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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다니엘서1강
성경본문 다니엘서 1:1-21
전한날짜 17/10/01
ㆍ조회: 520  
뜻을 정한 다니엘
2017년 가을학기 다니엘서 공부(1)
말씀/다니엘서 1:1-21
요절/다니엘서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우리가 앞으로 2달간에 걸쳐 다니엘서를 공부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일사각오의 신앙입니다. “죽어도 좋다. 그러나 나는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에서는 이런 목숨건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는 거대한 인본주의 물결에 치여 기가 죽어 있어 보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영적 위기 의식을 갖고 어찌하든지 이 세태에 휩쓸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자하는 분명한 믿음을 나타내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의 삶속에 이런 믿음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참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아주 먼 옛날 2600 여년 전, 바벨론이라는 대제국 궁중 안에서 당장에 목을 내놓아야하겠지만 뜻을 정해 목을 곳곳이 세우고 용감한 신앙의 싸움을 하는 포로소년들의 이야기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신앙투쟁은 잠자는 우리는 영혼을 화들짝 놀래키며 깨우는 힘이 있습니다. 이 신앙은 살아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그들은 그때 14세 –15세 정도였다는데 그 신앙의 순수함과 위대함은 모든 시대를 지나 오늘 우리에게 까지 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이 이들의 믿음을 배우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도 어떤 작은 신앙의 결심을 하며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서는 은혜를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Ⅰ. 다니엘의 결단(1-7)
  1절, 2절을 보십시오.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3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해 유다를 함락시켰습니다. 그는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 여기서의 ‘얼마’는 사실상 거의 전부에 해당함 – 시날 땅 자기 신 곧 마르둑 신전 보물창고에 두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이후에도 두 번 더 침공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보물과 함께 모든 백성, 모든 지도자, 모든 용사, 장인,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끌려간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처형당해 죽거나 아니면 그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천지를 창조하신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는 백성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망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의 물건들이 우상의 신전에 전리품으로 옮겨진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은 패하고 우상이 승리하고 영광을 받는 것과도 같은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2절 첫머리를 보십시오. 성경은 ‘주께서’ 이 모든 일을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범죄하며 우상 숭배를 했을 때 주변에 강대한 나라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하시고 무너뜨리시고 빼앗아가서 끌고 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멸망은 오히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명백한 증거가 될 뿐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운명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파워게임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운명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이 있느냐, 그 말씀에 대한 믿음과 결심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교회의 믿음과 기도를 보십니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우리가 더욱 기도하며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분명한 방향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나라를 지켜주시고 만민구원역사에 귀하게 사용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 우리 민족에게 복음을 허락하시고 이만큼 성장하게 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욱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느브갓네살은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명하여 이스라엘에서 인재를 뽑아 양육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장차 왕을 모셔서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만큼 선발 기준이 엄격하고 수준 높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첫째는 왕족이나 귀족 출신으로 가문이 좋아야 했습니다. 둘째는 신체적으로도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키가 크고 잘 생긴 소년이어야했습니다. 셋째는 지혜가 있어야하고 넷째는 학문에 익숙해야합니다. 이렇게 뽑힌 그들은 장차 지도자로 세워지기에 손색없는 기본을 갖추었습니다.
느브갓네살은 이들은 궁중 장학생으로 세워 갈대아어 language 코스를 밟게 하고 당시 최고급 문화 문명의 중심부에서 바벨론의 선진학문을 공부하게 했습니다. 이런 그들은 삼년 후 test를 받고 바벨론의 영광 의 중심부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은 어떤 곳입니까?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을 끼고 있는 바벨론 지역은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입니다. 특히 이곳은 초생달 모양의 지극히 비옥한 땅을 중심으로 일찍이 농업이 발달하고 이 농업을 위해 천문학과 수학, 기하학이 발달했습니다. 원의 각도를 360도로 잡고 6등분하여 60진법을 개발해서 한 시간은 60분, 1분은 60초로 계산하고 1년을 12개월로, 한달은 30일로 정하며 3,4년마다 윤달을 두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상업이 발달과 함께 회계학이 발달했습니다. 지폐, 영수증, 어음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미 일차방정식과 이차 방정식을 이용해 미지수를 풀고 있었습니다. 고고학의 증거에 의하면 바벨론은 그 당시 요즘 컴퓨터로나 가능한 알고리즘을 개발해 이자율를 계산하기 했습니다. 건축술 하나만 봐도 그나라가 어떤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을 가운데 두고 세워진 바벨론은 큰 성 외벽과 성 내벽으로 이중으로 둘러싸여 있는 큰 도시입니다. 성벽들은 광택제가 칠해진 벽돌로 만들어졌고 성문과 망루들은 유리빛 남색 타일로 치장되었습니다. 성안에 들어가면 거대한 마르둑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천정은 금과 은으로 덮여 있었고 엄청난 마르둑 신상과 그곳으로 오르는 계단도 금으로 주조되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랑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만들었는지 오늘날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바벨론의 공중 정원(Hanging garden)이 있었습니다. 고고학의 확언에 의하면 이 바벨론은 그리이스나 로마제국이 가장 번성할 때의 아테네나 로마보다도 더 큰 도시였고 위풍당당하며 눈부시도록 사치스러운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예술과 학문, 그리고 그 풍요와 웅장함은 그곳에 끌려간 사람들의 모든 것을 녹여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이 바벨론을 보고 이렇게 노래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 바벨론이여, 너를 보는 사람마다 다 기쁨에 넘친다. 바벨론에 사는 사람마다 그의 생명이 길어지고, 바벨론을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마다 자기 어미를 죽이는 사람같다.’ 그래서 누구든 이곳으로 끌려 들어가는 순간부터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자신들이 자랑하고 자부하던 조국의 문화나 학문, 그리고 신들은 너무나 보잘 것 없게 여겨지게 됩니다. 느브겟네살에게 선발된 소년들도 이 성에 들어서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지고 말문이 막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그곳 궁중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장차 이 위대한 제국의 중심부에서 왕의 신하가 된다는 것은 참 영광 중에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코 망할 것 같지 않은 이 거대 제국의 심장부에서 각종 특권을 누리는 것은 생각만해도 가슴 뛰는 일이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들은 왕이 지정한 진미와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날마다 쓸 것을 공급받게 했습니다. 최고의 문명, 최고의 왕을 위한 음식은 얼마나 맛있겠습니까? 이렇게 아무런 부족함 없이 환경 가운데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공부할 때 이들이 3년 후에는 어떤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그들은 바벨론의 충신이 되어 나오게 됩니다.

3절 끝을 보면 뽑힌 그들 중에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습니다.  환관장은 이들의 이름을 바벨론식으로 바꾸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다"라는 뜻인데 "벨이 보호하신다"라는 뜻인 벨드사살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냐’는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인데 ‘사드락’ 곧 달의 신 아쿠의 명령으로, 미사엘은 ‘하나님과 같은 분이 어디 있으냐’인데 메삭 - ‘아쿠같은 분이 어디 있느냐’로, 아사랴은 ‘하나님은 도와주신다’인데 아벳느고 - ‘느고의 종’이란 뜻으로 바벨론 이방 신과 관련된 이름으로 바꾸어졌습니다. 이름을 이렇게 바꾼다는 것은 바벨론의 거대한 신 마르둑 앞에서 망해버린 너희 나라의 신을 붙들고 사는 것이 이제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유다 소년들의 종교혼을 빼고 개종시켜 느브갓네살의 충성된 종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II. 다니엘의 믿음의 결단(8)

  그런데  8절을 보십시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은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고자 뜻을 정했습니다. 이런 결단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왕의 계획과 그의 특별한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포로로서 주제넘는 항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곧장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다니엘이 이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다니엘은 죽음을 각오하고 이런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이런 그의 결단에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첫째, 신앙의 순결을 지키고자 함입니다. 왕의 내려주는 음식에는 유대 율법에서 부정한 것으로 규정한 짐승들 많았고 또 그것은 우상 제단에 바쳐진 음식이었습니다. 포도주는 제주(祭酒)로서 우상 앞에 부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먹는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율법을 지켜 온 다니엘에게는 신앙 양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그 우상을 영접하고 그 우상에 속하겠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죽을 각오를 하고  이것을 단호히 거부하였습니다.
다니엘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 가지 극단적인 오류속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까지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흩어 버리셨으니  우리는 더 이상 선택받은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과의 모든 관계를 철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이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지켜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는 이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니 여호와 하나님은 더 이상 유일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벨론의 신 마르룩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패하는 것을 보니 이 하나님을 더 이상 절대시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저 많은 신들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뭐하려고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고  살아가야할까요? 이제는 율법을 지켜야할  신앙명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벨론의 신과 그 문화에 동화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다니엘은 이런 사람들과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만이 절대 하나님이시며 유일한 하나님, 참 경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죽을 각오를 하고 자기 신앙의 결단을 한 것입니다. 세상이 어떠해도 좋다. 그러나 내 하나님, 우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다. 나는 이 하나님 앞에 신앙을 지키겠다 하며 세상이 가져다주는 온갖 특권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의 몸과 마음을 순결하게 지켜 하나님께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둘째, 그는 이 작은 결단을 통해 거센 이방 문화에 도전했습니다. 다니엘은 자기가 처한 상황이 신앙적으로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방으로 우상문화, 물질문화, 쾌락문화로 빼곡이 둘려 싸였음을 알았습니다. 이때 자신이 왕이 요구하는대로 살아가다가는 이내 그 문화에 동화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에 스스로 영적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죄악된 문화 속에서 나를 지킬 수 있을까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장에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곧 왕이 주는 달콤한 음식, 곧 그 나라 그 문화의 영광을 거절하며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3명의 친구들에게 자기의 뜻을 말하고 그들을 동지로 얻었습니다. 그들은 이 결단 앞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상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대 영적 각성 운동이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신앙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대제국 바벨론의 명령 아래에서 결사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가장 큰 문제점 중에 하나는 자기가 주라고 고백하고 믿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다원화되어서 이 종교에도 진리가 있고 저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는 주장이 넘치고 있는데 유독 기독교만 절대 진리를 외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신앙은 달라도 그들은 우리들의 이웃이 아닌가? 또 내가 그들 앞에서 내가 믿는 하나님을 바로 세운다고 누가 알아주기나할까 유별나게 구는 것은 이내 허접하게 끝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잠잠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어느틈에 이 세대의 인본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와 타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도 진리를 말하고 사명을 말하기보다는 구복적이 되었고 청년들은 별 문제의식 없이 쾌락문화에 빠져버립니다. 이제는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 몸과 마음을 순결하게 지켜야한다는 의식이 한없이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그 어떤 분명한 증표가 삶속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어느틈에 결단이 없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결단하면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뒤섞여 사는 것은 모두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단없는 신앙은 당장에는 편해 보이지만 그것은 이미 죽은 신앙입니다. 죽은 물고기가 물에 둥둥 떠서 떠내려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없이 무력합니다. 주여 주여 하고 말은 하지만 주님 앞에 보여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주자 하나님이시며 구속주 하나님이 맞습니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 하나님이시며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가 맞습니까? 이렇게 해서 우리를 영원한 지옥고통에서 구원하여 영생의 나라로 인도하실 바로 그분이 맞습니까? 우리는 주일 예배를 드릴 때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합니다. 우리는 이때 우리 입술로 말합니다. ‘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리의 신앙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종말론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전제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차 오셔서 이 세상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실 예수님을 믿고 기다리는 신앙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심판 받을 이 세상 유혹에 빠지거나 두리뭉실 적당히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시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 세정의 죄악된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히 지켜나가고자 하는 뜻을 정하고 이에 따르는 구체적인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일이 더 커 보이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계명이 어떠하든 오늘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고 행복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하나님 구속사에 쓰실 수도 없고 축복해주실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언제나 결단을 수반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세상과 구별하고 자기를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그렇다고 이런 신앙의 결단은 위대한 어떤 것을 행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대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어찌보면 누가나 할 수 있는 작은 믿음의 결단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어떤 영적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이 위기를 이겨나갈 것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이것을 위해 신앙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직장 다니는 목자님은 직장의 술문화가 자기 신앙의 순결을 흐린다는 것을 알고 결단하고 단호히 술 문화를 거절하며 신앙을 지킵니다. 회사 상사에게 찍혀 앞으로 많은 불이익이 예상되지만 그렇다할지라도 단호히 술잔을 거부합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바빠서 말씀을 볼 시간이 없어 영적 기갈로 고통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찌하든지 말씀을 붙들어야겠다며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 본문 말씀을 필사하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이 결단이 무슨 효과가 있을까요? 그런데 이 분은 이러기를 일년하는 동안 말씀을 받고 마음 속에 온갖 인간적인 생각을 떨쳐내고 이제는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믿음 생활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밤늦도록 게임하고 예배에 나오지 못합니다. ‘예배에 왜 못왔어요?’ 하고 물으면 간밤에 게임하느라고 늦잠 자서 그래요. - 이게 말이 됩니까? 지성인이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이렇게 말하면 자기 자신이 비참하지 않습니까? 게임을 결단하고 일찍 자야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주일을 지킬 때 마음의 행복이 있고 그 믿음이 성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성의 유혹, 물질의 유혹에 빠져있는 자기에 대한 위기 의식을 느낍니다. 이러다가 내가 언제 제자로 성장한단 말인가 하면서 말씀 카드를 들고 밤낮외우면서 머리 속에 온갖 헛생각을 물리칩니다. 우리가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 가운데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에 대해 고민하고 적어도 한가지,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어떤 영적 결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얼핏 사소해보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결단이요 하나님이 축복하시며 영광을 받으시는 결단입니다. 그리고 그 결단은 언제나 효과적입니다. 그것이 새벽기도의 결단이든지, 하루 세 개씩 써보는 감사의 결단이든지 말씀을 20분씩 읽겠다는 결단이든지, 전도를 나가겠다는 결단이든지, 이웃을 위해 써야겠다며 모아두는 저금의 결단이든지 형제를 위해서든 교회를 위해서든 어떤 결단이라도 드리면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우리를 이 시대를 이길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빚으십니다. 시대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이 더 문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전능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신데 우리에게 마음의 정함이 없으니 하나님이 오지 못하실 뿐입니다. 다니엘과 같은 어린 소년들도 사느냐 죽느냐하는 극한 상황에서 자기목숨을 내놓고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는데 우리가 어떤 결단이든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왜 다니엘서 본문을 들고 우리 앞에 오신 것일까요? 너의 믿음이 어디있느냐, 너의 결단은 무엇이냐. 언제까지 그렇게 살 것이냐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어떻게 성장해야하는가 생각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누구든지 뜻을 정해 하나님께 나오면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시고 도와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결단한 사람을 도와주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III. 다니엘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9-21)
  다니엘이 믿음의 순결을 지키고자 뜻을 정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첫째로, 실제적인 승리를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은혜를 입게 하시고 실제 그들이 열흘동안 채식을 하게 하였습니다. 열흘 후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였습니다. 이로서 그들은 채식을 하며 바벨론 궁중 한 가운데서 신앙의 순결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지혜와 명철과 비젼을 주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3년 기한이 차자 느브갓네살 왕은 이 모든 사람들, 박수, 술객들을 불러 놓고 실력을 테스트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이 시험을 통해 그들의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줄 알았습니다. 이는 세상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종일 책상에 앉아 있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믿음과 삶 속에 결단이 있을 때 머리가 맑아집니다. 하나님은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는 이외에도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아는 신령한 은혜도 주셨습니다. 이로서 그는  세상 역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주셨습니다. 시 24 : 3,4절은 말합니다. “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다니엘과 그 세친구들은 신앙의 순결을 지키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않고 투쟁하므로 여호와의 산, 즉 은혜와 능력 산에 올라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특히 다니엘은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들어서도 여전히 궁중에서 쓰임받으며 이스라엘 회복의 역사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죄악된 시대에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와 같이 믿음과 함께 신앙의 순결을 드리모 이 세상의 죄악을 이기고 하나님 구속 역사에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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