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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2017 가을 개강특강
성경본문 빌립보서 3:1-14
전한날짜 2017/09/02
ㆍ조회: 522  
그리스도를 얻고자
2017년 가을 개강특강
말씀 / 빌립보서 3:1-14
요절 / 빌립보서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얻고자

오늘날은 빅데이터 시대입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지혜와 지식으로 험한 자연에 맞서기도 하고, 자연을 활용도 하며 생존해 왔습니다. 이러한 인류의 축적된 지식은 현대에 와서 급증했습니다. 반도체 기술의 발달로 이 방대한 지식은 작은 칩에 효과적으로 저장되어 많은 이들과 쉽게 공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축적된 빅데이터는 이제는 새로운 4차산업혁명시대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효과적으로 적응할 뿐 아니라, 넘쳐나는 지식과 정보를 분변할 수 있는 올바른 지혜와 지식 또한 가져야 합니다. 이 올바른 지혜와 지식은 어디서 올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빅데이터 중의 빅데이터인 그리스도를 아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 능력을 체험하고자 했으며, 삶에서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이 시간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 바울의 열망을 품고서, 이 가을을 힘차게 달려가고자 합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자기자랑을 일삼는 사람들이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의로써 복음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는 사람이 구원 받기에 불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십자가만으로는 안 되고 유대인의 전통, 즉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백성의 조건으로 할례를 엄격하게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육체의 할례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주의자들이 계속 이것을 주장하자, 사도 바울은 그들과의 분명한 선을 긋습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자기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줄반장 한 것, 중고등학교 때 부회장 한 것, 집안이 은수저 정도는 된다는 것, 학벌, 외모, 피부와 근육질 몸 등을 자랑합니다. 신앙의 열정, 직장에서의 지위를 자랑합니다. 자랑거리를 모아 자기를 높이며 기쁨을 얻고자 합니다. 물론 자랑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자랑이 지나치면 자기 의와 교만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이런 자기자랑은 남과의 비교우위에서 온 것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라날 때 한국 경제발전의 상징물 중 하나는 지금도 종로2가 청계천 옆에 있는 삼일빌딩이었습니다. 1971년에 지어진 이 빌딩은 이름대로 31층이었고, 교과서에 실린 모습이 정말 높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미 뉴욕엔 그보다 40년 전인 1931년에 지어진 102층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있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에 63빌딩이 서고, 작년 12월에는 123층의 롯데월드타워도 완공되었습니다. 이젠 아파트조차 50층을 넘는 초고층 아파트가 많이 지어졌기에 삼일빌딩은 그저 평범한 건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랑거리는 상대적입니다. 정말 자랑하려면 가장 큰 것, 가장 높은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오늘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의에 빠진 율법주의자들, 곧 손할례당에 대하여 바울은 참 할례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합니다. 출애굽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만이 구원의 조건이었듯이, 참 할례자는 오직 십자가 보혈만으로 충분함을 압니다. 십자가 보혈만이 구원의 길이므로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만을 의지하고, 그리스도만을 자랑합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다른 사람과 상대적으로 비교하지 않기에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옥에 있으면서도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가 기쁨의 사람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렇다면 과연 바울은 인간적으로는 자랑할 만한 것이 없었던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자랑할 게 없어서 그리스도를 자랑했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입니다. 순수한 이스라엘 족속입니다. 유명한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입니다. 바울은 이런 좋은 신분에다가 노력파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랍비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철저한 율법교육을 받은 정통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할 정도로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의 의로도 흠이 없었습니다. 이외에도 그는 로마시민권자였고, 웅변술에도 뛰어나고, 기적과 권능도 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나 영적으로 빼어난 엘리트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 삶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랬을까요?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할까요? 많은 이유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의를 얻는 유일한 통로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과거 율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로 인해 철저히 실패하고 롬7장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가 율법을 행하며 의롭게 살고자 애쓸수록 자신의 죄악됨이 드러나 절망했습니다. 절망하고 또 절망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이전의 자랑거리는 의와 구원을 얻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 대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죄값을 대속하셨습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시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시대는 가고 이제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오직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의 의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된 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가장 고상하다’는 말은 surpassing greatness, 직역하면 ‘탁월한 위대함’이란 뜻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 위에 뛰어난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2:3,9). 빌2:9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눅1:32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사도 요한은 만물의 근원인 로고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습니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을 온전히 나타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합니다.

   오늘날은 4차산업혁명시대, 빅데이터를 기초로 한 인공지능시대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변화의 에너지원은 컴퓨터, 혹은 그 안에 엄청난 지식을 기록하는 작은 반도체 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대학생들은 무거운 책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다녔는데 이제는 노트북이나 태블릿 PC 하나만 달랑 들고 다니기도 합니다. 인터넷과 클라우드에 접속이 되면 노트북 하나에 도서관 하나를 넣어 다닐 수도 있습니다. 작은 스마트폰 하나만 들고 다녀도 온 세상의 다양한 정보와 소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엄청난 정보를 기록하는 반도체 칩의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생산력을 가진 나라가 우리나라라니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 홍수 속에서도 갈증에 시달리듯,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영적 기갈은 심해갑니다. 오늘날 데이터 속에는 유익한 것뿐 아니라 바이러스, 곧 독소들도 많습니다. 음란물과 악성댓글, 거짓 정보가 난무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만의 바벨탑 문명을 만들고자는 인본주의 정보도 넘쳐납니다. 일찍이 아모스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양식이 넘치고 물이 풍족해도 여호와의 말씀, 곧 참된 지식이 없으면 영적 기근이 찾아옵니다. 인간을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구원할 참된 지식이 필요합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게 하며, 영생의 기쁨으로 살아가게 할 참된 지식이 필요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라는 빅데이터에 자유롭게 접속하여 참 지혜와 지식을 부지런히 검색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에 넘쳐나는 정보와 지식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내적 힘도 길러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곧 나의 가치관을 정립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대로 생각하고, 그 말대로 따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하고 나의 말을 해야 합니다. 특히 젊은이는 한편으로는 비판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용성이 높기 때문에, 새로 보고 새로 듣는 것에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이럴 때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 지식으로 세상을 필터링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빅데이터 시대에 잘 적응할 뿐 아니라, 가장 고상한 지식인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으로 자라길 기도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얻기 위해 과거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겼습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최고의 보화를 얻기 위해 과거의 자랑거리를 버렸습니다. 마치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에게는 gain과 loss, 즉 얻는 것과 잃는 것에 대한 개념구분이 뚜렷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 오려는 사람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주님을 위해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도 얻는 것과 잃는 개념이 분명했습니다.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잃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는 보화를 얻는 것에 비하면 잃는 것은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이득이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득을 좇아 살아갑니다. 누구도 손해 보는 장사를 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윤을 남기려 하고, 내가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결과물을 얻고자 합니다. 요즘은 ‘개이득’이란 말을 씁니다. ‘개’란 말은 ‘정말로’라는 뜻의 접두어입니다. 그래서 ‘개이득’은 ‘정말로 큰 이득’이란 뜻입니다. 사람들은 좀 더 싼 가게를 찾아다닙니다. 할인 쿠폰을 좋아하고, 세일을 좋아하고, 적립과 포인트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조금의 이득이라도 더 보고자 합니다. 이렇게도 하는데, 하물며 인생에서 정말 무엇이 이득인지 따져보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해 보는 인생을 살지 말고 이득 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가장 좋은 것을 취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라는 유명한 철학적 가정이 있습니다. 수학자요, 철학자요, 물리학자이며, 무엇보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던 파스칼은 종교개혁 100년 후 계몽주의가 왕성하던 17세기 프랑스에서 살았습니다. 당시를 주도하던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며, 인간이 하나님 앞이 아닌 인간 스스로 존재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인본주의를 설파했습니다. 이때 파스칼은 기독교의 신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그 신을 믿고 사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 하는 것을 논증했습니다. 이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서 ‘파스칼의 내기’란 철학적 가정을 제기했습니다. 한편에는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정하고, 한편에는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과 믿지 않고 사는 것을 가정하여 이 넷의 조합을 만들어 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데 믿는다면 제일 좋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데 믿지 않는다면 제일 나쁜 상태입니다. 한편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데 믿는다면 세속적인 약간의 손해가 있고, 존재하지 않는데 믿지 않는다면 이득도 손해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론 내리기를, 기대 값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이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는 회계사인 아버지의 영향력 때문인지 회계학의 두 개념인 gain과 loss, 이익과 손실로써 신앙을 잘 정리하였습니다. 이것을 파스칼의 팡세 233번에 나오는 내용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살아야 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살아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이런 사람은 세상쾌락과 같은 단지 ‘유한한 손실’(finite loss)만을 입으며, 천국에서의 영생 같은 ‘무한한 이익’(infinite gains)을 얻는다. 동시에 지옥에서의 영벌이라는 ‘무한한 손실’(infinite loss)을 피할 수 있다.’ ‘파스칼의 내기’는 확률이론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을 뿐 아니라, 의사결정이론에도 이때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그리스도를 얻을 것인지에 대해 의사결정을 잘 하려면, 적어도 이에 따르는 gain과 loss가 무엇인지는 잘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는 영생을 건 내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에 베팅을 한다면 적어도 더 많은 이득을 얻습니다.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를 찾아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알아나가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빌립보서 서신을 쓸 때 이미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이 알고 체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 알고자 하고, 더 체험하고자 하고, 더 고난에 참여하고자 했습니다. 3:10,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그리스도 자체를 알고자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사랑, 섬김과 인내, 충성과 소망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으로 성화되어 가고자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자체를 목적 삼았습니다. 가장 고상한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을 얻고자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말했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3:18a).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했습니다.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며 죽음에서 다시 살리는 그 권능을 알고자 했습니다. 장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할 참 소망을 주시는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했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 두려움과 허무, 슬픔과 무기력, 절망의 세력을 깨트리고 새 역사를 창조해가게 하는 원동력인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바울은 여기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고난과 십자가는 보통 인간의 마음으로는 회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의 십자가가 부활에 이르는 길임을 알았기에, 확신 있게 고난과 죽으심과 십자가를 알고자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알고 체험하고 동참하고자 한 영적 열망은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변함없는 기쁨을 주었습니다. 또한 그로 하여금 초대교회의 위협과 박해와 순교의 상황에서도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섬길 수 있게 했습니다. UBF의 설립자이신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1998년에 그분으로서는 한국에서의 마지막 세계선교보고대회를 섬겼습니다. 이때 벧전4:13절,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는 주제 메시지를 통해, 우리가 복음역사를 섬기며 고난당할 때,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진정성이 있었던 것은 사무엘 선교사님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배우는 삶을 살고자 일생 매진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UBF의 정신입니다. UBF는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고, 그 부활의 권능으로 복음역사를 섬기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죄로 인한 고난, 삶의 십자가만 질 우리들이 주와 복음을 위해 자기십자가를 지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큰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하며 그 죽으심을 본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12절-14절에서 어떤 마음 자세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해야 하는지 말합니다. 이미 얻었다, 온전히 이루었다는 마음을 버리라고 합니다. 자족하는 마음, 자기자랑 하는 마음, 안주하는 마음을 버리라 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라 합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세월이 빨리 간다고 느낍니다. 마음이 조급해지고, 푸념과 두려움, 과거에 대한 회상과 자랑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예전의 실수와 허물, 이룬 업적 등은 이미 지나 간 것이고 돌이킬 수 없습니다. 경주자가 뒤로 뛰어가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앞으로, 미래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믿고 앞에 있는 푯대인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달려간다’는 말은 press on, 즉 저항을 해치고 단호하게 밀고 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푯대를 향해 달려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을이 되면 우리는 얻고 싶은 것을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원하는 대학, 학원, 좋은 학점, 취업과 승진, 육아와 자녀교육, my car, my house, 신형 스마트폰, 친구, 가을 여행, 엔터테인먼트, 제자양성, 건강한 노후 등을 위해 달려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것을 잘 얻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얻기 위해 달려가겠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가 궁극적인 푯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고자 하는 큰 그림 가운데 이러한 삶의 작은 목표들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얻고도 그리스도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삶의 재앙을 이길 수 없고, 가장 빈곤한 사람이 됩니다. 가장 고상한 지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자 이 가을 힘차게 달려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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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가을 개강특강
말씀 / 빌립보서 3:1-14
요절 / 빌립보서 3:8

                                               그리스도를 얻고자


1.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반복해서 권면하는 바가 무엇입니까(1)? 이것이 어떤 점에서 그들에게 안전합니까? 그들이 삼가야 할 것들이 무엇입니까(2)? 어떤 자들이 참 할례파입니까(3)?

2. 바울은 어느 정도로 육체를 신뢰할 만합니까(4-6)? 이것들이 왜 이스라엘 사회에서 육체를 신뢰할 근거가 될까요?

3. 바울의 가치관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7)? 그가 과거에 유익하던 것을 해와 배설물로 여긴 것은 무엇을 얻었기 때문입니까(8)?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요 17:3; 롬 7:24-25; 골 2:3,9) 이 축복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9)?

4. 바울이 간절히 알고자 하는 세 가지가 무엇입니까(10)?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 16:15-16; 벧후 3:18) 왜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했을까요? (롬 6:4, 8-9)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은 왜 중요할까요(10b-11)? (빌 1:29; 막 8:31,34)

5. 바울의 푯대가 무엇인지 12-14절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그는 뒤에 있는 것과 앞에 있는 것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갖습니까(12a, 13)? 그리고 푯대를 향해 어떻게 나아갑니까(12b, 1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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