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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히브리서 제 12 강
성경본문 히브리서 12:1-29
전한날짜 2018.12.09.
ㆍ조회: 195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 장
                                       예수를 바라보자
말씀: 히브리서 12:1-29
요절: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이제까지 예수님이 우리의 참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때를 따라 돕은 은혜를 얻기 위해 어느 때든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 간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세워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믿고 나갈 때 불신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은 인내가 필요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11장에서는 이런 믿음의 본을 보인 조상들에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말합니다. ‘예수를 바라보자’입니다. 보통은 ‘예수님을 믿어라’하고 말하는데 여기서는 ‘바라보자’이렇게 말합니다. 뭔가 다르긴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그 말이 그 말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라보자’하는 이 말은 히브리서 문맥상 이해하면 예수님은 단순히 믿는다는 말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믿음의 경주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바라보자’하는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Ⅰ. 믿음의 경주(1-13)
1절을 같이 읽어 봅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여기서 말하는 허다한 증인들이라 바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이들을 ‘증인’이다 하고 말했는데 여기에는 ‘순교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자기 목숨을 잃을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이 우리를 구름같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지금 믿음의 경주를 하며서 많은 고난에 처해 있는 히브리 성도들에게 힘내라고 응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형제님 힘내세요. 나도 그때 아주 참기 어려웠는데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자매님도 힘내세요. 나같은 사람도 이겨냈어요’ 이런 허다한 증인들의 응원을 들으면 힘이 나지 않을까요? 집에서 해보세요.  ‘아들아,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예, 아빠도 힘내세요’  이럴 때 서로 힘이 나는 겁니다. 오고가는 응원 속에 싹트는 믿음! 그러면서 우리의 믿음의 경주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갖추어야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첫째,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마라톤 경주를 하는 사람은 가벼운 샤츠와 팬츠만을 입고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달립니다. 경기를 하는 사람이 두꺼운 오바코트나 군화를 신지 않습니다. 경기에 부담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합니다.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은 바람과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복장을 입고 그것도 결승점에 가까울 때까지는 앞에 나서서 공기저항을 다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저항을 최소한으로 하고자 두 세 번째로 뒤에 달리면서 앞 선수 뒤에 바싹 붙어 달며 조금이라도 더 체력을 아끼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할 때 무거운 것이란 무엇일까요?  특별히 히브리 성도들에게는 유대의 율법적인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믿음과 은혜로 하는 것인데 이것을 버리고 율법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한다면 의도야 좋지만 율법의 짐에 눌려 힘든 경주를 하게 됩니다. 또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장래 걱정, 근심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있으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제대로 달려갈 수 없습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는 정욕, 물질적인 탐욕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움과 원망, 복수심에 얽매여서 도무지 앞으로 달려가지 못합니다. 이런 식이라면 마음이 무거워 인생 경주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다 털고 가자’하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가야하는데 계속 그런 것을 문제 삼고 서로 얽매이고 다투기나 해서야 어떻게 한 발이라도 나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털고 가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고 털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은 것으로 쓸데 없는 소모전을 하면 안됩니다.  회개할 것 다 회개하고 마음의 있는 원망과 미움, 교만한 마음을 다 털어버리면 발걸음도 가볍게 마음도 가벼워 믿음의 경주에서 앞으로 질주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말씀 안에서 방향잡고 회개하고 기도하며 나갈 때 죄가 털려나갑니다. 죄를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경주는 오래 달리기 마라톤과도 같습니다. 마라톤은 42.195km를 달리는 긴 레이스입니다. 대개 10km와 35km 지점이 고비인데 이 지점에 다다르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이 오고 더 이상 달려가고 싶지도 않고 발도 잘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때 필요한 것은 죽음을 각오한 인내입니다. 죽을 것같지만 죽지는 않습니다. 이때를 잘 넘기는 사람은 완주합니다. 저는 20대 초반에 새벽마다 달렸습니다. 5시에 일어나 왕십리에서 천호대교까지, 잠실대교까지 달렸습니다. 해병대도 아니면서 해병대 티를 입고 폼잡고 달리는데 아무리 그래도 날마다 힘든 점이 있었습니다. 천호대교 쪽으로 가면 워커힐 가는 언덕길을 넘을 때는 죽을 것 같이 힘들었습니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내가 뭐 마라톤선수할 것도 아닌데 하는 유혹이 강렬하게 일어납니다. 그래도 이때 걷다시피 해서라도 가면 어느 순간에 그 고비를 냄기고 계속 달릴 수 있었습니다. 새벽마다 대문을 나서면 그 힘든 지점이 생각나면 ‘오늘도 뛰어야하는가’ 하지만 그래도 뛰었습니다. 거기서 인내를 배웠습니다. 정말이냐구요. 우리 어머님이 증인이십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공부는 출발 때와는 달리 어느 시점에 다다르면 너무 힘들고 다 하기 싫습니다. 이때 괜히 나는 체질이 아니야 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때 잠시 누워 쉬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일어나 그 지점을 통과하면 또 앞으로 열심히 나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참고 참고 하면서 큰 시험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때 말합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메시지를 쓸 때도 처음 두 세 페이지 쓰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어느 지점에 오면 가슴에 무거운 돌을 얹어놓은 듯 힘듭니다. 그러나 이때 인내하면서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할 때도 힘드니까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외롭고, 힘들고, 유혹이 있고, 핍박이 있고, 결과도 좋을 것 같지 않을 때 그만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때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는 열매의 법칙입니다. 단번에 맺히는 열매란 없습니다.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가뭄, 긴 장마, 오랜 시간동안 매미 소리를 들고 찬바람 맞으면서 긴 인고의 시간이 지나가야 열매가 얻어집니다. 시련을 통과하지 않는 열매는 없습니다. 믿음의 시련을 이기지 못하는 상급이란 없습니다.

셋째, 예수를 바라봐야 합니다. 물론 11장에 나온 믿음의 선진이 우리의 본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이 최고의 본이 되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히 믿는 그 믿음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신 것을 보고 베드로가 와, 예수님 말씀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고 놀라며 예수님을 부러워하자 이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이지 나라고 해서 특별히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도 하나님을 믿어라, 그러면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믿음을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믿음을 완성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를 영접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온갖 멸시, 조롱, 고통이 있었습니다.그러나 부활을 믿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의 처참한 죽음도 감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죽으면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으니 말입니다. 이 예수님은 부활 후에 창세 이전에 누리고 있던 그 영광 속으로 다시 들어가실 것도 온전히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원하신 모든 믿음을 이루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 2b절을 보십시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믿음의 경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피곤하고 나ᅟᅵᆨ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길이 아무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라고 하지만 많은 반대와 조롱과 마음의 고통을 겪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도 믿음의 선진이나 예수님이 가신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와 가치관이 현격히 다른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어떻게 고난이 없겠습니까? 자연히 물질의 손해, 건강의 손해, 명예의 손해, 지위의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당장 나타나는 열매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때 우리는 십자가름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이런 것에 개의치 않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에서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라’는 말은 영어로 ‘Fix your eyes on Jesus’입니다. 우리의 눈을 오직 예수님께만 고정시켜야 합니다. 다른 것을 바라보며 한눈 팔면 힘들어집니다. 사격선수들을 보면 보다 표적에 집중하기 위해 선 그라스에 밖의 시야를 가려주는 까만 가림판을 부착하기도 합니다. 그래야 반사빛도 막고 과녁을 정확히 마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우리 눈 좌우의 불필요한 시야를 가려주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바로 예수님께만 눈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믿음과 인내, 그 승리를 생각하면서 믿음의 경주를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4절부터는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할 때 실제적으로 부딪치는 죄와 어떻게 싸워야하는가를 말해줍니다. 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죄는 얼마나 끈질기고 악착하고 힘이 있는지 우리가 이것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라 가는 과정에 내 안에 일어나는 온갖 죄악된 생각, 욕심, 정욕, 물질에 대한 탐욕, 미움의 세력, 그리고 외부로부터 오는 조롱, 고통, 멸시, 천대... 이 모든 것이 세상 죄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과 싸워야합니다. 싸우되 중간에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피 흘리기까지 대항해 싸워야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우리와의 싸움에서 막판에 피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믿음 때문에 옥에 갇힌 사람들이 중간에 너무 힘드니까 포기하고 타협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막판까지 믿음을 지키고자 한 사람들은 온갖 회유와 함께 가혹한 고문을 받고 피흘리고 죽어갔습니다. 예수님도 실제 그렇게 죄와 싸우시되 피 흘리며 죽으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죄와 싸우되 얼마나 철저하게 싸워야하는가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죄와 온전히 싸우지 못할 때 하나님의 징계도 받습니다. 징계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는 영적 훈련입니다. 이때 징계가 있을 때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합니까? 5b절을 보십시오. ‘ ... 내 아들이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8절을 보십시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친자녀같이 사랑하시니까 그런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사랑하는 자식은 매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야곱도 복의 근원이 되기까지 인생 채찍, 사람 막대기로 많이 맞았습니다. 우리말에 맞어야 정신을 차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입니다. 고난을 겪으면서 생각하고 깨닫습니다. 이 징계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지만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간절히 바라시며 작정하십니다. 찬송가 170장 3절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를 거룩하게 하려/ 주 나를 부르니/ 주의 은혜 내게 넘쳐/ 주 뜻을 이루리.’  징계는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보입니다. 그러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거룩에 참여하며 결국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 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드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마라톤을 하다보면 어느 지점에서 힘들고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고 또 힘이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손과 무릎에 힘이 빠지고 더 이상 곧곧하게 달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믿음의 경주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만 하고 싶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 그 사랑에 감동이 오고, 그러면 힘을 내 다시 일어나 앞을 향해 달려갈 수 있습니다. 이은상 선생님의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하는 시가 있습니다.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 넘어지고 깨어지고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둥켜안고/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새는 날/ 피 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이 시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마지막까지 힘을 내게 하는 시였습니다. 힘들면 다들 ‘고지가 바로 저긴데’하면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상급의 결승 라인을 고지 삼아 이것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연약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세워 앞으로 나가야하겠습니다. 우리가 푯대를 향해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는 믿음으로 달려나가는 믿음의 경주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  

Ⅱ. 권면과 경고(14-29)  
그러면 이런 믿음의 경주는 담당하는 성도들의 윤리는 어떠합니까?
첫째,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함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앞만 보고 달려가다보면 옆의 사람에게 무관심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힘들면 사람이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그러다가 싸웁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마음을 넓혀서 모든 사람과 화평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성숙입니다. 우리가 이웃과 화평하지 못하면 거룩을 잃고 마음에 쓴 뿌리를 품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괴롭히게 됩니다. 이렇다면 주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신자 윤리의 양 날개와도 같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지 않습니까?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세상 모든 것보다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16절을 보면,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고 했습니다. 에서는 배 고프다고 장자의 명분을 동생 야곱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25:32)” 아니 그까짓 팥죽 한그릇 못먹는다고 죽습니까? 장자의 명분은 하나님 축복의 통로인데 이것을 헌신짝 취급했으니 하나님이 어떻게 그에게 믿음의 유업을 맡길 수 없었습니다. 에서는 나중에 이 축복을 되찾고자 눈물을 흘리며 구했지만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는 마음의 쓴 뿌리가 생겨 동생 야곱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육신의 소욕과 싸우고 절제하면서 신자의 정체성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복음신앙과 영적인 순결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뉴스를 보면 이런 정욕의 죄가 끊임없이 보도되어 나옵니다. 어제는 골프장 케디를 성추행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한 도지사가 이런 문제로 모든 명예도, 권력도 다 날려버렸습니다. 물질에 대한 탐심도 참 무섭습니다. 뉴스에 소위 ‘해 먹은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우리가 망령된 자가 되지 말고 거룩한 영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축복을 귀하게 여기는 충만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18-29절은 우리가 반드시 믿음 중심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말해줍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불붙는 산과 침침함, 흑암과 폭풍, 나팔소리, 말하는 소리로 임재하셨습니다. 모세도 두려웠습니다.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여기는 엄위한 율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자리는 어떻습니까? 22-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이곳은 시내산 보다도 더 거룩하고 완정합니다. 그러나 이 시온산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두려움없이 나갈 수 있는 은혜의 산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은혜로 나갈 수 있다고 해서 이것을 가볍게 여기만 안됩니다. 이 은혜는 우리가 경건과 두려움으로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신 이 은혜를 함부로 여기고 배반하면서 아무 일 없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땅이 진동했습니다. 그러나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땅만 아니라 하늘이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흔들려 무너질 것은 다 무너져버리고 망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종 은혜의 나라를 이땅에 이루시기 전에 한번 심하게 흔드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신앙이 진실된 것인지 흔들어 시험하십니다. 이때 은혜로 구원받은 것은 소중히 간직하고 주의 경고하심을 따라 겸손과 믿음으로 인내하며 살아간 사람들은 이때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라고 했습니다. 이 불시험과 불의 심판을 통고하는 믿음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함으로 은혜를 받고 이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라’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믿음을 위해 기도해야하겠습니다. 이것만이 시련과 유혹을 이기고 죄를 이기는 비결이고 하나님 나라, 곧 시온에 안전히 도달할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자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영접하고 범사에 믿음으로 주님 한분을 바라보며 이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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