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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히브리서 제 13 강
성경본문 히브리서 13:1-25
전한날짜 2018-12-30
ㆍ조회: 330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
2018년 히브리서 제13강
말씀 / 히브리서 13:1-25
요절 /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

지난 한 해도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감사와 아쉬움의 일들, 기쁘고 슬픈 일들을 뒤로 하고 2018년을 보내는 마지막 예배의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예배는 한 해를 감사하며 보내는 송년예배요 지난 가을부터 이어진 히브리서의 마지막 자리입니다. 예수님으로 시작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았으니 이제 예수님으로 한 해를 매듭짓고자 합니다.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가득한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대한 서신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예수님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입니다. 이 예수님은 천사보다 뛰어나고, 모세보다 뛰어나며, 율법보다 뛰어난 분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보다 뛰어난 분입니다. 이 예수님 한 분만 소유하고 있다면, 한 해를 보내는 이 때 우리는 감사하고 흡족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구원의 완성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열을 좇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신 대제사장입니다. 이로써 인간 대제사장과 짐승의 제물로는 한계적이었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로써 하나님께 이르는 새롭고 산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구원의 완성자이십니다. 성도들은 이 예수님 안에서 고난 가운데서도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힘차게 해나갈 수 있습니다.

   1장에서 12장에 이르는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기초로 마지막 13장에서는 성도의 몇 가지 삶에 대해 말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 결혼을 귀히 여기라, 돈을 사랑하지 마라, 너희를 인도한 사람들을 본받으라, 거짓 교훈에 속지 말라,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영구한 도성을 찾자, 찬송의 제사를 드리자, 선행을 행하라 등 대략 아홉 가지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부탁하고 찬양을 한 후 문안인사로 끝맺고 있습니다. 이제 이 아홉 가지 신자의 윤리 중 전반부 네 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으로 히브리서와 2018년을 끝맺고자 합니다.

먼저,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라 말합니다.
   당시 성도들은 박해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의 형제자매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옳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격려하는 것이 됩니다. 믿음의 가족의 사랑으로 성도는 힘을 얻고 위로를 얻게 됩니다. 사랑이 가장 큰 힘이요 위로입니다. 이러한 형제 사랑은 손님 대접으로 나타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않을 때, 알지 못하는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아브라함 사라와 같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시 손님 중에는 믿음으로 살다가 쫓겨나서 떠도는 사람, 옥에 갇히고 학대받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진리를 위해 수고하고 고난 받는 믿음의 가족입니다. 그래서 따뜻한 음식과 편안한 숙소를 제공하여 잘 대접해야 합니다. 시대가 어렵다고 움츠려 들지 말고, 손님 대접과 형제 사랑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때 따뜻한 사랑의 열기가 차가운 세상을 녹이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주일예배를 마치고 곧 2018년 마지막 점심식사를 함께 할 것입니다. 매주 이렇게 형제 자매님들과 주일 점심식사를 하는 것이 평범해 보이지만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는 좀 번거롭더라도 집에서 함께 식사할 때 기쁨이 더욱 넘칩니다. 양들과 동역자들은 이러한 사랑의 온기 속에서 위로를 얻으며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후배가 만나 대화하고 식사하며 같이 있을 때 사랑과 신앙이 함께 자라납니다. 10년 전 추수감사절 때였습니다. 먼 길을 오가는 저희 가정을 초청하여 식사와 숙소를 제공한 한 가정이 있었는데, 그때 큰 위로를 받은 기억이 오래 잊히지 않습니다. 미시건의 피터 윤, 루스 윤 선교사님은 캠퍼스 양들뿐 아니라 선교사님들과 복음의 동역자들을 언제나 극진히 섬겨서 그 집을 거쳐가는 사람들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합니다. 지난여름 미국수양회 때도 30명이 넘는 안암의 대 식구들을 2박3일 동안 넓은 집에서 극진히 섬겨주셔서 저희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녁에 즉석음악회를 열었을 때, 많은 분들이 자발적으로 나와서 노래하고 시도 읊고 춤도 추며 기쁨과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형제 사랑, 손님 대접은 형제자매를 위로하고 웃게 하고 춤을 추게 만듦을 봅니다.

둘째, 결혼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당시 사회에 결혼을 하찮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문헌들은 죄로 가득한 그 시대가 침소를 더럽히고, 자녀들과 가정을 더럽혔음을 증거합니다. 음행과 간음과 이로 인한 재앙이 그 사회에 만연했다고 합니다. 음행하는 사람들은 창녀를 이용하는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간음하는 사람들은 결혼서약에 충실하지 않고 음행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음행과 간음을 통해 결혼을 더럽힌 사람을 하나님은 책임을 묻고 심판하십니다. 결혼은 개인과 가문을 넘어서 한 사회와 인류의 가장 중요한 생명과 행복의 장치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결혼을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 창조명령을 이루려면 반드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해야 합니다. 결혼에는 남녀관, 인간관이 녹아 있습니다. 결혼이란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면서 새로운 사람을 탄생시키는 거룩하고 신비로운 그릇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나 혼자서, 개별만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해가 되는 측면도 있지만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는 것을 무슨 유행처럼 여깁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자기 사랑의 핵심에는 내가 있습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 가정을 갖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중한 내가 탄생한 장치인 결혼을 부정하는 것은 자기모순입니다. 마치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이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소중한 만큼 또 다른 나를 탄생시키는 결혼이 소중한 것입니다. 결혼에 대한 많은 말들, 격언들을 살펴보면 부정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그만큼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독일 격언에도 “결혼은 쉽지만 가정은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인생의 행복의 동산이기도 합니다.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은 일면 알콩달콩 살아가는 행복에 겨운 사람들의 말로 들리기도 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혼은 새장과 같다. 밖에 있는 새들은 부질없이 들어가려고 하고, 안의 새들은 부질없이 나가려고 한다.” 칸트는 “결혼으로 여자는 자유를 얻고, 남자는 자유를 잃는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격언에는 “웨딩케이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음식물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물리학자 리히텐베르크는 “결혼은 발열로 시작하여 오한으로 끝난다”라고 했습니다. 안드라 더글러스는 말했습니다. “나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방해하는 유일한 존재는 내 남편이다.” 로마의 집정관 마르쿠스 카토는 말했습니다. “세계를 제패한 여러분 머리 위에 마누라라는 패권자가 있소이다.” 잠언 21:19는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은, 물론 그런 점이 있지만, 역설적으로 결혼이 얼마나 남녀에게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결혼이 바로 우리의 삶임을 말합니다. 또한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혼에 대한 무수한 말들은 결혼과 가정이 소중한 생명의 둥지임을 반영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행복한 인생의 초석입니다. 만약 가정의 불화가 지속된다면 정말 이를 악물고 바꾸고자 노력에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용서입니다. 내 마음을 돌이킬 수 없는데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배우자를 용서하고자 하면 내 속에서 신기한 힘이 생겨 마음이 돌이켜집니다. 하나님이 우릴 용서하셨듯이 배우자를 용서하는 것 외에는 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전도서 9:9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 결혼은 하나님이 남녀를 짝지어 세우신 행복의 동산입니다. 결혼을 귀히 여기는 것이 결국은 나를 귀히 여기는 길이요, 너를 귀히 여기는 길입니다.

셋째, 돈을 사랑하지 말라
   냄새나는 돈을 누가 사랑하겠습니까 마는, 사실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고 돈 때문에 울고 웃는 삶을 살아갑니다.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돈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더 벌려고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로지 돈, 돈, 돈 하며 돈을 추구하는 삶을 뜻합니다.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를 위해서만 재물을 쌓아두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 믿음을 떠나게 하고 많은 근심에 빠트립니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깊은 속에 들어가 보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나를 지켜줄 것이 돈의 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돈을 의존하는 경향이 커집니다. 육체의 힘이 점점 빠져가는 상황에서 돈의 힘으로라도 살아가고자 하고, 그 돈의 힘으로 상대방을 좌지우지 하려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돈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라 말합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기자처럼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고백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돈이 필요하고 많으면 더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 자체를 죄악시 하거나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돈을 사랑할 것을 걱정할 정도로 돈이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돈이 없어서 휘둘리는 삶을 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물질적으로 좀 더 더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싶은 소박한 마음을 갖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 정도 돈을 벌어야 하며, 어느 정도가 돈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것을 규정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바도 다르고, 동역자들 사이에도 생활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대략적인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양심과 가치관에 맡길 수밖에 없는 어려운 문제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물질적인 축복을 기대하며 살아갈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분이시지만 동시에 물질적이고 실제적인 분입니다. 신명기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올바른 삶을 살아갈 때 물질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 약속합니다. 농사가 잘 되고, 가축이 새끼를 쑥쑥 낳고, 자녀를 잘 낳고, 가족들은 건강할 것이라 신명기 율법은 약속합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할 때 일만 악의 뿌리를 품는 것이 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할 때 풍성한 물질의 축복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도 물질문제로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신자들에게 우리에게 물질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단지 그 질서를 올바로 세우고 건강한 물질생활을 해나가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열심히 살아가야 합니다. 다만 물질에 과도히 매이거나 물질을 사랑하는 삶은 경계해야 합니다.

넷째, 인도자들을 잘 따르라.
   당시에 두 부류의 인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일러 주고 인도하다가 먼저 죽은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말합니다. 또한 현재 그들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이 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순종하여 잘 따르라 말합니다. 이들은 성도들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하기에, 그들이 괴로움 없이 기쁜 마음으로 수고할 수 있도록 잘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감사한 분들이 우리의 구원자는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지, 하나님처럼 받들어 섬겨야 하는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지도자에 대한 감사는 필요하지만, 우리 영혼의 목자는 예수님 한분뿐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에는 유교적인 영향으로 지나치게 지도자를 떠받드는 면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한국교회가 지탄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사자나 교인들이나 누구에게도 유익이 되지 않고,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러한 모습은 공적인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의 본질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교회가 지속적인 공동체가 되게 하는데 이러한 지나친 사람 중심의, 지도자 중심의 가치관은 방해물이 됩니다. 오늘날 믿음의 새 세대는 한국교회와 우리 모임 가운데 있는 이런 유교적인 점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용감하게 극복하고 정말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를 이루어 나가고자 애를 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 중심의 참다운 교회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지탄 받는 교회지도자들도 많이 있지만, 이것을 교훈 삼아서 정말 제대로 된 목회를 해야겠다며 뼈를 깎는 투쟁을 하는 젊은 목회자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앞선 믿음의 선배들과 선진들의 그 믿음의 삶은 감사하고 본받을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사람을 높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교회가 되도록 그 중심을 잘 지키는 우리들 되기를 기도합니다.

   영원히 동일하신 예수님도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인간 지도자는 많은 수고를 하고 그 역할이 있지만 인간의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처음엔 순수한 마음으로 잘 하다가 나중엔 실망스런 언행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 들어 늙고 결국은 이 땅을 떠납니다. 이런 인간 지도자는 일정 부분 우리의 존경과 배움의 대상은 되지만 의지할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영원토록 동일하신 오직 예수님 한분이 우리의 의지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말해왔습니다. 히브리서 성도들은 예수님 믿고 잘 살아가다가 힘든 일이 닥쳐오자 예수님 말고 다른 좋은 것들을 붙들게 되었습니다. 천사를 붙들고 모세를 붙들고 율법을 붙들고 인간 제사장을 붙들고 구약의 제사제도를 붙들었습니다. 이런 좋은 것들을 붙들다가 결국은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놓쳐버리는 것이 히브리서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우러러 보는 대상인 천사보다, 모세보다, 율법보다, 대제사장보다 우월하신 분입니다. 히브리서는 인간의 한계와 예수님의 완전성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탁월성, 초월성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비교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바로 이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라 하였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을 붙들도록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본질상 원래 그런 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본질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래서 영원히 성도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제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지가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영문 밖으로 버려져 치욕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완전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이런 모습은 어떠한 인간 지도자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또한 오늘 예수님은 어떠합니까? 히브리 성도들에게 오늘 예수님은 어제처럼 구원자로서 그들에게 동일한 구원을 베푸는 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고, 양들의 큰 목자로서 그들의 매일의 삶을 섬세히 돌보셨습니다. 바로 오늘 그렇게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상황은 박해와 치욕과 고난으로 힘들었고, 재물도 빼앗기고, 옥에 갇히고, 나그네처럼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어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님은 오늘 고난을 당하는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의 위로자요, 목자요, 참된 소망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입니다. 창조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사실은 영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우리의 목자라는 사실, 완전한 구원의 공급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계시기에 이 변함없는 사실 또한 영원히 보존하십니다.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일하신 변함없는 분입니다. 그 본질에 변함이 없고, 죽거나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사람에게서 이런 것을 기대하다가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그 마음이 변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죽기 때문에 기대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시146:3-4). 사람은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 생각도 소멸되는 존재입니다. 그런 인생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 다 모르더라도 오직 이것 하나, 영원하신 하나님 예수님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없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 예수님의 그 십자가가 하나님 사랑의 소멸되지 않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님뿐임을 기억하며 이 영원히 변함없는 사실을 맘에 품고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볼 때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기는 삶이 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물론 세상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마음도 변하고 자주 불안해졌습니다. 지난여름 급격하게 올라버린 부동산 가격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불안을 넘어 낙심에 빠졌습니다. 수험생들과 젊은이들은 열심히 공부하며 많은 것을 준비해왔지만, 세상은 좋은 대학 좋은 일자리를 호락호락 내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더 달려가야 합니다. 또한 세상의 가르침은 성경과 충돌합니다. 세상은 자기 사랑을 권장하고, 결혼을 귀히 여기지 않고, 음란과 돈을 사랑하도록 합니다. 물론 이런 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주도하고 있습니다. 신천지와 같은 거짓교훈이 판을 치고, 영구한 도성보다 이 땅의 도성에서나 잘 살라며 주저앉힙니다. 우리들이 이런 세상을 거슬러 살아간다는 것은 아주 힘듭니다. 그래서 히브리 성도가 걸어갔던 박해와 고난의 길을 우리도 걸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때 어느새 우리는 피곤하고 낙심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젠 할 만큼 했다며, 예수님에 대한 팽팽하던 믿음의 끈을 슬그머니 풀기 쉽습니다. 믿기는 하는데 대충 그럭저럭 살아가고자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보다 세상일에 울고 웃기 쉽습니다. 특히 교회 안팎에서 사람과의 신뢰의 관계성이 깨지는 일을 당할 때 힘이 빠집니다. 신뢰가 깨진다는 것은 내가 믿는 어떤 가치가 소멸되고 세계관 우주관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므로 매우 고통스런 일입니다. 어떤 목자님의 형님은 과거 함께 학생운동 하던 다른 대학 총학생회장에게서 최근에 사기를 당해 그 상실감이 무척 컸다고 합니다. 동일한 가치와 이념을 나눈 동지와의 신뢰가 깨지는 일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이 교회 내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신뢰의 공동체입니다. 신뢰가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초로 만들어진 언약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법이나 권력이나 물질로 묶어둘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약속으로 뭉쳐진 신뢰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신뢰가 무너지면 교회가 안으로부터 와해되는 무서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약속은 결코 깨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진실되게 회개하고 나아가면 용서해 주십니다. 문제는 성도 간의 약속입니다. 성도들 사이의 약속은 성경에 기초하여 암묵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뢰가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이 깨지면 그 고통과 혼란이 참 큽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인간 사이에 있는 한계를 넘어서서 동일하신 예수님, 영원히 변함없는 예수님, 정말 신뢰할만한 예수님, 언약의 예수님을 닮아가는 신뢰의 공동체, 언약의 공동체가 되고자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영원히 변함없는 것이 있다는 것은 우리 영혼을 참으로 안심하게 합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헤매더라도 그것으로 다시 돌아가면 우리가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구원의 약속이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와 이 땅에서 동행하신다는 약속이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넘어 영원한 도성으로 부활의 세계, 영생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로 인도하신다는 그 약속이 변함이 없습니다.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 신실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나 자신의 신실하지 못함, 다른 사람의 조삼모사,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신뢰를 기반으로 교회공동체를 견고하고 지속가능한 공동체로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 십자가의 자리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새해에도 동일하신 예수님 안에서 동일한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변함없는 예수님을 따라 우리 자신이 먼저 신뢰할만한 개인이 되고, 우리 공동체가 신뢰할만한 믿음의 공동체가 되도록 함께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히브리서가 전하는 믿음의 주 예수님을 믿는 신자다운 삶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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