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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2018 마가복음 21강
성경본문 마가복음 11:1-25
ㆍ조회: 325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2018년 마가복음 제 21 강                                                                      
말씀 / 마가복음 11:1-25
요절 / 마가복음 11:9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1. 예수님 일행은 어디에 이르렀습니까(1)? 예수님은 제자 둘에게 어떤 명령을 하셨습니까(2-6)?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려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슥9:9)


2. 사람들은 나귀 타신 예수님을 어떻게 맞이했습니까(7-10)?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각각 무슨 뜻입니까?


3.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먼저 어디로 가셨습니까(11)? 이튿날 예수님은 잎사귀만 있는 무화과나무를 어떻게 하셨습니까(12-14)?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4.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15,16)? 이토록 분노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17)? 종교지도자들은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까(19)?


5. 아침에 성전으로 갈 때 베드로는 왜 놀랐습니까(20,21)?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을까요(22)? 하나님을 믿는 것과 기도 응답은 어떤 관계입니까(23,24)? 기도할 때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입니까(25)?

2018년 봄학기 마가복음 21강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 : 마가복음 11:1-25
요절 : 마가복음 11: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미국 텍사스주 베일러대학 종교연구소가 조사하고, 국민일보에서 2006년 9월 19일자에서 발표한 사실에 의하면 미국 국민의 90%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를 볼 때 미국은 기독교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었습니다. 31.4%가 악한 자를 벌하는 권위적인 하나님을 믿고, 23%가 사랑하고 용서하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16%는 우주 질서를 창조하고 자연의 법칙을 유지하는 힘으로서 세상일에 개입하지 않는 무관심한 하나님을 믿고, 24.4%가 심판을 준비하는 비판적인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도 사람들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나는 어떤 하나님,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 또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가 믿는 예수님,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이 하나님을 배우고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며 이 시대 행복한 목자,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Ⅰ. 왕으로서 입성하신 예수님(1-19)

첫째, 만유의 주 예수님(1-6)

1절 보십시오.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에서 3km 정도 떨어진 감람산 기슭에 자리 잡은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렀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상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안 됐지만 순종해서 갔습니다. 그랬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4,5,6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곳으로 갔습니다. 와 그런데 그곳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귀가 매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천리안이신가 하며 놀랐을 것입니다. 그 후에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나귀를 풀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어이 거기 두 사람, 당신들 뭐요? 왜 남의 나귀 새끼를 풀어서 무엇을 하려는 거요?” 그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 말했습니다. “저어~~주가 쓰시겠답니다.” 그러자 무서운 얼굴을 하고 말하던 그 사람의 얼굴이 180도 바뀌어 말했습니다. “아 그래요. 주님께서 저의 나귀 새끼를 쓰시겠다니 영광입니다. 얼른 가져가세요.” 오매 이런 일이. 제자들은 소름이 돋았습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순종했을 때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로는 다 알 수 없고 말씀에 순종할 때만 조금씩 알아갈 수 있습니다. 가나 혼인집의 하인들도 처음에 이해되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순종하므로 물을 가지고 천국산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 나귀 새끼를 끌고 오는 과정에서 나타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맞은 편 마을에 가 보지도 않았는데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를 풀어 가려고 할 때 주인이 어떻게 반응할 것도 아셨고,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보낼 것도 아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온 세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또한 다윗이 노래했듯이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십니다. 내가 무엇으로 힘들어 하고 무엇으로 고통하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그동안 주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11장부터는 자신을 ‘주’(The Lord)라고 칭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바로 만유의 주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골로새서 1:16절은 말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세상 만물이 예수님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귀의 진짜 주인은 예수님이셨고, 나귀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은 청지기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이나 생명, 자식까지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입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민정시찰을 할 때의 일입니다. 여왕은 시골 가난한 농부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농부는 가난하여 드릴 것이 없어 평소에 아끼던 소중한 차를 대접하며 여왕과 대화하였는데 여왕이 물었습니다. “이 집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을 텐데, 그 중 가장 귀한 손님은 누구였나요?” 이 질문을 한 여왕은 예수님이라고 대답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는 뜻밖에도 “여왕 폐하께서 우리 집을 방문한 가장 귀한 손님입니다.” 라고 말했고, 여왕은 실망한 마음으로 “나는 사람에 불과한데, 가장 귀한 손님은 존귀하신 예수님 아닌가?”말했습니다. 그 때 농부가 말했습니다. “폐하, 예수님은 나의 손님이 아니라, 나의 주인이십니다.” 여왕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나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손님으로 모셨구나.”하면서 회개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계십니까?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주가 쓰시겠다고 하시면 즉시 “네 주님, 영광입니다. 갖다 쓰십시오.”하십니까? 아니면 “기도해 보겠습니다.” 하시나요? 우리는 나의 인생의, 가정의 주인으로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삶도 내 것이 아니고, 가정도 내 가정이 아니며, 자녀도 내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고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드릴 때 망할 것 같지만, 가장 안전하고, 가장 행복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에 주인으로 오셔서 나를 다스려 주시기에 그곳에 천국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의 주인 자리를 주님께 드리길 기도합니다.

둘째, 나귀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7-11)

7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았고, 예수님은 타셨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왕에 대한 존경과 환영의 표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면서 열렬히 외치며 환영하였습니다. 9b,10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무리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열렬히 환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이 외친 말 속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의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약속된 메시야란 뜻입니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란 다윗의 위를 물려받을 메사야 왕국을 의미합니다. ‘호산나’란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여기에는 구원자를 애타게 갈망하는 그들의 절규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1차적으로 로마의 압박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백성들의 탄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도 죄의 사슬로부터 풀어 주시고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영혼의 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자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볼 때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고통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귀 기울여 보면 내면의 해결되지 않는 인생 문제와 죄 문제로 고통하며 탄식하고 있음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미움으로 고통하고, 어떤 사람은 정욕 문제로 고통하며, 어떤 사람은 장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문제로 고통하며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애타게 갈망합니다. “호산나” 이는 사단의 지배 아래서 죄로 인해 고통하는 인생들의 영혼의 절규입니다. 우리의 내면도 구원자를 갈망하며 외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호산나, 저를 미움에서 구원하여 주소서!”, “호산나, 저를 시험의 두려움에서 구원하여 주소서!”, “호산나, 저를 정욕의 죄에서 구원하여 주소서!” 우리도 주님게서 구원해 주시길 바라는 심정으로 한 번 외쳐 보겠습니다. 어디어디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호산나, 저를 구원하여 주소서!” 하겠습니다. 시작 “호산나, 저를 구원하여 주소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Ⅱ. 하나님을 믿으라.(12-25)  

12절을 보십시오. 성전에서 베다니로 가셨던 예수님 일행이 이튿날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예수님은 시장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멀리 한 무화과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보셨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때는 유월절, 4월 중순쯤으로 팔레스틴에서는 무화과의 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는 열매를 기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화과나무에 아무런 열매가 없자 예수님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성전은 장사꾼의 소리와 가축들의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자, 오세요, 오세요. 여기 양이 있어요. 예쁜 양도 있어요. 비둘기도 있어요. 싸게 드릴 테니 얼른얼른 오세요.” “음매~, 음매에해~” 이것을 본 예수님은 분노하시면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물건들을 들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17b절을 보십시오. ‘내 집은’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전에는 말씀과 기도와 찬송이 흘러넘쳐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곳에서 장사하는 자들과 결탁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예배하러 온 사람들을 등쳐먹는 등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고 우리의 몸을 온갖 지저분하고 악취가 나는 죄악으로 채울 때 주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과 같이 우리를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전 된 우리의 몸을 깨끗케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 일행은 그 다음 날 아침 그 무화과나무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기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비틀어져 부렀나이다. 와따메 주님, 정말 대단해 부러유!” 어제까지 잎이 무성하고 싱싱하던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하룻밤 사이에 뿌리로부터 말랐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는 두려움을 넘어 부러움의 눈으로 이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 나는 언제나 예수님을 다 배워 저런 권세 있는 말을 해볼 수 있을까?~’ 이에 주님은 뭐라 하십니까?

22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 자립적인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자립’이란 ‘dependence on God’ 곧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만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문제는 인간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배후에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제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이 땅을 떠나시면 제자들만 남습니다. 그들도 이제는 예수님 없이도 자립적인 믿음을 가지고 구원역사를 섬겨야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만 보고 놀라면 장차 어떻게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방향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눈에 보이는 사람, 곧 목자님이나 부모님, 혹은 물질을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조금 힘든 일이 있으면 자기는 기도하지도 않으면서 목자님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지 않아서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또 부모님이 날 도와주지 않아서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원망합니다. 불평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할 때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고, 의존적이 되고, 무기력해지며, 망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자립이란 스스로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모든 의존심과 원망, 불신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숙해지고 강해지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예수님의 능력이 부러웠습니다. ‘아, 나도 예수님 같은 능력을 가지면 정말 좋을 텐데...’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실 때 “주님, 나에게 명하여 물위로 걸어오라 해 주세요. 저도 주님처럼 물위를 걷고 싶습니다.”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번에는 말씀 한마디로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마음을 아시고 “베드로야, 날 보고 놀라지 마라. 너도 하나님을 믿으면 할 수 있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능력의 원천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말씀 한 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태초에 흑암이 온 땅을 뒤덮었을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찬란한 빛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사라의 마른 태에서 생명을 탄생시키고, 홍해를 가르시며,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함께 하시고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무기력하고 무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나의 삶에 역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내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불신하는 마르다에게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책망하셨습니다. 믿으면 믿는 만큼 우리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믿음이란 저주지 물을 집으로 끌어다 주는 수도관과 같다. 즉 하늘의 보물을 지구에 날라다 주는 수송 파이프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엄청난 축복과 무한한 능력을 준비하시고 주고자 하시는 데 우리의 믿음의 파이프에 따라 그 축복과 능력이 흘러가는 양이 다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의 파이프가 작아서 아이들의 물총에서 나오는 물줄기만큼의 능력을 체험하고, 어떤 사람은 지름 1000mm인 상수도관에서 나오는 물줄기 같은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연결된 연결선이 기가 인터넷이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몇 초 만에 덧입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하나님의 능력의 인터넷창이 뜨는 데만 며칠이 걸리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어느 정도 큰일을 할 수 있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은 “베드로야, 뭐 이렇게 무화과나무 마른 것 보고 놀라니? 네가 믿으면 산을 들어 바다에도 던질 수 있단다.”하는 뜻입니다. 여기서 산은 요지부동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믿음으로 말하고 명령하면 바다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산을 옮기겠다고 그 산에서 흙을 한 삽 한 삽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저런 어리석은 사람 보았나하고 그를 무시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변함없이 꾸준히 삽질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산을 옮겼습니다. 이는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노력해 나간다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의 한자성어입니다. 우리가 누군가가 뭘 할 때 이를 비웃어서 ‘삽질하고 있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누가 아무리 무시해도 인내와 믿음으로 삽질을 계속하는 사람이 결국 해내는 법입니다. 누구든지 이렇게 믿고 도전하면 우리 앞에 있는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산과 같이 느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누구는 입시의 산, 누구는 질병의 산, 누구는 취직의 산, 누구는 죄악의 산 등 많은 산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것이 너무 막막하게 보여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지만 믿음으로 삽질하기 시작하면 마침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에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함께 하시고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고, “산아 던져져라.”선언하고 도전할 때 이런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해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는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 줍니다. 영어가 어렵습니까? 한 단어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장 듣고 외우다 보면 어느 날 갑자가 영어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에 제자양성이 어렵다고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피싱하고 한 팀의 일대일을 하며 도전해나가는 사람이 결국에는 제자양성에 성공하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저런 역사를 이룰 수 있었는가 하고 사람들은 놀라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마침내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도전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능력의 원천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을 믿으며 도전할 때 그 삶에 위대한 변화가 따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 어떻게 달라지는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예수님을 의지하던 복음서의 제자들은 부정적이고 운명적이며, 무능력하고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며 엄청난 능력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였고, 중풍병으로 고생하던 애니아를 일으켜 세웠으며, 욥바에서 죽은 도르가를 살렸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여 3천명, 5천명을 회심시켰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들은 능력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하나님을 믿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럼,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 아닌가요? 그러나 주님은 바울과 제자들만 가능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anyone’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저와 여러분 모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도전하는 자에게는 산을 옮기는 믿음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믿음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23b절을 보십시오. ‘마음에’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니라” 의심만 극복하면 다 됩니다. 의심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인간의 자연스런 심리현상일까요? 아닙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심과 불신이 생길 때는 이것을 사단의 역사로 간주하고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믿음으로 큰일을 한 사람들은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심과 불신과 부정적인 생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선택이고 바라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는 쪽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불신하고 주저앉아 있는 쪽을 바라보고 선택할 것인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순간순간의 전투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쪽을 기도로 선택하고. 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의심을 물리치고 산을 옮기는 삶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 기도하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받을 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약속의 말씀을 믿을 때 마음속에 파고드는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 응답을 위해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협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라 하시니라.”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때, 기도가 막히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할 자격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용서하고 기도하며 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저는 개미보다 베짱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많습니다. 치열하게 기도하고 치열하게 믿음의 선한 투쟁을 하는 것보다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책을 읽거나 여행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게 올해 3주에 한 번씩 새벽기도 메시지를 섬기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저는 그 전에도 요청이 있었지만 그냥 미소로 답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가 형제의 짐을 나눠져야 한다는 내면의 음성을 외면할 수 없어, 차마 웃을 수 없었고 말씀을 맡았습니다. 말씀을 섬기는 것은 정말 은혜였습니다. 말씀을 전하니 말씀이 저의 심령에 깊이 임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집에서 메시지를 쓸 때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빠 그러다 주일메시지도 섬기는 거 아냐?” 저는 말은 못하고 메시지를 섬기는 것이 큰 축복이지만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여름수양회 이틀째 소감을 쓰고 있는데, 모세 목자님이 수양회 끝나고 주일 메시지를 전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저는 “기도해 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은 사실 완곡한 거절의 표현은 아니고 정말 기도해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님은 하는 것으로 아시고 목자님 자리로 가셨습니다. 섬길 말씀에 ‘주가 쓰시겠다.’와 ‘하나님을 믿으라.’라도 있는데 못하겠다고 말씀드리기도 거시기하고 그랬습니다. 저는 그날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고 소감을 썼습니다. 저는 홍해 앞 비하히롯에 있는 저의 가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두 명의 고3생, 한 명의 임용고시생이 있었고 무엇 하나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시골 부모님은 머리에 이상이 있으신지 논에서 쓰러지시고 오토바이 타시려다 넘어지시기도 하셨다는 말을 수양회 와서 들어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저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이 이 홍해를 믿음으로 건너길 바라심을 느낄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수양회가 끝나고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모세 목자님은 전체 카톡에 주일 말씀을 제가 섬긴다고 공지까지 하셨습니다. 저는 ‘아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안 좋으시고 파킨슨병이나 뇌졸중이 의심이 되는 부모님이 급하게 병원진료가 필요해 서울에 올라오시게 되었고, 제가 그 일을 알아봐야 했습니다. 부모님은 월요일에 저희 집에서 주무시고 화요일 입원하셨습니다. 저는 계속 고대병원을 오가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을 섬기는 것을 어려워하는 제게 정말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사단은 ‘야 그냥 못하겠다고 해! 상황이 어렵잖아. 상황이.’하였습니다. 목자님도 제 상황을 아시고 아버님의 안무를 물으시고, 메시지는 어떻게 할까 물으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못하겠다고 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이 믿음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가정의 산과 같은 상황을 옮기는 믿음을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메시지를 섬기는 것이 산처럼 막막했지만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순간순간 사단은 저의 상황을 보고, 저의 약점과 허물을 바라보도록 하고 힘을 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게 하심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이런 과정에서 많은 은혜를 주시고, 부모님도 우려했던 만큼 큰 병이 아니라 안심하고 퇴원하게 하시므로 산을 조금 옮기고 쉬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산을 만나면 피하고 돌아가고자 하는 맘이  많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언제든지 드리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들을 옮기는 능력을 덧입는 삶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주요 왕이 되셔서 우리를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모든 수렁에서 건지시는 분십니다. 우리가 산을 만나 사단의 음성을 들으므로 주저앉아 있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도전하고 능력 있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산을 옮기는 믿음을 체험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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