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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히브리서 제 9 강
성경본문 히브리서 10:19-39
전한날짜 2018. 11.11.
ㆍ조회: 195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2018년 히브리서 제 9 강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
말씀: 히브리서 10:19-39
요절: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는 지금까지 히브리서의 교리적인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유대민족의 제사제도와 제사장에 대해서, 그리고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로서 우리들을 위한 큰 대제사장이 되시고, 또한 자기 몸을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로 단번에 드려셔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신다는 것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큰 은혜요 감사가 됩니다.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주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의 마땅한 삶이 일어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이제 담대하게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19, 20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웠습니다. 죄의 장벽이 그만큼 높아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아주 두꺼운 휘장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오직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만 속죄의 피를 들고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이 찢겨지고 피 흘려 죽으실 때 그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완전히 찢어졌습니다(마27:51). “휘장은 곧 그의 육체라” 예수님이 이렇게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살 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the new and living way’ 이 길은 원래 없었는데 새롭게 생겼습니다. 이 길은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그런데 과거와는 달리 하나님께 나가는 이 길이 직선고속도로 뚤리듯 확 뚤렸습니다. 이 고속도로에는 톨게이트가 없습니다. 예수님만 믿으면 누구든지 free pass입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만날 수 있습니까? 내가 아무리 아쉬워도 어딜 마음대로 나갑니까? 대통령이 오라고 하기 전에는 못나갑니다. 또 오라고 해도 들어가려면 얼마나 복잡한지 모릅니다. 신원조회하고 소지품 검사하고 pass 명찰도 달아야합니다. 옷도 잘 입고 전염병 없는가도 다 검사합니다. 가라고 정해진 동선을 따라 가야하고 경호원들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대통령 한번 만나고 오면 영광이라고 두고두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창조주십니다. 거룩하신 최고의 권세자이십니다. 전능하십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원하시는 대로 들어다 놓았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피가 묻은 pass를 가슴에 달면 바로 나갈 수 있으니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럽습니가?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천군 천사들도 우리를 막지 못합니다. 우리가 들어가면 오히려 비켜서서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천사와 급이 다릅니다.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입은 자요 예수님의 형제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어딜 감시 천사가 ‘안돼!’ 하면서 나와 막습니까? 21절의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은 바로 우리의 구속주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이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데, 우리가 예수님께 나가는데 이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청와대 들어가려면 정해진 시간에 약간의 시간만 만날 수 있지만 우리 주님께 나갈 때는 장소도 문제가 안되고, 아무 때나, 새벽이든지, 밤샘으로 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모든 것이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하나님께 나가려고 할 때 자의식이 좀 들기도 합니다. 말씀대로 담대히 나가려고 하니까 마음에 캥기는 것이 있습니다. 자꾸 죄가 생각납니다. 벼륵이도 낮짝이 있다고 우리에게도 죄의식, 죄책감이 있습니다. 사실 죄 지은 것도 많아 정죄의식이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려니 자꾸 생각해보면 도무지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께 나가는 것은 은혜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원조회서나 이력서 들고 나가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그 피를 믿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피를 온전히 믿습니까? 그러면 담력이 생깁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께 나가는데 무슨 걸림이 있습니까? 자의식, 두려움, 걱정 - 고민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뽕나무 위에 앉아 있는 삭개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때 삭개오가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 저는 세리인데요. 저 같은 죄인이 어떻게 감히 주님께 나갑니까?” 하면서 뽕나무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면 그에게 영영 구원이 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자의식을 버리고 순종해서 아멘 하고 담대하게 속히 내려왔기 때문에 바로 그에게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둘째 아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달려가서 입을 맟추고 품어 주는데, “아버지, 아니 주인님, 제가 탕진한 돈을 다 변상할 때까지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을께요” 하고 말하면 아버지가 좋아하겠습니까? 염치없지만, 자격없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아버지~” 이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행위나 업적이 아닙니다. 뭐 갚으라는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갚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 이루었다’ 그러므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가면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십니다. 진실된 마음으로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하세요. 고백 안하는게 문제지 잘못한 거 잘못했다고 하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히시겠습니까? 우리를 위한 큰 제사장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양심이 깨끗해지니까 이제는 확신을 가지고 온전한 믿음으로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언약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입니다. 아버지와 딸 사이입니다. 아들이 “아빠 오늘 점심에 쭈꾸미 먹으러 가요” 하면 아빠는 좀 싫어해도 아들이 원해서 “그래, 그래” 하고 가줍니다. 딸이 “아빠, 오늘 조스 떡볶이 먹으러 가요” 하면 좀 멀고 이 나이에 좀 그렇지만 “어, 그래.. 나도 먹고 싶었는데” 하고 갑니다. 그러면 딸은 아빠 팔짱을 끼고 신나게 갑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이런 거에요. 그러니까 그 사랑과 은혜를 온저히 믿고 나가면 됩니다.

어떻든 참마음과 믿음만 가지고 나가면 됩니다.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아버지가 도와주십니다. ‘주여~ ’하고 부르든지, ‘아버지~’ 하고 부르든지 하여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가면 들어주십니다. 우리 마음에 한없는 위로와 희망을, 사랑과 감동을, 그리고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길을 제시해주시고 함께 걸어가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을 부어주십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오셔서 피를 흘리신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 아닙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주께 잘 나가지 않는 사람은 뭔가가 잘 안됩니다. 될 듯 될 듯 하면서 안 되고 뭔가가 아무일 없이 잘나갈 것 같은데 뭔가  자꾸 꼬여가는 것 같습니다. “아, 하나님은 왜 안도와주시는 거야” 하고 원망하는데 그런다고 됩니까? 대체적으로 하나님께 나가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 원망하면서 하나니이 자기를 안도와주신다고 불평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기도하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이 축복의 통로인데 기도 안하겠습니까? 자기 생각과 계획으로 사니까 예수님은 안보이고 하나님께 원망만 하는 것입니다.
 
23절에 보십시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고”주님은 신실하십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고 주님께 나가면 됩니다. 믿음의 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의지해서 진실된 마음와 온전한 믿음으로 나가 기도하고 도우심을 바라고 의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구원의 잔치, 생명의 밥상을 차려놓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이제 우리가 소망 가운데 주님의 초청의 장에 담대히 나가 주님을 만나고 그 충만한 은혜를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로서 주님과 함께 하는 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로, 성도들끼리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24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앞의 말씀은 우리가 위로는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힘써야 한다고 했다면 이번에는 옆에 다른 사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당시 히브리 성도들은 주변에서 많은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갈등도 있고 불신도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동족들에게 외면 받는 그들은 외로웠습니다. 이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서로 돌아보아 사랑하고 격려해주는 것입니다. 동역자들에게 사랑받으면 마음의 외로움, 고통이 사라집니다. 힘을 내서 믿음의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난 속에 있는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방향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불신의 세상을 사면서 외롭습니다. 고독합니다. 이때 성도들끼리 서로 돌봐주면 마음에 힘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옆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은 좋아보입니다. 열심히 기도도 하고 성경도 잘 읽고 예배도 잘 오고 헌금도 잘 내는데 교회 안에 형제자매들과는 관계가 안좋습니다. 그들에게 무심합니다. 이렇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우리 주변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아내를, 남편을, 자녀들을 돌아보고, 센터에서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돌아보고, 양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떤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신앙생활도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서로 돌아보고 사랑해주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말씀을 보고 성경에 이렇게 써 있는데 왜 나를 돌아보지 않는가 하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내가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나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고 사랑이 없다느니 무관심하다느니 하면서 지적하고 싸우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돌보지 않고 다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쁜 놈들, 날 버리고 가다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다만 그들을 감당하고 돌봐주셨을 뿐입니다. 그들이 두려움 속에서 방황할 것을 아시고 부활 후에는 찾아가 주시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만나시고 다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고통 중에 계실 때도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제자에게 돌봐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것이 주가 가신 길이면 우리도 이것을 배워야합니다. 사로 돌아보아 사랑하고 격려하는 것. - 이렇게 하면서 주의 말씀을 이룰 때 우리 마음에 오히려 은혜로 풍성해집니다. 이런 사람은 남이 자기에게 돌보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남을 더 돌보지 못한 것이 마음 아플 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돌보면 힘이 납니다. 힘든 현실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굳굳히 지내는 동역자들을 돌보고 격려해주면 상대방이 얼마나 힘을 얻겠습니까? 이렇게 서로 돌보면 그 공동체가 강해집니다. - 살아납니다. 생명력이 풍성해지고 감사로 하나가 됩니다.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은 많은 시련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당하고 공회에서 재판을 받고 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했습니다. 스데판 집사는 돌에 맞아죽었습니다. 터어키 갑바도기아에는 믿음 때문에 성도들이 피해 살던 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목숨 걸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상황 아닙니까? 그러나 이들은 이때 서로 돌아보며 사랑하고 기도하면서 함께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전도서 4: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했습니다. 사랑하고 돌보면 누구 끊을 수 있겠습니까?
 
셋째, 이제는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25절에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모여야 합니다. 모여서 서로 대화하고 서로의 소식을 알아보고 하나님 역사를 위해 기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바쁘고 피곤해서 모일 시간이 많지 않고 모이라고 하면 부담스러워합니다. 80년대는 학생 중심의 역사여서 학생들이 잘 모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많은 분들이 바쁩니다. 자녀들을 돌보는데 학원보내고 숙제 도와주어야하고 저녁이 바쁩니다. 직장에서 돌아오면 피곤합니다. 그래서 모이는 것을 생략합니다. 그래서 무슨 모임을 하려고 하면 잘 모이지 않습니다. 말씀에 나오는 어떤 사람처럼 모임에 안나오는 것이 습관이 된 분도 있습니다. 별로 할 일도 없는데 습관이 그래서 안 나옵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도 힘이 빠질 뿐 아니다 동역자들도 힘이 빠집니다. 동역자들이 자꾸 모여야 서로를 알고 기도하며 힘이 나는 건데 이게 모임이 썰렁해지면 스피릿도 안생기고 있던 믿음도 사라지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모여서 합심해서 기도하면 거기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있고 능력이 나타나고 각 사람이 행복해집니다. 모이는 것이 내 시간을 빼앗기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얻고 더 풍성해지고 능력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사도행전 1:14절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46,47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했습니다. 초대교회에 그 힘들고 핍박이 많은 가운데서도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던 것은 이렇게 모이기를 힘쓰고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나무토막 하나는 혼자 불이 붙으면 별 효력이 없습니다. 그것로는 라면 끓이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그런 나무토막이 모여서 함께 타보세요. 온 방이 환해지고 뜨거워집니다. 은혜가 100배, 천배입니다. 모여서 기도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성령의 불꽃을 모으며 함께 폭발시켜 큰 능력의 역사를 이루는 길입니다. 나도, 모임도 재 충전되고 다 함께 살아납니다. 우리가 시대가 힘들다, 내 형편이 좀 그렇다 하며 가급적 안모일 구실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함께 모여 보세요. 모임에 능력과 하나됨이 힘차게 이루어지고 가정이 살고 아이들이 복되게 성장합니다.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나 힘든 제자 양성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의 약점은 모이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도 그대로고, 건물도 그대로입니다. 사람도 그대로입니다. 모이는 것이 바뀌었습니다. 모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여서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그러면 각 사람이 10배, 20배, 100배의 스피릿과 능력을 얻어 능력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함께 모여서 서로를 위로하고 기도하므로 견고한 성령의 그릇을 이루고 이 시대를 감당하고 섬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넷째로,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26,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진리를 아는 지식이란 복음을 가리킵니다. 복음에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 복음의 진리가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이것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을 체험하고 짐짓 죄를 범한다. 다시 말해 고의적으로 죄를 범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서운 심판 뿐입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예수님이 우리 죄를 속하시기 위해 얼마나 값진 댓가를 지불하셨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53:5)” 예수님이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고난을 감당하셨는데, 고의적으로, 반복적으로, 보란 듯이 죄를 짓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이 어디가서 자기 죄를 속죄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만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너무 쉽게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30,31절에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소외되고 뒤처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는 내가 받은 구원을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고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히12:4).
 
다섯 째로, 뒤로 물러가지 말고 믿음으로 인내하라고 합니다. 32절을 봅시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그들이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 고난의 큰 싸움을 잘 견디어 냈습니다. 비방과 환난, 사람들의 구경거리, 고통도 잘 감당했습니다. 옥에 갇히고, 소유를 빼앗기는 아픔도 잘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믿음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상급을 놓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35,36절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장차 하나님이 주실 큰 상급을 바라볼 때 중심을 지키며 가는 길이 어려워도 인내하면 결국에 승리합니다. 인내란 쉬운  일에 적용하지 않습니다. 인내는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혹독한 유혹과의 싸움입니다. 총을 들고 고지 훈련을 받는 군인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가파른 산을 올라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참고 참고 또 뛰어 올라왔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총이고 뭐고 ‘이놈의 총’하고 확-  던져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때 조교가 약진 앞으로 하고 재촉하는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그 순간을 못 넘기고 정말 던져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영창을 가든지 하여간 큰일 납니다. 군인이 아무리 힘들다고 충을 버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또 달려가다보면 마침내 고지에 오릅니다. 우리 신자가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면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가야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믿음이 너무 힘들다고 중간에 몰라 하고 믿음을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예수님을 만나보세요. 너, 내가 준 믿음은 어디에 버리고 왔니? 이런 사람은 예수님이 도와주실수도 없고 상을 줄 수도 없습니다. 총을 버린 군인에게 누구 무엇을 주겠습니까? 다만 부끄러움과 수치만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인내하는 사람은 영혼을 얻습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21:19절에서 “너희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38,39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로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뒤로 물러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의 자동차에는 후진 기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앞에 계신데 후진이 왜 필요합니까? 아무리 어려워도 확신 가운데 앞으로 나가는 것.-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로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에게 가장 큰 특권을 받은 자요, 가장 큰 기회와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으로 격려하며 모이기에 힘쓰며 하나님의 상급에 합당하게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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