을 줄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환자의 보호자는 자신에게 잘못했다고 빌라고 협박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보호자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때는 내가 참 무익한 종이구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이의 백혈병 치료를 하지 않고 포기하겠다는 부모를 설득해가면서 치료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부모가 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하니 그만둘 수도 있지만 어찌하든지 살려야 하기에 부모를 설득해가면서 한 단계씩 치료해가야 했습니다. 고비 때마다 괜히 치료하게 해서 병원비 들게 하고 고생만 시킨다는 불평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는 병원 사회사업가에 연락해서 방송도 알아보고 백혈병 재단이나 기부금도 알아보고 치료비도 구해다 주면서 치료를 해야 했습니다. 왜 내가 아픈 것처럼이나 내 자식이 아픈 것처럼 내가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생각될 때가 있지만 내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나를 사랑하시고 자기를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일방적인 십자가 사랑을 생각하면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의사로서 생명의 종이 된 사람입니다. 무슨 소리 어떤 상황에 처하든 환자들, 부모님들을 어찌하든지 섬겨야하는 사람입니다.  

아주대 소아 백혈병 소아암 완치자 부모들 모임이 있는데 ‘온누리회’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온누리회의 부모님들은 저를 신뢰하고 저도 건강하게 자라준 아이들을 보면서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 몇 년 전부터는 대학생 이상 모임인 ‘너나들이’라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치료가 끝났지만 후유증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완치된 대학생으로 건전한 사회인이 되기 위한 모임입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재작년에 보건사회부장관 표창이 저에게 주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원래 교만하고 몸이 아파서 자기 중심적으로 밖에 살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배우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캠퍼스 양들에게나 환자들에게 목자요 생명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제가 날이 갈수록 예수님을 더 깊이 배워가며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본성상 다른 사람들로부터 섬김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는 마음을 부인하시고 이 땅에 겸손히 낮아져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섬기는 자로 계시다가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여 주셨습니다. 죄인들의 죄문제를 섬기기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할 때 우리는 세상을 거스려 주님의 섬김을 배울 힘이 생깁니다. 과거 비참한 죄인의 상태에서 구원해주시고 그분의 제자로 불러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주께서 가신 섬김의 길, 십자가의 길을 힘써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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