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신앙고백
순교의 가치!!!
UBF | 기도요청 | 주일말씀 | 게 시 판 | 안암까페 | 페이스북
UBF해외|한국|모바일
양마가선교사님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   UBF공식까페
 
UBF > 안암 > 성경강해 > 주일말씀
첨부#1 2017년_부활절_특강(1)_청년아_일어나라_문제풀이.hwp (32KB) (Down:66)
첨부#2 부활절메세지(김기남).hwp (26KB) (Down:2)
강의순서 부활절 특강(1)
성경본문 눅 7:11-17, 24:-
전한날짜 2017/04/16
ㆍ조회: 501  
청년아 일어나라
2017년 부활절 특강(1)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누가복음 7:11-17; 24:5-8, 36-43, 50-53
요절/누가복음 7:14

1. 예수님이 나인성으로 가실 때 어떤 행렬을 만나셨습니까(11,12)? 독자의 죽음으로 인한 여인의 슬픔이 어떠했을까요?


2. 과부를 보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으며 왜 ‘울지 말라’고 하셨을까요(13)? 예수님은 어떻게 죽은 청년을 살리셨습니까(14,15)?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16,17)?


3 이 외에도 예수님은 또 누구를 살리셨습니까(눅 8:49-56; 요 11:39-44)? 예수님은 자신을 어떤 분으로 선포하셨습니까(요 11:25,26)?  


4.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어떻게 되셨습니까(눅 24:5-8)? 부활하신 예수님은 누구에게 나타나셨습니까(눅 24:36-43; 고전 15:4-8)?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 계십니까(눅 24:50-51)?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눅 1:32,33)?


5.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의 삶이 어떠했습니까(눅 24:52-53)?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할까요?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소망은 무엇일까요(눅 7:14)?
 
부활절메세지_20170416
제 목 : 청년아 일어나라  부제: 부활과 기쁨
말 씀 눅7:11~17 ,24: 5~8 , 24 :36~43, 50~53
요 절 눅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이번 주간은 부활절주간이었고 오늘은 바로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말씀하신대로 3일만에 부활하신 것을 기념날 입니다. ‘부활’이라는 용어는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부상 후에 재활로 인해서 몸을 회복하여 왕년의 실력을 발휘할 때 ‘부활’ 했다고 말합니다. 또 폐지된 법이나 제도가 다시 시행될 때 부활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19세기 러시아의 유명한 문호인 도스도예프스키처럼 사형 직전에 황제의 명령으로 사형이 취소되었을 때처럼 구사일생으로 죽기직전에 살아났을 때  ‘부활’ 했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간혹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처럼 사람이 완전히 죽어서 이미 장례를 치르는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 은 경험적으로나 인간의 합리성으로 봤을 때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에 속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부활은 신화 속의 그것이 아닙니다. 간절한 희망사항으로만 끝날 그것이 아닙니다. 불가능할 것 만 같았던 , 그리고 꿈만 같던 부활이 예수님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이 예수님 안에서 부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 나의 부활’하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부활의 실제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희망과 기쁨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부활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 이로 인한 감사, 확신,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7장11절과 12절을 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인성’ 이라고 하는곳에 제자들과 방문하였습니다. ‘나인성’이라는 말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성’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이름에 걸맞지 않게 예수님 일행은 ‘나인성’에 이르자마자 장례행렬을 만나게 됩니다.  그 장례행렬은 ‘과부’ 어머니가 홀로 키운 독자의 장례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슬픔이 매우 컷습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그 과부에게 위로하고자 ‘Don’t Cry’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Cry’ 는 대성통곡하고 있다는 의미로 그 만큼 슬픔이 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아들은 왜 죽게 되었을까요?  본문에는 안 나와 있지만 큰 중병에 걸려서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불의의 사고로 인해서 죽었을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군대에 갔다가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신입생 OT 때 사발식을 한 게 잘못되어서서 죽었을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홀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고 빽이 없는 자신의 인생이 흙수저임을 알고 비관해서 자살했을수도 있습니다.
그 죽음의 이유야 어떻든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낸 그 홀어머니의 의 슬픔과 고통은 어떻했겠습니까?   세월호가 3년만에 인양되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세월호 사고 3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3년 전에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곳을 보면서 아들 딸들의 죽음 앞에 오열하고 통곡하는 부모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자식의 죽음 앞에 부모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과 절망을 겪었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말로 위로를 할수 있을까요? 같이 울고 같이 슬퍼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죽음 앞에 인간은 철저히 무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독자의 죽음과 과부의 슬픔에 관심 가지셨습니다. 13절 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예수님이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사’ 이 말씀은 예수님이 그 과부의 슬픔에 동참하고 그 슬픔을 깊이 이해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과부를 도와주시고자 하였습니다. 그대로 두면 과부는 일생 슬프고 한 맺힌 인생을 살 것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불쌍하에 여긴 사람은 이미 죽은 외아들이 아니라 그 어머니입니다.
다 같이 14절 전반부를 읽어보시겠습니다. 14절 전반부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예수님은 다가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님은왜‘관에 손을 대었을까요? 그장례행렬을멈추기위해서입니다. 죽음을 스톱 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과학, 의학을 발달시켜 죽음을 스톱시켜보고자 하지만 단지 지체만 시킬뿐 절대로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임했을 때 극도의 슬픔과 분노를 하다가 결국에는 체념하고 죽음을 받아들이고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 이상 할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즉 장례행렬를 따라가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으며 본인도 곧 그 장례행렬 속의 죽음의 당사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정면에서 장례행렬을, 곧 죽음의 행렬을 멈추어 세우셨습니다.
다같이 14절 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다함께)  ‘예수께서 이르시되 “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니’ 15a절도 같이 보시겠습니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그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힘입어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말도 하였습니다.(청년 멘트) 즉 커뮤너케이션도 하였습니다. 의사 소통이 안되는 좀비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으로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예수님이이청년에게‘일어나라’ 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15절 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예수님은 죽음에게 뻬앗긴 아들을 돌려주기 위해서 그 청년을 일으켜 세우셨던 것입니다. 아들이 다시 살아났을 때 그 어머니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우와~ 내 아들이 살아났어!!!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을까요?
이제 청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당연히 어머니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다시는 홀어머니 두고 먼길 떠나는 자식이 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외로운 어머니를 잘 섬기는 삶을 살기 원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청년은 예수님께 혼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이 이제 결혼도 하고 아들딸을 낳고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인생을 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젊은 청년으로서 마을에서 이웃도 돕고 힘차고 활기차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청년을 살리시고 그 어머니에게 자식을 돌려주는 현실적인 위로자가 되셨습니다. 그 어머니에게뿐만 아니라 함께 울던 마을전체가 위로를 받았습니다. 부활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큰 기쁨과 위로가 되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죽음으로 인해 세상에 그 누구보다도 슬프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에게 다시 아들의 기쁨, 부활의 기쁨을 선물하신 예수님은 참 기쁨의 근원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 앞에는 어떤 죽음의 슬픔도 권세를 부릴 수 없습니다. 주께서 뜻 두시고 말씀하시면 사망 권세가 떠나가고 기쁨이 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들의 근본적인 고통과 슬픔을 스톱시키고 참기쁨을 회복시켜 주시는 실제적인 위로자가 됩니다. 우리들의 선한목자가 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Young man, get up!” 2000 년전 예수님이 나인성 앞에서 외치신 이 음성은 인류 최고의 희망의 음성입니다. 이 음성이 죽은 청년을 일으키고 그 어머니를 기쁘시게 했듯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들려오는 희망의 음성입니다. 사망 권세 아래서 슬프고 무기력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우리 모두에게 모든 슬픔을 물리치는 복된 음성이요 또한 우리에게 주시는 부활 명령의 음성입니다.
요즘 젊은세대들에게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는게 ‘3포세대’ 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장, 결혼, 출산 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청년들은 삶의 가장 기본이 되며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인, 어쩌면 당연하게 누려야 할것들을 포기해야하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르바이트로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며 게임을 하면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삶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사회와 가족의 큰 근심거리가 됩니다. 살아있으나 죽어있는것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청년들이 직장에서 일하는 기쁨을 잃었습니다. 결혼하며 사랑하는 자기 동역자와 사는 기쁨을 상실했습니다. 결혼은 청년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합니까? 자녀를 낳고 기르는 기쁨을 모르게 되었다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런 것이 없는데 어떻게 미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먹고 살기 힘들다, 일자리가 없다 하여 이런 귀한 것을 포기하고 살게 되었다니 이 시대의 청춘은 얼마나 슬픈 존재입니까 젊은 이들에게 생기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사망 권세 하에서 고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죽어있는 젊은이들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먼저 그들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의 절망과 답답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경제적인 계층구조가 양극화로 고착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수 밖에 없다는 것을 청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른바 흙수저 인생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 있습니다. ‘에이 자신이 흙수저라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성공하면 되지 ..열심히 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라고 비난하기보다 ‘우리가 이 청년들의 고민과 고통에 대해 슬픔을 느낄 때 살리고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가 campus 목자로서 젊은 대학생들의 고민을 이해하고 그들을 살리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살려서 사회와 가족에게 돌려보내야 합니다. 가족과 사회에 큰 기쁨이 될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이들에게 예수님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청년아 일어나라’와 같은 주의 말씀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나리’ 요한복음 5:25 말씀입니다.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할수 없지만 예수님은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임하면 죽은 듯한 청년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그리고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므로서 청년들을 예수님 앞에 데려가야하겠습니다. 그들이 들으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자로서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청년아 일어나라든 회개하라든, 하나님을 믿으라든 하여간 주의 말씀을 들려주며 살리는 역사를 충만히 이룰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오늘 본문의 청년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또 누가복음 8장54 에서는 죽은 회당장 의 외동 딸을 살리셨습니다. 눅 8:54, 55절을 보면,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되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시니’ 예수님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새우깡과 맛동산 등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냥 영적으로 살리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육체적으로도 회복시키심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그 외동 딸을 아비인 회당장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11장 43절 ‘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무덤에서 통통튀며 나왔습니다. 나사로는 죽은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이때 나사로의 상태는 부패가 진행되어 조직이 파괴되었으며 시체썩는 냄새도나고 그야말로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씀의 권세로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오빠로서 가정의 가장으로서 누이들을 섬기며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나사로를 그 누이들에게 되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불가항력의 죽음의 권세를 말 한마디로 물리치시는 예수님을 생각할때 감사찬양하게 됩니다. 이 예수님은 스스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을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예수님은 남을 살리셨을 뿐 아니라 자신도 선포하신대로 죽음에서 친히 부활하셨습니다. 누가 남의 머리는 깍아줘도 제머리 못깎는다 말이 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절을 보면 예수님이 장사되어 있는 무덤으로 올라간 여자들이 거기서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두명의 천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때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있는자를죽은자가운데서찾는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난뒤 말씀대로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이 죽었다며 엉엉 울며 슬퍼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타난 예수님을 보자 ‘헉’ 하고  놀라기만 했지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눅 24장37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영, 유령으로 생각했습니다. 영으로 돌아오는 것은 진정한 부활일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함께 맛있는 식사도 할 수가 없고 함께 따뜻한 햇살을 맞으면서 산책도 할 수 없고 운동도 같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자신이 예전과 같은 몸을 가지고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눅24장39절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은 완벽한 부활을 의미합니다. 살과 뼈가 살아있는 사람과 똑같이 육체의 오감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서 제자들이 먹는 구운 생선도 그 자리에서 먹으셨습니다. 가시를 발려 뱉어내시면서 먹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부활한 청년이 사람들과 말한 것과도 같고 회당장의 딸이 일어나 새우깡을 먹는 것과도 같고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온 것과 같이  아주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은 제자들과 따뜻한 봄 햇살을 맞으면서 벚꽃 휘날리는 campus 벤치에 앉아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두런두런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슬픈 제자들에게 큰 기쁨이 되어 돌아오신 것입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체험한 이후 제자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다 같이 눅24장 53절을 보시겠습니다.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마음에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찼습니다. 모든것이 끝이 나버렸습니다. 3년동안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줄 알았던 예수님이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실줄은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3년동안 예수님이 하신 이적들,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들이 꿈만 같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깊이 만났을 때 그들의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쁨으로 살게되었습니다. 부활을 믿으니 더 이상 두려워하고 슬프할 이유가 없게되었습니다. 여전히 로마의 압제가 있고 아직도 두려움의 대상인 사두개인들, 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이 득세하고 위협하고 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들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미 승리했으며 참기쁨가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로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 세계 곳 곳에서 스피릿 있게 복음을 전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말씀을 준비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 이 저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묵상하였습니다. 저는 젊을때부터 기업가로서 성공해서 프로야구 구단주가 되고픈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처럼 직장에 취직해서 결혼하고 애기를 낳고 아파트 평수 넓히는 재미로 살아가는 소시민적인 삶을 사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업은 뜻대로 되지않았습니다.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자 빚도 많이 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교통사고도 크게 내어서 합의금도 물게 되고 집안에 우환도 많았습니다. 저는 저희 집안의 희망이 되는 인생을 살고자했으나 실제로는 그와는 반대로 집안의 근심거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나이도 내일 모레면 마흔살이 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도 없고 이루어 놓은 것도 없었습니다. 어느날 보니 제가 바로 3포세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미래도 없고 기약도 없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를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저를 일으켜세워주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청년아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저와  동행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이후 예전에 같은 업종의 사업을 하며 알고 지냈던 사장과 우연히 연락이 닿아 사업적으로 도움을 받게 되어 실제적인 물질 문제도 해결하였습니다.  목자님들의 기도로 사랑하는 그레이스 목자님과 결혼도 하게 되고 지금은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의 생활의 변화를 기뻐하는 것은 가족들이었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이번에 저희 가정이 이사를 곧 하게 되는데 부족한 전세금을 모두 지원해주실만큼 기뻐하셨습니다.  제가 주의 말씀 가운데서 살아나자 저는 기쁨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부활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일상 생활의 행복과 기쁨, 부활의 기쁨을 절대로 맛보지 못했을것입니다.
그리고 제 아들 하민이가 이제 4살인데 밖에 나가면 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제가 늘 3~4m 근거리에서 하민이를 보살피게 됩니다. 건널목을 건널 때 손을 잡고 건너며 좁은 골목에서 차가 올때면 하민이를 안아서 지나갑니다. 저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저는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깊이 묵상할수 있었습니다. 제가 직장 생활 4년차인데 회사일을 하다보면 업무로 인한 스트레 등으로 세상 일에 매인 바되고 눌린 인생을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저의 제자로서의 삶은 자연스러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당장의 일에 얽매여서 아무 것도 할수 없는 인생이 되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 늘 저의 가까이서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깊이 묵상할 때 죽은 청년이 일어나듯 믿음이 살아나고 세상의 고난과 두려움은 눈 녹듯이 사라짐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부활의 믿음은 언제나 현재적이어야 합니다. 죽은 청년을 향해 청년아 일어나라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가 희망과 믿음으로 일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하겠습니다. 부활 신앙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굳게 붙들고 세상으로부터 일어나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거뜬히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Bookmark and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