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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히브리서 제 5 강
성경본문 히브리서 5:11-6:20
전한날짜 2018-10-07
ㆍ조회: 196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안암1부 메시지 (Mark Yang 2018-10-7)
영적 성장

히브리서 5:11-6:20
요절: 5: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우리는 너무나 급격한 가치관의 변화 속에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제자양성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 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들어오는 강한 죄의 유혹으로 인해 힘들어 합니다. 특히 영적 분별력이 약하고, 성경적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 자녀들이나 젊은이들은 쉽게 죄의 유혹에 말려들어 홍역을 치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한번 죄의 유혹에 빠지게 되면 그 세력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되고 스피릿을 잃어버리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세상으로 흘러 떠내려가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강한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을까요? 또한 많은 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처들은 어린 시절에 생긴 것일 수도 있고, 파괴된 관계성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면서 겪게 된 부정적인 경험에서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열매맺는 삶을 살려면 이런 상처들은 반드시 치료함을 받아야 합니다. 누가 이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지난 주,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며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음을 배웠습니다. 저자는 “We do have”라고 함으로서 큰 대제사장이 현재 우리에게 계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우리에게 연약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아니하고 깊이 이해해 주시고 동정해 주시고 감당해 주시는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우리는 연약하여 늘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근본적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4:14-16).  

   오늘 말씀은 영적 성장과 희망의 중요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저자는 왜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며 성장하지 않을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는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희망이 없으면 힘든 상황에 쉽게 굴복해 버립니다. 그러나 마음에 절실한 희망이 있으면 어떤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역경을 이겨내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영적 성장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봄으로써 은혜 받고자 합니다.

I. 성숙한 데로 나아가자 (5:11-6:8)
   저자는 7장에서 멜기세덱에 대해 자세히 말하기 전에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음을 여러번 언급했습니다 (5:6,10,11; 6:20). 저자는 이 심오한 영적 비밀을 설명하고자 할 때 독자들이 영적으로 어려서 이를 설명하기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성장해야 했지만 어느 순간에 성장을 멈추고 영적 어린 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영적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소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은 말씀을 듣는데 게을렀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여기서 “둔하다”는 단어와 6:12절의 '게으르다'의 단어는 헬라어의 “노드로스”에서 온 것으로 “느리고, 게으르고, 둔하다”는 뜻입니다. 게으르게 되면 영적 소원을 잃어버리고 온갖 사단의 유혹과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말씀을 듣는 데 게으른 것은 말씀에 대한 영적 소원을 잃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모든 말씀이 다 그렇고 그런 말씀으로 들립니다. 말씀에 대한 영적 소원이 없기 때문에 영적 성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늘 새롭고 신선한 감동을 줍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지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고 험한 세상을 살 힘을 공급해 줍니다 (시 19:7-8). 말씀을 사모하게 되면 스피릿이 충만하게 되고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기에 게으르게 되면 스피릿을 상실하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둘째로, 그들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상태에 있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해서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때가 오래므로'라는 말씀은 그들이 신앙생활 한지 상당 기간이 흘렀음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위대한 사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성경선생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영적으로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는 귀엽습니다. 그러나 그 특징이 자기 중심적이고 분별력이 없고 연약하며 타인을 의존합니다. 어릴 때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무는 것은 용납할 수 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피터팬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고 어린 아이와 같이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항상 남을 의존하고 섬기기보다 섬김 받기를 원합니다. 믿는 자들이 영적으로 성장하여 성경선생이 되어 서로 가르칠 때 교회는 건강하고 강한 공동체가 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은 형식주의나 매너리즘에 빠져서 영적 성장이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성장을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 개발에 힘써야 합니다.
   5:13-14절에서 영적 어린 아이와 영적으로 성숙한 자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3). 젖을 먹는 어린 아이는 면역이 약하기 때문에 질병에 노출되면 잘 걸립니다. 이와 같이 영적 어린아이도 영적 면역이 약하여 영적 질병에 잘 걸립니다. 이런 자들은 범사에 감사하기보다 매사에 불평하고 남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립적으로 하기보다 사람들을 의존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찾고 마음에 쓴뿌리를 갖습니다. 나는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피해의식에 시달립니다. 그들이 영적 어린아이로 남아 있는 것은 의의 말씀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의의 말씀”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삶을 살게 하는 복음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문제는 말씀을 잘 모르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알고 있는 말씀을 실천하지 못한 경험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론적으로보다는 체험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요 7:17). 말씀을 이론적으로만 알게 되면 확신을 가질 수 없지만 말씀을 실제 삶에서 체험하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디 선생의 성경 가장자리에는 T. P. 즉 Tested and Proved (해 봤더니 그대로 되더라) 라는 표시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기 때문에 이를 실천하기만 하면 놀라운 영적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14절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에 대한 묘사입니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어린 아이의 특징은 소화력이 약하여 우유나 죽 같이 이미 소화된 음식은 잘 먹지만 고기와 같이 씹어서 소화해야 할 단단한 음식은 뱉아 버립니다. 또 어린 아이는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분별력이 없어서 실수를 많이 합니다. 영적으로 어린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와 축복에 관한 말씀은 잘 받아들이지만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회개, 헌신, 희생, 주권신앙 등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은 다 뱉아 버립니다. 또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숙한 자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연단을 받는다는 것은 스스로 훈련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디모데전서 4:7-8절에 나타나 있는 연단의 의미와 같습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우리 인간은 육(body)과 혼(soul, 정신)과 영(spirit)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육은 운동을 통해서 강해지고, 정신세계도 건전한 사고를 통해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적세계도 영적인 연습을 통해서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분별하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런 능력은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라 평소 배운 바를 실천함으로써 훈련과 연습을 통해 경험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라 휴대전화 하나로 많은 것을 합니다. 전화나 문자 메시지는 물론 웹 서핑, 게임, 동영상, 문서 열람 및 작성 등 여러 모양으로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우리 영혼에 해를 주는 좋지 않은 글이나 동영상도 클릭만 하면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는 강한 죄의 본성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과거에는 부모들의 통제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자녀들을 세상의 유혹과 악영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까요? 자녀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어떻게 죄의 유혹으로부터 지킬 수 있을까요? 이는 영적으로 성장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영적 분별력이 생겨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되면 영적 면역이 약해져서 교만이나 불평, 원망, 불신과 의심, 욕심과 같은 질병에 걸려 못쓰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이런 영적 질병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영육간에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부모들이 끊임없이 영적으로 성장함으로써 본을 보여 주고 영적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도 그 영향을 받아 성장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불평하고 싸우고 이기적으로 생활하면서 자녀들에게는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자신도 기쁘고 자녀들과 다른 사람에게도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을 때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누렸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2006년 3월 60세에 미국에 선교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젊지 않은 나이에 선교사로 와서 언어와 문화와 세대적 장벽 등 많은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을 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 부딪히니 저의 영어는 이상하였고 사람들과 제대로 커뮤니케이션 할 수 없었습니다. 2007년부터 Ron Ward, Mark Vucekovich, Teddy Hembikides 미국 목자들과 선교사 몇 분과 함께 성경교제 연구팀을 만들어 매주 월요일 마다 성경연구를 했습니다. 제가 이 모임을 인도해야 했는데 이때마다 토론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스트레스가 되었습니다. 저는 영어로 인해 지난 10년 동안 끊임없는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저는 사명의 땅에서 외계인과 나그네처럼 느껴졌습니다.

   언어의 장벽 뿐만 아니라 문화의 장벽도 매우 컸습니다. 저는 1984년 이후 매년 미국을 방문했기 때문에 미국 문화를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방문하는 것과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국의 삶의 현실에 부딪혀감에 따라 문화의 충격의 연속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주일 예배 때 메신저가 넥타이도 매지 않고 말씀을 전한다든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기도한다든지 등 마음으로부터 용납하기 힘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미국 젊은이가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나의 등을 토탁거렸습니다. 이것은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이런 버릇 없는 놈이 있나”라고 생각하고 몹시 불쾌했습니다. 그런 후 저는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왜 불쾌해하지? 그는 단지 나를 친구로서 대했을 뿐인데.” 저는 나에게 무엇인가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단지 문화적인 차이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와 나 사이에 거리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저는 언어 문제와 문화와 세대 차이에서 오는 거리감으로 인해 이방 땅에서 사는 것이 외롭고 피곤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영적 성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만일 성장하지 않는다면 저는 아쓰남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남자)이 되겠다는 위기의식이 들었습니다. 저는 늙은 나이에 선교사로 온 것이 후회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저는 선교사로 와서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선교지에 나와서 고생하는 많은 선교사님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나의 자녀들과 손자들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고 복의 근원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려면 성장해야 하는데 문제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성장은 먼저 나의 마음 자세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열매를 많이 맺은 분들이 미국에 와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힘들어 하는 선교사님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는 한국적인 사고방법과 마음 자세를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비교적으로 개방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지에 와서 다른 문화에 노출되니 저에게도 알게 모르게 한국 사람으로서 유교적 사고방법에 깊이 젖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삼강오륜의 장유유서에 기초하여 나이를 의식하는 마음, top down식의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저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마음 자세를 버리고 겸손히 낮아져서 현지인들을 친구 삼아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한마디로 마음을 온전히 비우고 예수님의 성육신의 겸손을 배워야 했습니다. 저는 기도를 많이 하는 가운데 빌립보서 2:7절을 요절로 잡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그런데 이 말씀을 실천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순간 순간 영적 교만을 회개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비참한 죄인에 불과함을 깨닫고자 노력했습니다. 저는 5년 동안 이 말씀을 붙들고 줄기차게 투쟁했습니다. 예수님께 눈을 고정시키고, 예수님의 겸손, 그 분의 인내, 그 분의 긍휼하심, 그 분의 사랑과 믿음을 배우고자 간절히 원했습니다.

   과거에 저는 친구는 나이가 비슷해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더 베리를 보면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한번은 한 선교사의 어린 딸로부터 편지를 받고 좋아하셨습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내 친구야 라고 하셨습니다. 글씨가 삐뚤해서 몇살인가 물었더니 7살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하고도 친구가 된다는 것은 수직적인 유교적인 사고방법에 젖어있는 저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수평적 사고방법을 가진 미국 사람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이것이 성경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을 키우셔서 친구삼으셨고(약 2:23),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요15:15). 저는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하고든지 친구가 되기 위해 예수님의 성육신의 겸손을 배우고자 애를 썼습니다. 처음에는 잘 안되었지만 성령님을 의지하고 줄기차게 노력했을 때 제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 안에 있는 마음의 장벽이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깊은 평화가 찾아왔고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목자님 많이 은혜로워졌네요”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벽이 있으면 말은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이를 예민하게 느끼고 부담을 갖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벽이 없고 평화가 있으면 다른 사람도 이를 느끼고 편하게 다가오게 됩니다. 저는 이런 영적 투쟁을 통해서 지난 10년 동안 여러 미국 목자들과 말씀 안에서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란워드 목자님과는 내면의 온갖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40대 초반의 Steve Stasinos 목자와도 오랫동안 미국 일용할양식을 집필하는 일에 멘토로서 함께 일하면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또 저의 외손자 아브라함 하고도 Inductive로 성경공부를 하면서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보물을 함께 찾아나가며 은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지난 8월 국제 수양회 후에 세계 각국에서 약 200명이 모여서 선교사 목자 수양회를 가졌습니다. 저희는 히브리서 전체를 만 2틀 동안 Inductive로 하였습니다. 그룹 멤버들은 8-9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10대후반에서 70대까지 다양하였고, 각 나라에서 와서 세대 차이와 문화 차이를 뛰어 넘어 말씀 안에서 교제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모임을 섬기면서 히브리서 말씀이 어려워 20대 젊은 분들이 잘 따라갈 수 있을까 염려하였는데 의외로 이들이 말씀을 받고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LA UBF의 미국 목자인 Terry Lopez의 아들인 Joshua Lopez은 19세인데 이번 히브리서 공부를 통해 거듭났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귀납적 성경공부를 통해 세대 차, 문화 차, 성별 차를 극복하고 말씀 안에 숨겨진 보물을 함께 찾아가면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안나 선교사는 15살, 11살, 8살 되는 세명의 손녀들과 Inductive로 성경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반복되는 단어를 찾고, 그림도 그려 보여 주기도 하고, 구글에서 말씀 공부에 필요한 정보를 찾으면서 재미있게 말씀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아쓰남”, “아쓰녀”가 아니라 복의 근원으로 사용하고 계심을 감사합니다. 올해 저는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베드로후서 3:18절을 요절로 잡았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성장한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와의 싸움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자 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고,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 나오는 자기 성질을 죽여야 합니다. 자기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한번 화를 내게 되면 그로 인해 관계성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6:1-3절은 신앙의 초보에 머물지 말고 영적 성장에 힘쓸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스도 도의 초보는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입니다. 죽은 행실이란 죽음 혹은 정죄를 유발시키는 행실들을 가리킵니다. “12사도의 교훈집”에 보면 사망의 길에 이르는 죄의 목록은 "살인, 간통, 색욕, 간음, 도적질, 우상숭배, 마술, 마법, 강탈, 위증, 외식, 표리부동, 사기, 교만, 악의, 거만, 자랑"입니다. 이런 죄들은 죽음을 낳기 때문에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막1:15b; 행 20:21).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고, 믿음은 죄사함과 새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세례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거듭남을 체험하는 성령세례를 받게 되는데 이를 공적으로 선포하는 예식을 말합니다. 안수는 세례 받을 때,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할 때, 직무를 위임 받을 때 축복기도하는 것입니다 (마19:13-15; 막6:5; 행6:6; 13:3). 죽은 자의 부활은 세상 종말에 있을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 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요5:28-29). 영원한 심판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하는 것으로서 둘째 사망을 의미합니다 (계21:8).

   이상을 살펴볼 때 그리스도 도의 초보인데도 상당한 수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에 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초보적인 상태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깊은 영적 세계로 나아가기에 힘써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영적으로 어린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이 되는 것이요, 또한 인간적인 사람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불순종과 반발심의 사람이 순종의 사람이 되는 것이요, 매사에 불평과 원망을 일삼던 사람이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알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아브라함을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믿음을 원하시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이를 붙들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후사 문제로 힘들 때마다 하나님은 하늘의 뭇별이나 해변가의 모래와 같이 수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비전을 보여 주시면서 약속의 말씀을 새롭게 붙들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로 아브라함의 연약함을 감당해 주셔지만 책망이 필요할 때는 책망하시면서 그가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엎치락 뒷치락 하면서도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았을 때 마침내 불가능한 가운데서 이삭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이스마엘을 내 보내고 이삭 하나만을 붙들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이에도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이삭을 말씀하실 때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창 22:2)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정도도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가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를 말해 줍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명령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녀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맹목적이 되어 이성을 잃고 제 정신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사무엘상 30장에 보면 목숨을 내놓고 다윗에게 충성하던 용사들도 자신의 자녀들이 잡혀 곤경에 처했을 때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고자 했습니다 (삼상 30:6). 아브라함은 이성을 잃고 하나님의 명령의 불합리성을 따지며 반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따지거나 반발하지도 않고 말없이 순종했습니다. 순종하더라도 인상을 쓰며 하지 않고 마음으로 했습니다. 그가 마음으로 순종했다는 것은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한 것, 종들에게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돌아오겠다고 한 것, 아들과의 대화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제물을 준비하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었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단지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이삭을 바치는척 하지 않고 실제로 바쳤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히 11:19). 여기서 “생각했다” (Abraham reasoned)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동안 자기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자신은 청지기에 불과함을 생각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과 주권을 생각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었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행동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급하게 말리면서 말했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창 22:12).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이제까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확실한 증거를 필요로 했단 말인가? 왜 이런 증거가 필요했을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이 제 마음 가운데 생겼습니다. 어쨋든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약속을 기초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을 확증하셨고 이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창 22:16-18; 마 1:1).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인격적인 관계성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조건 은혜 베푸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고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에게 믿음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하신 후 그 믿음을 축복하셨습니다 (마 9:2,22,28).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기초로 은혜 베푸시고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는 믿음입니다.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실패가 없으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단의 시기로 하루 아침에 자녀들을 잃고 재산이 다 날아갔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엎드려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우리는 나에게 이런 믿음이 있는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련이 닥칠 때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는 어떤 시련이라도 감당하겠지만 사랑하는 동역자나 자녀가 시련을 당하는 것은 참기 힘들어”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또한 나에게 두신 하나님의 주권을 영접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시기함으로 뼈가 썩는 듯한 고통을 맛보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선한 주권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까지 끊임없이 영적으로 성장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을 때 자신도 불행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합니다. 특히 가까이에 있는 동역자를 불행하게 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자신도 기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앙 연륜이 성숙을 가져오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코 시간이 성숙을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어떤 고등학교 교장이 학교의 행정직에 자리가 나서 십년의 경험을 가진 한 교사를 그 자리에 승진시켰습니다. 그러자 다른 한 교사가 매우 기분이 상하여 교장을 찾아와 항의했습니다. "25년의 경험을 가진 나를 승진시키지 않고 왜 10년의 경험밖에 없는 그를 승진시켰습니까?" 이때 교장이 대답했습니다. "미안합니다만 당신은 잘못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25년의 경험을 가진 것이 아니라 1년간의 경험을 스물 다섯 차례 반복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초기의 신앙생활의 경험을 해마다 반복할 뿐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자들은 없는지요. 영적 성장은 연륜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입니다. 6:4-8절에서 저자는 성장하지 못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농사의 은유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성장하여 좋은 열매를 맺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된다면 그는 열매를 맺는 땅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을 부인하고 공적으로 그 분을 욕되게 한다면 그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이 되고 결국 저주를 받아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됩니다.  

II. 영혼의 닻 (6:9-20)

   지금까지 배교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저자는 이제 부드러운 음성으로 격려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9).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그들이 그 이름을 위해 성도를 섬겨 온 선행을 결코 잊지 아니하십니다(10). 저자는 각 사람이 시작할 때의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11-12). 소망이 실현되는데 방해되는 것은 게으름과 오래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은 사람을 쓸모없게 만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권면했습니다(롬 12:11). 신앙생활에 있어 오래 참는 것은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오래 참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합니다. 오래 참기만 하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반드시 약속을 성취해 주실 것인데 오래 참지 못해 일을 그르칩니다.

    저자는 13-15절에서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16-18절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확고부동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말의 확고함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보다 더 큰 사람을 두고 맹세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보다 더 큰 존재가 없으므로 자기를 두고 맹세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약속이 확실함을 보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자체가 확인이 필요없을 만큼 확실하지만, 사람들이 연약하기 때문에 믿음을 북돋우기 위해서 그 약속을 맹세로 확증하신 것입니다. 18절은 이를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여기서 두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이 약속을 맹세로 확정하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시고 또 맹세로 확정하시고도 만일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다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장차 멸망할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은 이 소망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만일 약속의 말씀이 상황에 따라서 변개되거나 취소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약속이 맹세로 확증되었고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을 줍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다 회전하는 그림자와 같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변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험한 세상에서 붙들고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뿐입니다.

   19-20절에서 저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마치 영혼의 닻과 같음을 말해 줍니다. 닻은 배가 폭풍우에 떠내려 가지 못하도록 바다 밑바닥에 내리는 갈고리와 같은 쇠덩이를 말합니다. 닻이 일단 바닷 속에 던져져서 바닥을 붙잡게 되면 배는 폭풍우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됩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마치 영혼의 닻과 같아서 인생의 폭풍우 가운데서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보장이 됩니다. 배의 닻은 바다 밑으로 내려가지만 영혼의 닻은 하늘 위로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선구자가 되셔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휘장 안에 있는 하늘의 지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게 됩니다. 이 소망은 어떤 인생의 폭풍우에도 떠내려가지 않게 하는 튼튼하고 견고한 영혼의 닻입니다. 닻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평소 잔잔할 때는 그 중요성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폭풍우가 몰아칠 때는 배의 안전여부는 닻이 얼마나 튼튼하고 견고한가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됩니다. 아니 오히려 이 소망이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데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폭풍우가 몰아칠 때 이 소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언제나 순풍을 달고 항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비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폭풍우를 만나기도 합니다. 질병의 폭풍우, 교통사고와 같은 사고의 폭풍우, 직장을 잃거나 부도가 나는 실패의 폭풍우를 만나기도 합니다. 최후에는 죽음의 폭풍우를 만나게 됩니다. 이런 폭풍우를 만날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는 영혼의 닻이 됩니다. 이 영혼의 닻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건설하신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튼튼하고 견고한 닻입니다. 지옥의 특징은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소망이 없을 때 절망하게 되고,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건설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소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산 소망입니다 (벧전 1:3-4). 이 소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아니합니다. 이 소망을 간직한 사람은 어떤 인생의 폭풍우가 불어닥치더라도 요동치 않고 그 심령은 잔잔한 호수와 같이 평온하게 됩니다. 이 소망 가운데 계속해서 영적으로 성장함으로써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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