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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히브리서 제 4 강
성경본문 히브리서 4:!4-5:10
전한날짜 2018.9.30
ㆍ조회: 142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것이니라
2018년 가을학기 히브리서 4 강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것이니라
말씀: 히브리서 4:14-5:10
요절: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이제까지 예수님은 천사나 모세보다도 우월하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에 나온 예수님의 우월을 말하는 첫 번째 것입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 우월하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유대교의 제사 제도에서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속죄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중보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보다 더 뛰어난 대제사장이라는것입니다. 본문은 이 예수님에게 ‘큰’자를 더하여 ‘큰 대제사장’ - a great high priest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큰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일까요? 이로 말미암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은혜가 어떠합니까? 본문은 이 은혜가 얼마나 고귀한지, 얼마나 풍성한지 이 은혜가 흘러나오는 곳을 ‘은혜의 보좌’라고 하며 우리가 이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가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도 이 예수님을 배우므로 은혜에 보좌에 담대하 나가는 복을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I. 큰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4:14-16)
14a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 ’ 이것은 영어로 ‘Therefore since we have a great high priest.’입니다. 지난 번에 서론을 공부할 때 히브리서에는 ‘We have ... ’가 둘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지금 나오는 ‘We have a great high priest(4:14), We have such a high priest’(8:1) 곧 대제사장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We have an altar’(13:10) 우리에게 한 제단이 있으니 – 자기 몸을 우리를 위해 속죄제물로 드리신 예수님의 제단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모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은혜를 감동적으로 말한 것으로 이 두 개의 We have 가 히브리서 이해의 중심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 since we have a great high priest – 이 말씀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이 말은 지금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인데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며, 어떤 점에서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일까요?
 
4:14절을 다 함께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이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여기서 ‘승천하셨다’를 원문으로 보면  ‘하늘들을 관통하셨다(He has gone through the heavens)’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시공을 초월해 하늘의 하늘을 다 지나 이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시지만 우리를 구하시고자 시공간의 벽을 뚫고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낮아지심은 그 차제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번에는 반대로 ‘하늘들을 관통해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신 동안에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며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속죄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셔서 거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왜 여전히 대제사장이십니까? 하늘 성소, 곧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이번에도 역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중보의 사역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신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그 이상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사역을 크게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낮아짐의 사역’, 한자어로는 ‘비하의 사역’이로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섬기시고 고난 속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낮추실 수 있을까요? 놀라운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높아짐의 사역’, 곧 ‘승귀의 사역’이다 하고 말합니다. 이것은 부활, 승천, 그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그리고 때가 되면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일을 말합니다. 이 두가지 사역,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의 사역을 잘 이해하고 믿고 영접할 때 우리의 신앙에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이렇게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으로서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신 것으로 우리를 위한 일을 다 마치셨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오. 이제 나머지는 당신들이 피의 은혜에 의지하여 열심히 투쟁해야 합니다.” Bye-bye 하고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지만  저 하늘 성소에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어깨에 짊어지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의 기도를 간절히 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땅에서 온전히 순종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신 그 아들이 그 보좌 우편에서 간절히 기도하니 하나님이 얼마나 빨리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아버지여, ***가 여전히 죄의 유혹을 감당하기 어려워합니다. ***가 또 넘어졌습니다. 마귀가 지금 ***를 쓰러뜨리려고 합니다. 이들을 위해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의 죄를 보지 마십시오. 여기 제가 그를 위해 흘리 피가 있습니다. 이 피를 받으시고 그를 구원하소서”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관심은 승천하신 후 저 하늘에서도 끊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 죄악 되고 거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연약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지금 저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계시다니, 오늘 우리가 연약한 중에서도 실족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아갈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승천하여 대제사장이 되어 지금 저 하늘 성소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감격을 ‘We have a great high priest’하고 말한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사림 대제사장은 우리를 위해 기도해도 육신이 약해 중단하기도 하고 더러는 죄를 짓기도 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 성전 지성소에 나가는데 하나님이 지정하신 날에 일 년에 한번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죽으신 후에는 부활하시어서 이제는 아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일년에 한번이 나니라 쉬지 않고 간구하시니 예수님은 얼마나 탁월히신 분이십니까? 그래서 이 예수님은 ‘큰’ 대제사장 ‘a great high priest’ 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을 생각하며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1b). 여기서 ‘믿는 도리’란 구원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며 이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으로 간구하고 계시다는 이 진리를 굳게 믿고 잡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굳게 잡으면 어떤 경우에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바로 십자가 대속의 진리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하나님은 십자가 대속의 진리로 인류 구원을 성취하셨고 그 진리로 지금도 구속역사를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우리 성 삼위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그 깊은 곳에 십자가를 품으셨고, 때가 되자 그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 대속을  완성하시고, 이제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은 저 하늘에서 십자가 피를 바땅으로 간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이루신 이 십자가의 도, 곧 믿음의 도리를 굳게 붙잡을 때 마귀가 우리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을 굳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나를 위해 하시는 것이 뭐가 있지?” 할 것이 아니라 이 시간에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십자가의 도를 굳게 불들고 마음에는 확신과 감사가 넘치게 되길 기도합니다. 이 예수님이 계시니 오늘 우리가 이 거칠고 죄악된 세상에서 실족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아들로서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하나 더 알아야할 중요한 사실은 이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동정하신다는 것입니다. 15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대제사장의 사역은 사람의 연약함을 담당해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다리 역할을 하는데, 이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아야하기도 하지만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누구를 위해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그가 ‘당신은 나를 이해할 수 없어요’ 하고 말하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를 도와준다고 나서다가 오히려 상처만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라’며 이중부정을 사용해 확실히 그러함을 강조해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것이 가능합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굿간에서 갓난 아이로 태어나셨습니다. 가난한 목수 요셉의 집에서 사시면서 가난을 아셨습니다. 먼 길을 걸으면 우리와 똑같이 피곤해 우물가에 털썩 주저 앉으셔야 했고 “내가 목마르다” 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큰 고통까지 다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래도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는 체질이라 죄에 유혹받고 넘어지는 우리를 깊이 이해하실 수 없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마귀의 시험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시험은 약하니까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배고플 때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고 싶은 유혹을 받으셨고 고생 없이 영광을 얻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모든 면에서 똑같은 사람이십니다. 우리가 겪는 죄의 유혹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은 연약함 속에서 늘 시험을 받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도 나를 몰라, 누가 나의 이 곤경을 알겠으며 또 도와주실 수 있겠어’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 또 왜 그러니?“하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동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해하고 도우실 수 있습니다.    
 
16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문제는 우리가 이 보좌 앞으로 나가려고 해도 자기는 아무래도 죄가 많아 하나님이 나를 안 받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기도 안하고 목자님이 기도해주셔야 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자기보다는 목자님이 더 나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 피 흘려 죽게까지 하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잘 알고 계십니다. 죄도 그렇고 의지도 그렇고 하는 짓 하나 하나 다 구원에 합당한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것을 아시고 독생자를 보내시고 구원하고자 하신 것인데 무엇이 의심이 듭니까?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라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일 년에 딱 한 번 겨우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그 백성을 만나주셨습니다(출25:22). 언약궤 위에 금으로 만든 천사들이 날개를 위로 쳐들고 십계명이 들어있는 언약궤를 지키고 있었는데 대제사장은 그 언약궤에 피를 뿌렸습니다(레16장). 이때 하나님은 진노를 누그러뜨리시고 자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거기서 만나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곳이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오는 보좌라고 해서 시은좌(mercy seat), 시은소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시은좌가 이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보좌가 되었습니다. 그 보좌에서는 정죄가 흘려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덜덜 떨면서, 혹시 날벼락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자격 미달은 아닐까 하며 마음조이며 이 보좌 앞으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굳게 믿고 – 아까 이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담대하게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피를 믿고 담대하게! 죄 짓는 나눈 분명히 부끄럽지만 어느 때든지 그 피를 믿고 담대하게 나가 간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예수님께 직접 나가는 길을 번잡하게 만들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흐려놓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가되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나가지 못하고 천사들이나 성인들의 공로를 의지해 나갔습니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성인이 낫지 않을까 하며 차선책을 쓰는 것입니다. 교회가 자꾸 이런 성인 중보자를 세워, 그것도 영역별로 세워 어떤 때는 어떤 성인에게 기도해야 하는가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루터는 벌판을 지나가다가 번개 천둥에 놀라 벼락을 맞아 죽을까봐 “성 안나여 지금 나를 구원해주시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성 안나는 탄광의 신으로 자기 아버지가 탄광업자였기 때문에 아는 게 이것이라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종교개혁 때에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지고 신앙고백에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이에 대해 나온 벨기에 신앙고백 제26조 ‘그리스도의 중보’ 항에 있는 글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중보자를 찾아야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원수였는데도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주는 사람보다 우리를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가 권위와 권세를 갖고 있는 사람을 찾아야한다고 해 보자. 누가 성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과 비교되겠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들보다 우리의 기도를 더 빨리 들어줄 사람이 누구인가? ... 또 사도는 우리가 용기를 내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갈 것이니라.‘ ... 우리가 왜 다른 중보자를 찾아야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중보자로 주시기를 기뻐하셨으니, 우리가 다른 중보자를 찾는다며 그를 떠나지 말자. 찾으려고 애써도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할 때, 그의 은혜와 능력이 필요할 때 우리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중보자 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하늘 시은좌에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식사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어째 저런 사람들과 식사하는가 하며 비판했습니다. 이들에게서는 도무지 은혜라는 것이 흘러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예수님은 세리 *** 야, 죄인 *** 내가 너희를 만나러 왔어. 이리 오거라 하시며 그들은 사랑의 식탁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를 먼저 불러 그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창녀로 그 몸과 마음이 병들어 못쓰게 된 막달라 마리아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주시고 그녀가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려 발에 부을 때 이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시고 마음으로 받아주시고 그녀의 진심과 믿음을 높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온몸에 문둥병 걸린 사람이 나와 ‘주님, 나를 깨끗케 해주세요’하고 엎드려 간구할 때 그를 더럽다 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겨 그 몸에 손을 대시고 “그래, 깨끗함을 받으라” 하며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거라사 귀신 사람이 떼 귀신에 사로 잡혀 벌거벗은 몸으로 자학하고 악쓰며 돌아다닐 때 그에게 돼지 2000마리를 희생시키시고 귀신을 다 쫓아내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시 불쌍여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말하라’ 우리 예수님은 긍휼의 하나님,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러하건데 우리가 어떤 허물을 범했던들 주님이 받아주시지 않으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죄로 고통하면 하는 만큼 주님을 우리를 더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면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저도 참 큰 죄인으로 죄 가운데 고통하며 망할 수밖에 없는 자였는데 주께 나갔을 때 주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 넘치는 은혜를 주시고 이제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와 사망 권세 아래서 다들 고통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불쌍여 여기셔서 구하시므로 다들 이렇게 은혜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 6:23은 말합니다. ‘...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welcome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때든지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은혜에 풍성함에 대해서는 계시록 22:1,2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날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주의 보좌 앞에 나가 간구하는 사람은 이렇게 그 영혼을 살아나고 생명에 충만하며 때를 따라 열두가지 풍성한 열매습니다. 그러니까 이 예수님 앞으로 담대하게 자꾸 나가시지 바랍니다. 무시로 나가 주의 긍휼을 구하고 도와주시기를 바랄 때 그 삶이 바뀌게 됩니다. 자학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도 없고 잘되는 것 같은 남을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그 피의 은혜를 믿으면 이것에 의지해 담대히 주께 나가 충만한 은혜를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II.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예수님(5:1-10)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되신 은혜는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어떻게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시고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 되셨는가를 말해줍니다.

첫째, 예수님은 부르심에 따라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5:1,2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사람 가운데서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식하고 미혹된 자들을 받아주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속죄하는 제사를 드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대제사장 역시 연약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도 하나님께 나가기 전에 자기의 죄를 먼저 속하기 위해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런 만큼 이 직분은 존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직분은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만이 담당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택하심을 따라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에 관해 성경을 근거로 말합니다. 시편2:7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하는 말씀과 시편 114:4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과는 별도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임명하신 합당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온전한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에 계실 때 우리와 같이 연약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 고통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하실 이, 곧 하나님 아버지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할 수만 있으면 이 십자가의 잔을 피하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로, 곧 경건으로 간절히 기도하심으로 마침내 힘을 얻고 순종하여 고난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마침내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우리들을 위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이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 성도들이 지금 핍박 속에서 어렵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을 주님은 다 아십니다. 이때 이들은 예수님이 순종으로 그들의 구원을 이루신 것을 알고 그들도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순종은 모든 신앙의 기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순종하라’. 순종은 구원으로 가는 길이며 구원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큰 대제사장 예수님께 나가는 길이요 그와 함께 하는 길이며 은혜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충만한 생명과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우리가 교만히 행하여 자기 길을 가기보다 겸손히 순종하여 우리의 큰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께 때를 따라 나가 기도하며 그 안에 있는 풍성한  긍휼과 생명, 구원의 은혜를 충만히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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