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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가을학기 특강(3)
성경본문 시편 19:1-14
전한날짜 2017-09-17
ㆍ조회: 394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특강 (안암 2017.9.17)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시편 19:1-14
요절 19:7a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소성시키며…”
   올해는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킨지 500주년이 됩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독일 뷔텐베르크 성당 정문 게시판에 95개 조항의 개혁문을 붙인 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루터는 로마 카토릭 교회의 그릇된 교리와 부패에 항거하여 성경에 기초한 복음진리를 수호했습니다. 이것이 전 유럽에 폭풍같은 반향을 일으키자 1521년 1월에 레오 10세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습니다. 그해 4월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알 5세의 주재 아래 보름스에서 제국회의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이곳에 소환되어 황제와 수많은 권력자들 앞에 서서 그의 주장을 취소하라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이때 그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성경의 증언과 가장 분명한 논리로써 본인을 설복시킬 수 없는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인의 양심을 승복시킬 수 없는 한 본인은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 …내가 여기 섰나이다. 저는 그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결국 루터는 단죄를 받아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복면을 쓴 사람들에게 납치를 당해 어디론가 끌려갔습니다. 제후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보호하기 위해 납치를 가장해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은밀하게 숨겨 두었습니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그는 수많은 저서들을 집필했습니다. 특히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이는 성서의 대중화 뿐만 아니라 독일어 통일에까지 지대한 공헌을 끼쳤습니다. 당시에는 교황이 허락한 성직자들 외에는 아무나 성경을 읽을 수 없었고, 또 성경은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루터가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성경은 어떤 특정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다 쉽게 구하고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제는 성경을 너무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식이 홍수와 같이 범람하는 시대에서 성경은 수많은 지식 중의 하나가 되었고, 때로는 시대에 뛰떨어진 책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성경이 아무리 무거워도 들고 다니면서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을 나타내었지만 이제는 성경이 스마트폰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귀찮게 들고 다닐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을 잘 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살기 보다는 자기 생각과 경험과 느낌대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넘쳐나는데 성경이 실종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재 발견해야 합니다. 이 시간 시편 19편 말씀을 통해 성경을 재발견하고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시편 19편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1-6절은 하나님의 자연계시, 7-9절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 10-14절은 성경에 대한 다윗의 반응과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자연 계시를 통해 자신의 신성과 권능을 드러내시고, 특별 계시를 통해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히 1:1-2).
첫째, 하나님의 자연 계시 (1-6)
   오늘날 우리는 너무 현실에 얽매여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하늘을 바라볼 여유조차 없습니다. 어쩌다가 하늘을 바라보면 서울의 하늘은 공기오염으로 인해 뿌옇게 보여 시적 영감을 얻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그 옛날 다윗은 청명하고 고고하고 광활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 여기서 하늘(heavens)은 복수로서 우주를 말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광활한 우주를 창조하셨음을 선포합니다.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히 생기거나 진화한 것이 아니라 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반짝이는 수천 수만의 별들, 엄청난 크기의 태양계보다 훨씬 큰 은하계,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우주 공간의 광활함이란 실로 상상을 초월합니다. 미국 나사는 허블망원경으로 관찰한 결과 우주에는 은하가 2천억 개 있다고 전망했으나 새로운 분석 결과 이보다 10배나 많은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은하마다 2천억 개의 항성이 있다고 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고 궁창은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세계”를 보라고 외칩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일은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달함으로써 잠시도 중단됨이 없이 계속됩니다. 낮과 밤은 하나님의 영광이 잘 나타나도록 커뮤니케이션합니다. 여기에는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되 떠들썩하게 하지 않고 소리없이 움직입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한 후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말로 인해 문제가 끊일날이 없습니다. “Easier said than done” 이라는 영어표현이 있습니다.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 말없이 묵묵이 열심히 일하시며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를 유지해 나가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4b-6절까지는 해에 관한 시적 묘사입니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해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고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해는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물로서 그분의 창조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음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해를 위해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저자는 해를 인격화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5-6a)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은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의 얼굴이 아닐까요? 루드베키아(Rudbechia)라는 꽃이 있습니다. 이 꽃은 노란 빛의 꽃잎이 하도 강렬하고 화사하여 태양의 정열을 한가득 품은 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해에게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정열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또한 해는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조금도 지치지 않고 힘차게 달리기를 기뻐하는 장사, 곧 챔피언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해의 크기는 백만 개의 지구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거대합니다. 이런 해가 달리기를 365일, 100년, 아니 수천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줄기차게 달리고 있습니다. 해가 달리기를 멈추는 날은 지구의 종말일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달리기 선수가 어디 있을까요? 우리에게 이런 신실한 달리기 선수 챔피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저자는 해의 온기에 대해 노래합니다.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6b). 지구는 자전하면서 태양을 공전하고 태양은 무서운 속도로 이동합니다. 그러면서 그 빛에서 피할 수 없도록 지구 곳곳을 골고루 비추어 줍니다. 태양의 표면 온도는 섭씨 6000도가 된다고 합니다. 지구가 조금만 해에 가까워도 그 열기 때문에 타 죽게 되고, 조금만 멀어져도 얼어서 죽게 됩니다. 그러나 지구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태양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정확하게 자전을 하고 태양을 주위로 공전을 함으로써 그 온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태양은 거의 무한대로 엄청난 에너지를 지구에 공급함으로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살아갈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오묘한 창조주의 솜씨입니까?
   우주의 신비, 지구의 신비, 생명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빅뱅이나 진화론에 기초해서 설명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과연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생긴 것일까?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어떻게 생명체가 생겨날 수 있단 말인가?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물이 어떻게 인간과 같은 고등생물로 진화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창조과학은 미신이고 진화론이 사실인양 너무 속고 지낸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얼마전에 중소기업 장관으로 임명된 박성진씨에 대한 청문회를 하는 과정에서 그 분이 창조과학회에서 활동한 것을 문제 삼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창조는 미신에 불과한데 진화론을 부정하고 성경 내용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창조과학회 이사로 활동한 사람을 어떻게 장관으로 세울 수 있는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들을 때 로마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로마서 1:20절은 말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통해 창조주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과 광대하심를 드러내십니다. 또한 그의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지혜와 창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연계시를 통해 우리는 세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첫째로, 자연은 우리를 겸비케 합니다. 욥기를 읽어보면 1-37장까지는 욥이 당한 재앙에 대해 욥과 그의 세 친구들의 논쟁합니다. 욥은 자신의 순전함을 주장하고 세 친구들은 욥이 분명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과응보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각자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말합니다. 그래서 37장까지는 누가 옳고 그른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38-41장까지 무려 4장에 걸쳐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그리고 창조에 대해 무수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38:4)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38:33)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38:36) 이에 욥은 대답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 42:3-6). 요사히 미국은 허리케인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난 달에는 허리케인 하비가 텍사스를 덮쳐 1900억의 피해액을 내었고, 시속 160km 로 폭풍우를 몰고 온 허리케인 어마(Irma)는 카리브해 섬나라들을 초토화시키고, 플로리다에 상륙하여 약 2000억 달라(226조 2000억원)의 피해를 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연의 위력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비로소 내가 얼마나 무력하고 초라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겸비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인생의 존재의미와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의 상관관계에 대해 논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인간은 무지와 공허와 빈곤과 연약함을 알지 못하고 자기 기만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할 때 비로소 자신의 참된 모습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사 6:5). 베드로도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눅 5:8).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비로소 나의 참된 자아를 알 수 있고, 인생의 존재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참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요사히 미국에서는 “You are on the wrong side of history”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역사는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이를 지지하지 않는 자는 역사의 흐름을 거스리는 역사의 반역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민의 권리는 인종차별을 반대하고 동성애를 지지하는 것입니다. 특히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거스리는 반역행위로 정죄합니다. 이에 대항하여 최근에 John Piper, J. I. Packer, D. A. Carson, R. C. Sproul, John MacArther, Francis Chan을 위시하여 수많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이sex에 관한 성경적인 입장을 밝히는 Nashville Statement를 내었습니다. 그들은 서두에서 오늘날 서구 사회는 빠르게 기독교 후기 시대가 되어가고 있음을 언급했습니다. 성경이 상대화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점점 비인간화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인간성을 상실함으로 폭력과 부패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동성애가 정상인 것처럼 인식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갈 때 참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고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특별 계시 (7-14)
   우리는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더듬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알기는 어렵습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자연계시를 통해서는 다만 핑게할 수 없을 정도로만 창조주의 모습이 계시되었으며, 성경을 통해서만이 참된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자연계시는 길잡이요 성경은 선생이라고 하였습니다.  
   7절부터 하나님의 호칭이 “하나님”에서 “여호와”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El or Elohim으로써 전능하신 창조주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혹은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출애굽기 3:14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라는 말씀에서 유래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누구에 의해 존재되어 지지 않고 항상 현재적으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고 결국에는 그 후손 가운데서 메시아를 허락하셨습니다.
   7-9절에는 구약 성경에 대한 6가지 칭호가 나옵니다.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법”입니다. 이 칭호들은 성경의 각각 다른 면을 보여 줍니다. 다이아몬드는 어느 각도로 보든지 찬란한 빛을 발하듯이 성경도 어떤 면으로 보든 생명의 빛을 발합니다. 율법은 ‘토라’로서 구약 성경을 말하고, 넓은 의미로는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신령하고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합니다(롬 7:12,14).  “여호와의 증거”라고 한 것은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또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증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역사의 산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4절에서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계명은 명령입니다. 명령이라는 말은 권위적으로 느껴져서 무조건 반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하시는 명령은 우리를 억압하고 얽어매고 부담을 주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참된 축복과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후 각종 나무의 실과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사단의 악한 계궤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항상 약속이 뒤 따랐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우상 숭배가 가득한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후에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창 12:1-3).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신 후에는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마 6:33).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라고 한 것은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잠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였고(잠 1:7; 9:10),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문이라고 하였습니다(전 13:13).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단순히 두려워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는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섬기고 영화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가 참으로 경외해야 할 대상이 되십니다(눅 12:5). 규례는 심판 또는 판단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성경의 특성과 이를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축복에 대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다윗은 성경은 완전(perfect)하고, 확실(sure)하며, 정직(right)하고, 순결(pure)하며, 정결(clean)하고, 진실(true)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단어들이 성경에 대해 말해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성경은 가장 신뢰할만하다는 것입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완벽한(complete), 손상되지 않은(unscathed), 흠이 없는(blameless), 진실되고(integrity), 진정한(sincerity)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거짓이나 왜곡됨이 없이 진실만을 말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순결하여 불순물이 전혀 없습니다. 정결하여 부정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부정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진리를 말하고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전적으로 모든 거짓과 사기와 속임수와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무오합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딛 1:2; 히 6:18).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신뢰할만한 하나님의 성품을 믿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가장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책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런데 좋은 방향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엔트로비 법칙대로 좋지 않은 방향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변함이 없습니다.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진실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장 믿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 위에 인생의 기초를 놓고 집을 지어 나갈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요동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 때 요동치 않고 가장 확실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성경은 모든 판단의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9절 하반절에서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판단은 공의로우시며 확실하며 편벽됨이 없이 다 의롭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롬 2:6-8). 우리는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선한 일을 하며 의롭게 살고자 애씁니다. 그러다가 때로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하고 억울하게 누명을 써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계속해서 참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그의 판단은 다 의롭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성경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유용합니다. 우리는 성경은 오래 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있으나 시대에 뛰떨어진 책이요 오늘날 우리에게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하여 어느 누구에게나 유용합니다. 문화는 각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고 발달해 왔지만 인간의 본성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약 2천년 전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서신입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1-4).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인간 본성은 예나 지금이나 꼭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합니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음란합니다. 자기를 자랑하기 좋아하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뒤에서 남을 비방하고 험담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죄악된 인간성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고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만이 죄악된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켜 새사람되게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으며, 이 땅에서 의미있고 보람되고 열매맺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버나드 램(Bernard Ramm)이라는 성경학자는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필수적인 모든 것이 성경에 분명하게 계시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의견이나 철학도 아니고, 어떤 위대한 사람의 사상도 아닙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의 행복을 위해 특별하게 계시하신 사랑의 편지입니다. 성경은 대부분 이야기체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들려 주시는 최고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랑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만 우리 인간을 영원한 정죄와 파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다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계실 동안 쉴사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심으로 인간들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심어주셨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실제 삶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인간의 최대 원수인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영생의 문을 여셨습니다. 세상에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아무 값없이 무조건적으로 용서해 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에게 참된 자유함과 평화와 기쁨을 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오직 예수님 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 삶에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딤후 3:15-17).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이 중에서 시편 19편에 나타난 몇가지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소성시킵니다(7a). 우리는 힘든 세상을 살아가면서 낙심하고 실의에 찰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인간관계 문제로, 자녀 문제로, 재정 문제로, 건강 문제로, 또 나의 죄 문제로 우리 영혼이 지치고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해야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킬 수 있겠습니까? 독실한 이슬람 신자에서 변화되어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내이빌 쾌라시”(Nabeel Qureshi)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할아버지가 이슬람 선교사인 골수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코란을 암송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러던 중 의대공부를 하면서 친구의 도움으로 성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인생 문제로 인해 너무 괴롭고 힘들고 지쳐 위로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는 코란과 성경을 나란히 놓고 읽음으로 마음의 위로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코란에서는 한 줄의 위로의 말씀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위로의 말씀으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나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 얼마나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키는 위로의 말씀입니까? 결국 그는 성경의 진실성을 믿고 예수님을 만나고 기독교 변증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스피릿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사람에게는 스피릿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스피릿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시련도 극복할 수 있고, 사단의 유혹을 이길 수 있고 진정으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스피릿이 넘치는 삶은 말씀을 통해 영혼이 소성될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7b). 지혜와 지식은 다릅니다. 지식은 외부로부터 쌓은 것이지만 지혜는 지식을 응용할 줄 아는 힘입니다. 또한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하고 그릇된 것으로부터 방어하고, 또 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식은 많지만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고, 지식은 부족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승리의 인생, 의미있고 열매맺는 인생을 살려면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지혜를 배울 수 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쳐 주고 참되고 열매맺는 승리의 인생을 사는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고 하였습니다(약 3:17). 사람들은 실리를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진정으로 유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이사야 48:17b절은 말합니다.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사람들은 재미있는 것을 찾아 이리 저리 헤멥니다. 솔로몬은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 본 후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고백했습니다(전 1:2; 2:1-11). 세상의 재미는 잠시 뿐이고 그 후에는 공허함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진정한 영혼의 기쁨을 줍니다. 또한 세상의 여러가지 유혹과 욕심으로 마음의 눈이 흐려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 말씀은 우리의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하나님 나라의 기업의 영광이 풍성함이 어떠한가를 깨닫게 해 줍니다(엡 1:18).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롭습니다(9).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으로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가고 하였고(잠언 14:27), 또한 여호와를 경외함이 보배니라고 하였습니다(사 33:6).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게 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요셉과 같이 범죄하지 않게 되고 사람이 보든 안보든 맡은 바 일을 충성되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영원까지 이릅니다(요한일서 2:17).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10-14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다윗의 반응과 기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금과 송이꿀에 비유하여 순금보다 더 사모하고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금을 사랑합니다. 특히 시대가 불안할수록 금값은 치솟습니다. 금의 순도를 나타내는 단위를 캐럿(Karat)이라고 합니다. 순금은 99.99% 순도를 가진 금으로 24k라고 합니다. 금은 모든 재화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세상 모든 재물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순금에 비유한 것은 말씀은 이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송이꿀이란 벌집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넘친 덩어리 꿀을 말하는 것으로써 최고의 즐거움을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에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처음 유치원에 입학할 때 아버지가 동행합니다. 첫수업은 히브리어 알파벳을 쓰고 그 위에 꿀을 바른다고 합니다. 그 꿀을 빨아 먹게 한 후 아버지가 자녀에게 가르칩니다. “아들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매일 송이꿀보다 더 달게 먹을 때 네게 복이 되고 생명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저주와 사망이 올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경고를 받고 또한 이를 지킴으로 상급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상급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과 손해의식에 시달리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때로는 죄의 소욕에 이끌려서 죄를 짓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죄를 범하면 마음의 평화를 잃고 죄의식에 시달리게 됩니다. 자기 허물을 깨달으면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데 자기 허물을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과 같아서 나의 참된 모습을 비추어 줍니다. 죄 짓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해 주고,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의 허물을 교정 받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다윗은 죄의 세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체험했습니다. 죄에는 세력이 있어서 죄를 지으면 노예가 되어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간절히 기도합니다. “자기 허물에서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12-13). 더 나아가 다윗은 말 뿐만 아니라 마음의 묵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소원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4).  
   오늘날은 인터넷의 발달로 사람들은 원하는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식은 많지만 지혜가 없고 스피릿을 상실하고 생명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지혜를 얻고 스피릿 있는 삶을 살려면 성경을 재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은 많은 책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한 분 한 분이 말씀을 통해 지혜를 얻고, 기쁨을 얻고, 자신을 바로 잡고, 심령의 눈이 밝아져서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스피릿이 넘치는 인생을 살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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