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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히브리서 제 7 강
성경본문 히브리서 8:1-9:22
전한날짜 2018.10.21.
ㆍ조회: 204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2018년 히브리서 7 강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말씀: 히브리서 8:1-9:22
요절 / 히브리서 8:6  ‘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우리는 지난 주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이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 되시되 특별히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되심’ 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이것은 격이 달라도 이만저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 하여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사람은 죄인입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습니다. 결코 만날 수 없고 함께 엮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중보자가 되시어 이 무한한 거리를 이어주십니다. 그것도 결코 파기될 수 없는 언약을 세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견고하게 하십니다. 이로서 우리는 생명을 얻고 이 하나님을 ‘ 아바 아버지’하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언약으로 우리의 중보자가 되셨습니까?  
 
Ⅰ.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8:1-13)
 
8:1절을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We do have such a high priest. - 지금 예수님은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2절을 보면 이 대제사장은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십니다. 이 땅의 성소는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과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속죄하시고 하늘에 오르사 이제는 참 장막인 하늘 성소에서 섬기고 있다는 것인데, 이곳에 바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여기서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직분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도 직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 더 아름다운 직분’,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 더, 더, 더!  이것은 구약의 대제사장의 직분과 비교하며 한 말인데 이 말을 하는 히브리서 기자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에 대한 감동과 찬양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더 좋은 약속’하면서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이렇게 ‘더, 더,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십니까?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이 많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된 할례의 언약이 있습니다. 누구든 태어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언약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언약의 핵심사상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19:5,6 에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언약은 대제사장의 직분과 관계된 언약을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죄를 범했을 때는 주께 나와 소나 양으로 속죄제물을 드리며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하루 대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의 피를 뿌리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이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하며 언약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을 유지시켜주는 대제사장은 아름다운 언약의 중보자였습니다. 그런 만큼 하나님은 대제사장의 옷을 친히 디자인하여 갖가지 보석을 박고 순금 띠를 두르게 하며 아름답고 화려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옷은 아무나 입을 수 없습니다. 그 백성들이 백화점에 가서 피에르 가르땡, 구찌 옷을 마음대로 사입을 수는 있어도 이 옷은 결코 입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악해져서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말씀을 멸시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 제사를 드릴 때도 형식적으로 드렸습니다. 또한 주께서 주신 말씀을 버리고 우상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라고 외치게 했는데 돌아오기는커녕 듣기 싫다며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참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들 가운데 세워주신 대제사장의 직분은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백성이 이렇게 완악하므로 더 이상 하나님이 그들과 세운 첫 언약은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약을 계속 파기했고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돌봐주실 수 없으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들을 포기하고 무섭게 심판해 버릴 수도 있으셨습니다. “아유, 지겹다. 너희들은 근본이 썩어서 도무지 내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 내가 너희들을 선택해 내 백성 삼은 것이 잘못이다. 은혜도 모르는 놈들, 아이고 그때 홍해 물에 다 빠져죽게 해야했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과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대 집과 더불어 새언약을 맺으리라’ 9절 말씀에 나오는 대로 이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던 날에 그들과 세운 언약과 같지 않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 ” 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백성들의 죄를 보고 심판하시기보다 그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이번에는 새 언약을 맺어 그들을 자기 백성 삼고 복주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 이렇게 자신을 낮추어 계속 언약하시며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죄악된 자기 백성을 일방적으로 사랑하시며 그들을 구원하시는 참으로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8절과 10절에 나오는 ‘날이 이르니니’, ‘그날 후에’하는 말씀대로 하나님은 약속대로 때가 되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게 하셨고 이제 새언약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새 언약 속에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 새 언약과 어떤 점에서 옛 언약과 다름니까?

첫째, 이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마음에 기록되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돌판에 새겨주셨습니다. 돌판에 새기면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계명을 늘 보고 지킬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이 말씀에서 떠나 우상숭배하고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들은 도무지 하나님의 백성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번에는 법을 그들 생각에, 또한 마음에 새겨주셨습니다. 그들은 과거와 같이 돌판을 보지 않아도 생각할 때마다 말씀이 떠올랐고 마음을 쓸 때마다 하나님의 법을 기억하고 이에 따라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아주 부드러워졌습니다. 이로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날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면서 늘 하나님을 깨닫고 행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 역시 말씀의 성취입니다. 이에 관해 일찍이 에스겔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디도서 3:5에서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따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당신 백성의 마음에 성령을 부어주셔서 언약을 기억하고 언약 가운데서 살게하시는 것이 이 새언약의 특징입니다. 사람이 결혼을 하면서 서로 하나님 앞에서 부부가 되었음을 서약할 때 바로 그때부터 ‘나는 누구의 남편이야’, ‘누구의 아내야’하는 의식이 마음에 딱 새겨집니다. 부부는 결혼 서약서를 읽어보고 “아 참 우리가 부부였지. 깜빡 잊고 있었네”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마음에 새겨진 언약 때문에 일생 부부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들 때는 짐을 함께 나누어지고, 기쁠 때는 함께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더러는 좀 속상할 때가 있어도 그래도 내 남편이고 내 아내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가수 하춘하가 부른 ‘잘했군 잘했어’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 마누라, 왜 불러요, 외양간 메어 놓은 얼룩이 황소를 보았나. 보았죠, 어쨌소. 친정집 오라비 장가들 밑천으로 주었지~ ’ 이때 아니, 그래? 하고 화낼만 하지만 ~ 그러게 내 마누라지, 그러게 내 영감이지 ~~ 이래도 내 남편 저래도 내 아내인 것이 부부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와 이것을 통한 죄사함을 믿을 때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마음에 언약을 새겨 넣으시며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요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라’하고 말씀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당신의 백성입니다’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어느 때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것은 구약시대의 돌판에 새겨진 언약과 비교될 수 없는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로 새 언약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하나님은 아는 지식에 충만하게 합니다. 과거에는 누군가가 성경 선생이 되어 하나님의 법을 가르쳐주어야 깨닫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선생이 없어 말씀를 가르쳐주지 못할 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아모스서를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 나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 8:11-13). 그런데 새 언약에 의하면 어떻습니까? 11a절을 보십시오. 이제는 누가 누구를 가르치며 ‘주를 알라’하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이제 성경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우리들의 성경 선생이 되어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감동을 더 해준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만나고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므로 그들이 예배에 나오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 살아가게 하십니다.  

저는 주일 아침에 BBF 예배실에서 흘러나오는 아멘 소리와 어린이 찬양 소리를 들을 때 뜨거운 성령의 감동을 느낍니다. 이때 하나님이 어린이들 마음에 친히 역사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앞에서 김현유 목자님, 권대장 목자님 등 우리 목자님들이 열심히 말씀과 찬양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재미있게 듣고 따라합니다. 수요일 어린이 찬양 예배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어린이들이 목자님들이 가르쳐주고 피아노로 예쁘게 반주해주니까 신나서 찬양을 하고 기도하는 것일까요? 어린이들이 듣고 ‘아멘’하고 율동을 하는 게 그냥 다른 것보다 재미있어서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떻게 가르친다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아이들이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 대로 하나님이 큰 자에게 그렇게 하시듯 아이들 마음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어 성령께서 가르치며 역사하시어 하나님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더러는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르치고 섬기되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아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감동의 찬양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언어와 민족을 초월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은혜를 큰 자에서부터 작은 자에게까지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은 우리가 가르쳐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 이것이 새 언약의 축복입니다. 사도행전에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셋째로 하나님은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하나님은 더 이상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남편이 다섯이나 있는 사마리아 여인도 하나님 나라 황공주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물 좀 주시겠습니까?” “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4:14)” 세리 삭개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또한 세리와 창기와 함께 음식을 먹으며 대화하는데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허물이 많습니까? 그러나 새언약의 중보자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이제는 더 이상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난다는 사람의 말을 듣고 그걸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에게 “다음에 예수님을 또 만나거는 나와 예수님만 알고 있는 죄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걸 맞추면  당신이 정말 예수님을 만난 것을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더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환상 속에서 예수님을 자주 만난다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죄가 기억이 안아!’  저도 과거에 정욕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던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죄 문제는 참으로 인생의 큰 고통이고 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저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나는 내 죄를 기억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아무것도 기억 안나! 하시며 더 이상 지난날의 나의 죄 문제로 나를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로 다 씻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감사와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 가운데 충만합니다. 우리의 아무 죄도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견고하게 세우신 새 언약 때문에  우리 가운데 그 효력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모든 것은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님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된 것은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옛 언약이 필요합니까? 13절을 함께 읽어 볼까요?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첫 것, 옛 언약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과는 달리 우리를 완전히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직분은 이렇게 더 아름답습니다. 이 예수님은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Ⅱ. 새 언약의 피 (9:1-22)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습니까? 구약의 대제사장 직분도 소중했습니다. 이들도 언약의 중보자였습니다. 9:1-9절까지는 구 언약의 제사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 장막, 즉 성소에는 등잔대, 상, 진설병 등이 있었습니다. 둘째 장막, 지성소에는 금향로, 언약궤, 금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십계명 돌판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항상 성소에서 제사 드리고 지성소에는 홀로 일 년에 한번 들어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피’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 자기의 죄를 깨끗이 씻고 백성들의 허물을 사하는 예식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아무리 열심히 제사를 드려도 양심을 깨끗케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짐승의 피를 뿌리며 제사법을 따라 먹고 마시고 여러 가지로 씻는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체의 예법일 뿐입니다. 이 말은 이런 것은 죄에서 온전히 구해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이런 제사제도가 계속되어야 할까요? 10b절를 보십시오. 과거의 제사제도는 개혁할 때까지 임시로 맡겨둔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 이 개혁은 이루어졌습니까? 사람이 온전히 죄사함을 받을 수 있도록 제사가 바뀌었습니까?

11, 12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여기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이란 구약의 제사가 한계가 있는데에 비해 온전한 죄 사함과 구원을 이루는 더 좋은 대제사장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을 지으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제사제도와 같이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않고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나 성소에 단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실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운명하시는 바로 그때, 예루살렘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기어졌습니다. 오직 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씩 나갈 수 있었던 지성소로 가는 길이 환하게 열린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단번에 나갈 수 있는 성소와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있는데 무슨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죄사함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게 되었는데 더 이상 하나님께 나가는데 거리낄 것이 없습니다. ‘깨끗한 양심’ 이 말은 듣기만 해도 설레이는 말입니다. 사람은 양심에 살고 양심에 주는 존재입니다. 양심이 더러워서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양심이 깨끗하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운 것이 없다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깨끗한 양심을 갖게 된 구체적인 축복이 무엇입니까?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 것’,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성탄공부를 할 때 누가복음21장에서 제사장 사가랴의 찬송시를 배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켰으니 ... 우리가 원수의 손에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 구원의 가장 큰 특권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았으니 무엇을 하며 살겠습니까? 이 은혜가 너무 크고 감동적이라 시시한 세상 낙이나 누리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기에는 이 구원의 은혜가 너무 아깝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좀 당장에 손해 보는 것 같고 좀 더 힘들어도 더 거룩하고 고귀한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피로 죄 씻음 받은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도 고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기이한 빛의 복음을 전하라고 세움받은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가 헛된 세상 일에 빠질 수 없습니다. 박신영 자매님은 주일 찬양을 섬길 때 잘 모르는 찬양이면 전날 밤 센터에 나와서 열심히 반주 연습을 합니다. 이 다니엘 형제님은 공부하느라고 바쁘지만 학생회 회장으로서 좀 스트레스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마음을 다해 학생회를 섬깁니다. 장다윗 형제도 첼로로, 김주은 자매는 트럼펫으로 주일 오케스트라를 섬기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런 일을 아무나 합니까? 다 주께서 주신 피로 이루어주신 성결한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삶에 생명의 열매가 가득하며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상급도 크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높이 찬양합니다.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나가 ‘아바 아버지’리고 부르며 하나님 나라를 영원한 기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가 확실합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유언은 유언을 한 자가 죽은 후에 효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새 언약의 효력이 우리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우리는 확정된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그 나라 백성이 되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찬란한 기업을 마음껏 누리며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할 것입니다. 저는 내가 언젠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약속하신 기업을 누리며 살 것을 생각하면 항상 가슴이 설레고 기대됩니다. 고린도후서 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신령한 몸을 가지고 영혼의 고통이 없이, 오히려 기쁨이 충만하여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누릴 것을 생각하면 이 하나님나라가 기대되어집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자랑하며 누리고 있는 것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누릴 것의 온전함에 비하면 참 초라한 것일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새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소망을 그리스도의 피로 확증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더 좋은 중보자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잘 누리며 살아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님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성령의 은혜 가운데서 충만히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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