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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히브리서 제 3 강
성경본문 히브리서 3:1-4:13
전한날짜 2018.9.23
ㆍ조회: 157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2018년 히브리서 3강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말씀: 히브리서 3:1-4:13
요절: 히브리서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지난 주 말씀에서 예수님은 천사보다 탁월하신 분이시오 우리를 구하시고자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을 맛보신 구주가 되심을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서두에 예수님과 모세를 비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천사와 모세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최고의 중보자로 여겨 모세를 높이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스 기자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모세보다 탁월하신 분으로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굳게 붙들고 저 안식에 들어가기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권면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구체적으로 주의 말씀을 굳게 불들도록 말합니다.

I.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1-6)
 1절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 성도들을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하고 부릅니다. 이 말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하며 여러분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거룩한 사람들입니다’하고 그들이 잊고 있는 사실을 깨우치듯 감탄해하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거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2장에서 배웠듯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잠시 천사보도 못한 사람으로 오시고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이제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하겠습니까? 1b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어려울 때는 당장 어렵고 힘든 것만 생각하면서 내가 예수님을 믿어 얻은 것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생각하지 않으니까 예수님에 대한 감격이 없고 그 믿음에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예수님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의 은혜와 감동이 늘 새롭게 자신이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에 늘 감사하고 기쁨 속에 지냅니다. 특히 예수님이 믿음의 도리의 사도신 것과 대제사장이신 것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믿음의 성장을 이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깊이 누릴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능력과 은혜를 누리며, 환란 속에서 인내하고, 소망을 갖고 환한 얼굴로 주님을 찬송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 그것은 곧 복과 승리를 누리게 되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와 비교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탁월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도록 돕습니다. 지금 히브리 성도들이 돌아가고자 하는 유대교에서 모세는 아주 위대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아무리 위대해도 예수님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모세는 참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모세와 같은 종이 될 수 있을까 이것도 깊이 생각하면 참 놀랍습니다. 그는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의 종으로 그들을 섬겼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애굽 왕 바로 아래 매여 있던 노예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바로에게 도전해 10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치고 그들을 구해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본성을 드러내고 자기 감정과 정욕대로 마구 행했습니다. 그들은 그 크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지나오며 많은 능력을 체험했지만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 은혜 받았었느냐는 식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때로는 “이 원수같은 놈, 우리를 광야에서 이렇게 굶겨죽이려고 출애굽시킨 것이냐”며 모세를 돌로쳐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들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긴 하나님의 백성으로 겸손히 영접하고 그 앞에 엎드리고, 언제나 참고 하나님의 뜻대로 신실하게 그들을 섬기고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인도했습니다. 사람들은 모세를 생각할 때 ‘위대한 하나님의 종’, ‘출애굽의 영웅 ’ 하면서 높이 존경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룩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자녀들의 이름을 유다니, 이삭이니, 아브라함, 다니엘 하고 짓지만 ‘모세’ 라는 이름은 좀 체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뭘 모르는 사람이 ‘모세’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겁니다. 나도 ‘모세’이고 제 아들 이름은 정말 ‘모세’지만 모세를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는 정말 뭘 모르고 이 이름을 지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번 지어진 이름 무를 수도 없고 그대로 써야 합니다. 어쨌든 이 이름의 위대성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한결 같이 신실한 충성을 드렸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이에 비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모세는 하나님이 지으신 집에 종으로써 신실했지만 예수님은 모세가 충성했던 그 집을 지으신 분으로서 더 영광을 받으실 만합니다. 여기서 집이란 ‘하나님 구속역사’를 말합니다. 모세는 구속역사를 섬기는 종으로서 충성하며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지만, 예수님은 이 구속역사라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이 구속역사를 신실하게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이것은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어오신 것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해계시던 분이 시공간 안으로 자기를 제한해 오신 것입니다. 참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므로 그대로 순종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얼마전 박원순 서울 시장님이 서울 한 동네 옥탑방에서 현장체험 근무를 하였었는데 그때 언론은 이것을 크게 기사화했습니다. 서울시장은 소통령이라할 정도로 권세있는 자리인데 이런 분이 이런 곳에 들어가 한 여름 선풍에 틀어놓고 지내다니 ... 하여튼 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창조주이시면서도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시고, 겸손하게 죄인들을 섬기시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셨습니다. 모세는 종으로서 신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집은 지은 자이시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전폭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차이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차이이며, 종과 아들의 차이입니다. 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면 그들은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하는 발길을 돌려 다시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이제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뒤로 두고 모세에게로 간다면 그거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으로, 이것은 자기 구원을 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요즘 중고등학생들은 방탄소년에 완전히 꽂혀있나 봅니다. 만일 누구든지 방탄소년 오빠들을 무시하면 가만 안두겠다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 사랑하는 사람을 깊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늘 생각하고 깊이 생각해야할 사람을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천사보다 탁월하시지만 잠시 천사보다 못한 모습으로 오셔서  죽음을 맛보시고 우리를 속량하신 예수님, 모세 보다 더 신실하시게 충성하여 구원 역사를 이루신 대제사장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예수님을 생각하되 깊이 생각할 때 우리가 영혼의 복을 누리고  삶의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신앙이 아주 어려울 때 깊은 좌절 속에서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때 이 책을 아마 열 번은 족히 읽은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 그리고 그의 죽으심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이것은 제 신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저를 예수님의 섬김과 죽으심으로 세계로 깊이 인도해준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생각하면서 우리 믿음의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을 깊이 배우게 되었고 이로서 신앙생활의 방향을 새롭게 잡을 수 있었습니다. 내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영접할 수 있게 되었고 다시 목자가 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오직 예수님만을 생각하며 살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위대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변함없이 붙들고 살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번 추석연휴에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얇은 책 한권 정도 읽으면 어떨까요? 우리가 스스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자니 한계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런 때는 저명한 학자들이 쓴 신앙서적을 읽어나갈 때 예수님을 깊이 배워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추석 연휴에 존 머레이가 쓴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 ‘구속의 성취와 적용’ 이라는 책을 읽어보고자 합니다. 지난 8월 필라델피아의 노모세 선교사님과 함께 옆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방문했을 때 한국 학생이 학교를 소개시켜주면서 3권의 책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때 받은 책 중에 한권입니다. 190 페이지 조금 넘는데 이번에 존 메레이 교수의 깊은 연구와 묵상이 담긴 이책을 읽으며 예수님을 배우게 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입니다. 나는 추석이라도 가슴 설레이며 갈 고향이 없지만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며 내 영혼의 고향, 내 구원의 근원되신 예수님께로 깊이 나가고자 합니다. 성경을 읽고 책을 읽으며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은혜가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 6b절을 보십시오. ‘ ...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 여기서 ‘그의 집’이란 그가 거하는 집, 혹은 예수님 소유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예수님 안에서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소망과 확신, 그리고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으면 우리는 주님이 거하시며 함께 하시는 집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의 자랑은 누구입니까? 아들입니까? 귀여운 딸입니까, 아니면 내 남편입니까? 물론 이런 자랑도 좋지만 환란이 닥쳐오고 어려울 때 우리 집의 자랑은 단연코 주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죽음을 맛보시기까지 하며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 집의 자랑이면 우리는 예수님이 거하는 예수님의 집이 됩니다. 계시록 3:20이 말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영접하면 그가 우리의 집이 되고 우리는 그의 집이 되어 주님과 함께 교제하는 기쁨을 충만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자랑하며 그 이름을 끝까지 굳게 잡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II.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3:7-4:13)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실례를 들어 말해 주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히브리 성도들은 성령께서 이르시는 바를 잘 들어야 한다며 다음과 갈이 말합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여기서 ‘오늘’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오늘 이라는말은 13절과 15절에도 반복해서 나오는데 이 ‘오늘’이란 바로 믿음의 결단이 내려야하는 ‘오늘’입니다. 신앙은 오늘이지 내일이 아닙니다. 오늘 그의 음성을 들으면 오늘 회개하고 결단해야지 그렇지 않고 내일하지 오늘만 날이야 하는 식으로 주의 말씀을 대하면 그 사람은 필히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 ‘오늘’ 이라는 날에 주의 말씀을 듣고도 마음을 완악하게 한 자의 멸망에 대해 말합니다. 분문에는 두 개의 사건이 나옵니다. 그 하나는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지도자 모세와 다투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건입니다. 사막과 같은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생존을 위협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문제가 생기면 과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 하나님이 자기들을 도와주었었느냐는 듯 그동안의 은혜를 모두 잊어버리고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이때 그들의 문제는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계신가’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민수기 13,14장에 나오는 것으로 이스라엘 지파 열두 두령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하나님이 주신 땅을 악평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2,33) 그들은 이런 말을 하며 함께 있는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이때 백성들 가운데 불신이 퍼져 그들은 밤새도록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아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출애굽시켜 뭐가 해주시는가 했더니 우리를 여기서 죽이려고 그러셨구나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귀가 얇아 항상 미혹되어 하나님을 불신하는 그들에게 심히 진노하셔서 믿음의 말을 한 갈렙과 여호수아만 빼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광야에서 유리하다가 엎드러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 ...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 그들은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런 조상들의 비참한 실패가 있는데 그러면 히브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첫째로,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12). 악한 마음은 잠깐의 일인 것 같지만 거기서 불신이 순식간에 퍼지고, 그렇게 되면 그들도 조상들처럼 광야에서 다 엎드려져 죽어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게 됩니다.
둘째로, 매일 피차 권면해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오늘’ 잘해야 합니다. 죄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을 ‘오늘’ 삼아 서로 믿음의 권면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 하면 약해서 쓰러집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위로해주며 권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써서 카톡으로 은혜를 함께 나눈다고 합니다. 우리가 또한 소감을 깊이 쓰며 함께 발표하고 나눌 때, 그리고 센터의 각종 모임이나 공부에 나와 함께 배우고 서로 기도할 때 피차 권면함을 받아 죄의 유혹을 이겨갈 수 있습니다.
셋째로,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합니다(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세상에 유혹이 많고 또 핍박이 거세 자칫하면 타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때 처음 믿었을 때의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고 잡으면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도 참여하는 특권을 누리며 구속역사를 섬겨나갈 수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온갖 고문과 박해를 받았지만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배반하느냐며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그 잔인한 시험을 견디고 순교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승리에 참여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일제의 온갖 회유와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자나 깨나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주님 고대가를 만들어 부르며 사셨습니다. ‘낮아나 밤에나 눈물 머금내 내 주님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  신앙은 이렇게 처음 확신한 것을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3:15-4:2절 말씀은 이제까지 한 말씀의 정리로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오늘’을 강조합니다.  4:7에서 다윗도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 내일 말고 오늘이 미래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오늘 불순종하여 완악하게 하면서 내일을 잘하겠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에 있어서 내일은 오늘의 연장입니다.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을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정해주신 안식에 들어갈 것이냐. 바로 오늘에 달려있습니다.

4장 3-10절을 참된 안식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볼 말씀은 3절입니다. ‘이미 믿는 우리는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이 말은 우리가 안식에 들어갔다는 말도 아니고 못 들어갔다는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안식을 제정하시고 자기 백성이 들어오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안식에 들어간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안식할 때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기는 했지만 그러나 아직 온전한 안식,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인생 광야를 지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함부로 살며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만일 그런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불순종하여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엎드려져 죽은 것같이 우리도 그렇게 될 거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저 안식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이미와 아직’ -‘already ... but not yet.’ 이 말은 신학자 오스카 쿨만이라는 사람이 ‘그리스도와 시간’이라는 말에서 사용한 것입니다. 이차 대전 때 연합군이 노르만디 상륙작전이 성공했을 때 이것으로 이미 연합군은 승리한 것이고 유럽은 해방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치가 완전히 항복하고 전쟁이 끝나는 그때까지는 전쟁은 계속되어야하니 아직 완전한 승리, 해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후 저 안식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긴장하며 영적인 싸움을 해나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 중 누가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 이미 구원받았어. 그래서 이제 나는 저 안식에 자동적으로 들어가게 되어있어” 하면서 함부로 산다면 그 사람이 저 안식이 들어갈 수 있을까요?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는 저 구원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영적으로 긴장하며 믿고 순종하며 마귀와 싸웁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는 빌립보서 2:12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 역시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것은 맞지만 아직 완전한 구원으로 가는 여정에 있으니 범사에 실족하지 않을까 하면서 긴장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지키고 완성해 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합니다. 저 안식에 이르기까지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며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을 이의 눈 웊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의 어떤 날선 검보다 예리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혼과 영, 관절, 골수 속에 박여 있는 온갖 인간적인 생각들과 죄악된 욕망을 드러내며 책망하고 회개케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날마다 변화되어 이 인생광야를 지나갈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already 와 but not yet‘ 사이에 있는 우리들의 영의 양식이 되고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말씀을 붙들며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들의 참 안식이 되십니다. 우리에게 참 영혼의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누구든지 이 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듣을 때 마음의 완악함을 버리고 주께 나가야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면서 이 예수님과 함께 저 안식의 땅에 들어가 이 예수님과 함께 참 안식을 누리기까지 우리가 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영적으로 긴장하며 주의 말씀을 힘써 붙들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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