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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2017 신년말씀 3강
성경본문 에스라 5-6장
전한날짜 2017/01/22
ㆍ조회: 555  
역사하는 손을 힘 있게 하신 하나님
2017년 신년 에스라 3강

역사하는 손을 힘 있게 하신 하나님

에스라 5,6장(6:22)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

차를 타고 지방을 다니다 보면 짓다만 건물이 잡초더미 속에 방치된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콘크리트 뼈대를 그대로 드러낸 채 공사가 중단된 건물은 흉물스럽기도 하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 좋게 합니다.
상상해보건대, 하나님의 성전도 그랬을 것입니다. 기초를 놓고 이제 막 뼈대를 세운 상황에서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멈춰선 성전 역사가 다시 시작되었고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중단된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되어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셨고 완성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성전 건축을 형통케 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일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지금도 세상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며 지친 우리 손을 힘 있게 하시는 하나님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고레스 왕의 명령을 따라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이듬해 2월부터 성전 공사에 들어갔습니다. 성전 기초가 놓일 때 그들은 감격했고, 제사장들이 부는 나팔소리를 따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소리 높여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과 감격은 오래 가지 못 했습니다. 에스라 4장 24절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대적들의 방해로 오랜 시간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주 말씀에서 살펴본 에스라 3장과 4장의 줄거리입니다.
어느덧 16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성전 건축에는 아무런 진척도 없이 잡초만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오랜 시간 멈춰선 성전 건축이 과연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요?
5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성전 건축이 16년째 중단되고 있던 그때,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일어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했습니다. 뭐라고 예언했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학개서에서 우리는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학개 1:4,8)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무려 16년 동안이나 중단된 성건 건축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습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성전을 건축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음과 태도가 변하는 것을 가리켜 흔히 우리는 ‘초심’을 잃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처음 사법연수원에 들어갔을 때 제 연수원 동기들은 하나 같이 정의의 사도였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야 하고, 약자 편에 서서 그들을 변호하고자 이 길에 들어섰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던 정의의 사도들은 다 어디 간 것입니까? 대다수의 법조인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는 일에 급급하거나 세상 욕심에 정신이 팔려있습니다.
돌에 새겨진 글씨라도 시간이 흐르면 닳아 없어지거나 희미해집니다. 하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처음에 아무리 명백했다 해도 약해지고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특히, 우리가 처한 상황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달리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금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까?”라고 물으며 사명을 잃고 현실에 적응해가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고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16년 동안 성전 건축이 멈춰선 데에는 대적들의 방해도 있었지만 현실에 안주했던 유다 사람들의 책임도 컸습니다. 학개서에 기록된 것처럼 성전은 황폐했지만 유다 사람들은 잘 꾸민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왕궁에서 평안히 살게 되었을 때에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라고 했던, 그런 마음이 지금 유다 사람들에게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을 대학생 선교와 세계선교 역사를 위해 세우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역사에 부르심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엔 늘 일대일과 제자양성에 대한 거룩한 부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어렵고 시대가 변했다는 이유로 우리 마음으로부터 대학생 제자양성 역사를 내려놓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저 역시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캠퍼스 제자양성이 하나님의 뜻일까?” 언제부터인가 제가 대학 들어갈 때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학생들이 새내기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는 유행가 가사일 뿐 전에는 삼촌뻘은 되었는데 이제는 아버지 단계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해야 할 일,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이 늘어났습니다. 아들뻘 되는 대학생과 마주 앉아 성경공부를 하는 것보다 더 잘 할 수 있고, 의미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었어도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흐른다 해도 결코 변하지 않을 하나님의 뜻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캠퍼스 미션, 제자양성 역사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 앞에 서면 우리는 “하나님, 지금도 그것이 당신의 뜻입니까?”라고 물으며 내가 처한 상황이나 환경을 핑계 들어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잠시 놓쳤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다시 그 앞에 서는 일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중단되었던 하나님의 역사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하나님 앞에 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는 계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와 성경공부, 소감과 양식, 기도일 것입니다. 구약 시대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날 말씀을 통해, 예배 중에, 또 목자님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예배와 말씀공부, 기도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 앞에 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성전 건축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된 스룹바벨과 예수아, 유다 사람들은 중단되었던 성전 공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황량했던 성전터에 다시 활기가 돌고 적막했던 그 땅이 사람 소리, 성전을 짓고 세우는 힘찬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문제가 생겼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어떻게 알았는지 바사의 관리들이 찾아와 누구 명령으로 성전을 건축하는지, 공사 책임자는 누구인지 추궁했습니다. 이제 막 재개된 성전 공사가 다시 멈춰 설 위기에 봉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 역사는 또 중단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 같이 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사의 관리들은 다시 시작된 성전 공사를 막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전 공사가 재개된 사실을 보고하고 다리오 왕의 처분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왜 성전 공사를 막지 못했을까요? 유다 사람들로부터 눈 감아달라는 청탁과 함께 뇌물이라도 받은 것일까요? 아니면, 정말 신중한 사람들이어서 이 공사가 합법적일 수도 있으니 함부로 공사를 중단시키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이라도 한 것일까요? 본문에서는 그 이유에 관해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돌보다(watch over)’는 말은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관찰하고 보살핀다’는 뜻입니다.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를 둔 엄마나 아빠들은 아이 주변에 위험한 물건은 없는지, 아이가 혹시 넘어지지는 않을지 주의 깊게 관찰하며 아이를 보살핍니다. 공원이나 놀이터 같은 곳에 아이를 내놓을 때면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돌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자녀 된 우리를 돌보십니다. 돌보시되,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21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이런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다면 그 어느 누가 우리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의 복음역사를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 성전 공사는 이제 중단 없이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돌보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사의 관리들이 다리오 왕에게 ‘예루살렘 성전건축 관련 진상보고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7절부터 16절까지입니다. 좀 길지만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다리오 왕은 평안하옵소서!
왕께 아뢰옵나이다.
우리가 유다 도에 가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본즉
성전을 큰 돌로 세우며 벽에 나무를 얹고 부지런히 일하므로 공사가 그 손에서 형통하옵기에 우리가 그 장로들에게 물어보기를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라고 하였으냐?” 하고
우리가 또 그 우두머리들의 이름을 적어 왕에게 아뢰고자 하여 그들의 이름을 물은즉
그들이 우리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예전에 건축되었던 성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한 것이었으나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갈대아 사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이 성전을 헐며 이 백성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더니 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고 (중간 생략)”
이제 왕께서 좋게 여기시거든 바벨론에서 왕의 보물전각에서 조사하사 과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예루살렘에 다시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시고 왕은 이 일에 대하여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이 보고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표현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 사실의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정말 중요합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듯 말 한 마디에도 우리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김모세 목자님이 저에게 누군가를 가리켜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한 마디 하셨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말을 들은 이후 정말 그 사람이 괜찮게 보였습니다. 그 전까지 제가 미처 보지 못했던 그 사람의 장점과 괜찮은 점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으로, 이 보고서에는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라 할 수 있는 유다 사람들의 주장과 의견이 충실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전 건축과 관련된 모든 논란을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고레스 왕의 조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레스 왕의 조서는 말하자면 ‘최순실 게이트’의 태블릿PC와 같은 것입니다. 보고서 말미에서 이것을 언급한 것을 보면 그들은 사건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6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 문서 창고 곧 바벨론의 보물을 쌓아둔 보물전각에서 조사하게 하여 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으니” 바사 관리들의 마음 속에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은 다리오 왕의 마음과 생각도 주장하고 계셨습니다.
당시 바사, 즉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그리스까지 세력을 뻗은 엄청난 대제국이었습니다. 이 넓은 제국을 통치하는 다리오 왕에게 얼마나 많은 보고서가 올라왔을까요. 상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아마도 그 보고서들 중 상당수는 왕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왕에게 전달되었다 해도 왕이 그 보고서를 주의 깊게 들여다볼지, 들여다본다고 해서 그것이 받아들여질지, 그 후 어떤 조치가 취해질지 이 모든 것이 미지수였습니다.
그런데 다리오 왕은 예루살렘 성전 관련 보고서를 받고서 고레스의 조서를 찾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성전 건축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고레스의 조서가 발견되었습니다.
다 같이 3절과 4절을 읽겠습니다. “고레스 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성전, 곧 제사 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그 성전의 높이는 육십 규빗으로, 너비도 육십 규빗으로 하고 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 그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
이 조서의 발견으로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고레스 왕의 허락 하에 이루어진 적법한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이에 더하여, 바사 제국 최고의 권력자인 다리오 왕이 하루 아침에 성전 건축의 후원자로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다리오 왕은 고레스의 조서를 토대로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막지 말고 방해하지 말 것. 둘째,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자금을 세금으로 충당할 것. 셋째, 성전 건축이 끝난 이후에도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제사장이 요구하는 대로 날마다 공급할 것을 명했습니다. 특히, 다리오 왕은 자신이 내린 이 지시와 명령을 그 어느 누구도 손대지 못하도록 하나의 명령을 더 추가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명령을 내리노니 누구를 막론하고 이 명령을 변조하면 그의 집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의 집은 이로 말미암아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이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다리오 왕은 절대로 착하거나 마음 따뜻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고집도 세고, 잔인한 면모도 있는 그런 왕이었습니다. 이런 다리오 왕이 어째서 성전 건축에 대해 이렇게까지 지원하고 마음을 쓰는지 그저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창무 목자님이 전한 지난 주 메시지에서도 잠간 나왔었는데, 우리는 살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특별한 호의나 친절, 요긴한 도움을 받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군대 고참이 갑자기 나타나 예배에 데리고 갈 수도 있습니다. 군대에서 일어난 신기한 일은 또 있습니다. 진수일 목자님이 군에 있을 때 소속 부대를 옮기고자 겁도 없이 부대장님께 편지 한 통을 썼는데, 그날 부대장님이 “거기 진수일이라고 있지? 의무대로 보내” 이렇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직장 상사에게서 불가능해 보였던 허락을 받아내기도 하고,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은 채 늘 항상 나를 전폭적으로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누군가가 혹시 우리 주변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의 도움과 사랑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 모든 일과 사람들 뒤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바사 관리들의 마음을 움직여 공사를 중지 못 하도록 한 것도, 객관적이며 공정한 보고서를 작성하게 한 것도, 다리오 왕의 마음을 움직여 고레스 왕의 조서를 찾게 한 것도, 문서창고를 뒤졌을 때 고레스의 조서를 찾은 것도, 무엇보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 성전 건축을 전폭적으로 후원하게 한 것도 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7) 이것은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이 훗날 형들을 만나 한 말입니다. 이 요셉의 말처럼 우리가 믿음의 눈을 열어 보면 이 세상과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그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은 때로 이 세상 권력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의 역사를 이루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역사의 주관자시며, 모든 왕들과 권세 위에 계시는 진정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하였을 때, 세상 사람들의 손을 빌어 우리를 징계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일이 잘 풀릴 때나 일이 잘 안 풀릴 때나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사람이나 우리가 처한 환경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에 계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려오자 총독과 그 부하들은 신속히 조서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이로써 성전 건축이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명령한 후원 속에 성전 건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마침내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된 지 3년 8개월 9일 만의 일이었습니다.
16절 이하에서는 성전 완공 이후에 이루어진 몇 가지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해볼 것은 성전 완공 이후에 드려진 봉헌식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성전 완공 이후 봉헌식을 조촐하게 드렸습니다. 지난 금요일 미국의 45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습니다. 기사를 보니, 대통령 취임식 비용이 무려 2,365억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전 봉헌에 드려진 제물은 수소가 100마리, 숫양 200마리, 어린 양 400마리, 그리고 숫염소 12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솔로몬 성전 봉헌식 때 드려진 예물의 숫자가 소 22,000마리, 양 120,000 마리였던 것에 비해도 이번 성전봉헌은 200분의 1도 채 안 되는 정말 초라한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봉헌식의 규모나 제물의 숫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드린 고액의 헌금보다 과부가 드린 단돈 두 렙돈을 더 많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은 외적으로 화려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진심과 헌신과 믿음입니다.

성전봉헌 예배를 드리고 또 하나님 앞에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습니까? 다 같이 22절을 읽겠습니다. “즐거우므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었더라”
우리는 이 마지막 구절에서 다시금 우리 인생의 중요한 진리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삶의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무엇이 우리의 손을 힘 있게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학개서에 나온 것처럼 성전 건축 이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 꾸민 아름다운 집에서 개인적으로는 안락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에 22절에서 묘사하는 것과 같은 기쁨과 즐거움, 우리 손을 힘 있게 하시는 충만함은 없습니다. 이런 힘과 기쁨과 충만함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완수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즐겁게 하시고 우리 손을 힘 있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제 한 달 있으면 다시 새 학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새 학기가 다가온다는 것이 부담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나 빨리 변하는 세상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고, 우리 마음이 한 없이 위축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 없이 이 세상 역사를 그 뜻대로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의 내면에 기쁨과 즐거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의 손에는 힘이 넘칩니다. 이 힘으로 우리가 올 한 해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중단 없이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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