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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다니엘서 제 3 강
성경본문 다니엘 3:1-30
전한날짜 17/10/15
ㆍ조회: 410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2017년 가을학기 다니엘서 3강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말씀: 다니엘서 3:1-30
요절: 다니엘서 3:17,18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첫째 계명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서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런 만큼 열정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되 정말 뜨겁게 믿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가슴 속에 있는 내 신앙의 열정이 다시 불타오르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들의 믿음은 세상이 쓰러뜨릴 수 없는 절대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믿음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늘 내타내며 승리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당시 포로가 되어 곳곳으로 흩어져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큰 위로와 확신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과거 바벨론 시대와 같은 우상과 불신의 시대요, 기독신앙에 대한  위협과 회유, 그리고 이에 따른 타협으로 얼룩져있습니다. 이런 때 진실된 많은 신자들이 마음의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다니엘의 세 친구의 믿음과 도전, 그리고 승리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우리의 심장은 뜨거워집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들처럼 확신에 찬 신앙, 하나님께 대한 열망과 결단이 있는 믿음을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Ⅰ.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1-18)
 1절을 보십시오.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신상은 엄청나게 큰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높이가 약 27m, 너비가 2.7m로써 10층 건물의 높이에 해당되는 거대한 것이었습니다. 또 그것은 놀랍게도 모두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신상은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바벨론 도의 두라 평지의 중앙에 우뚝 세워졌습니다. 이 금신상은 햇살이 비추이면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찬란히 빛났고 땅끝에서도 그 광채를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두라 평지는 티그리스 강 건너 편에 있는 넓은 평원을 말합니다. 바벨론 도시 중심부로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는 것을 생각해볼 때 느브갓네살 왕은 각별한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이곳에서 행사를 준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BC 250 년 경에 알렉산드리아 학자 70명이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Septuagint라 부르는 성경이 있는데 여기에 의하면 느부갓네살 18년(B.C 585년)에 이 금신상 낙성식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해는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그 다음 해입니다. 그는 정복전쟁을 마친 후에 제국 내에 모든 권력을 자기에게 집중시키며 그 권세에 복종시키며 자기 영광을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이 때 그는 과거 자기 꿈에서 나온 신상의 금 머리가 자기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는지 다른 것은 다 잊고 이것만 기억하여 이런 큰 금신상을 세운 것입니다. 금은 영원을 의미하고 이 금신상이 큰 것은 바벨론 제국의 위대함을 상징한 것입니다. 느브갓네살은 이 금신상 앞에 모든 신하들이 다 절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국 내에 있는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들이 예외 없이 이 금신상 낙성식에 참석하도록 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바벨론 도를 다스리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 예식에 참석해야만 했습니다.

낙성 예식 준비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 예식은 실로 영광스럽고 장엄했습니다. 금신상은 당대 최고의 조각 예술가들이 동원되어 만들어졌습니다. 이 금신상은 낙성식을 위해 바벨론 상징의 거대한 푸른 색 천으로 기리워있었습니다. 예식장 중앙 상단에는 황금빛 로얄 박스가 놓이고 거기에는 느부갓네살 왕과 왕후가 앉았습니다. 한 계단 낮은 곳에는 장관급 관리들, 그 아래 자리에는 바벨론 속국의 왕들과 각 나라의 대사, 고위관리들이 자리 잡았습니다. 또한 한 쪽에는 수백 명으로 구성된 바벨론 로얄 오케스트라단이 ‘바벨론이여 영원하라’를 연주하고 있었고.  왕궁 친위대와 수많은 군사들이 정복을 하고 창과 칼을 번쩍거리며 행사장 좌우에 도열해 있었습니다. 예식장 주위에는 수많은 오색찬란한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행사의 규모와 화려함, 엄숙함에 압도되어 왕이 세운 신상을 보고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식장 옆에는 뜨거운 풀무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것이 낙성식이 끝난 후 피로연 때 바비큐를 구우려고 준비한 것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왕의 명령할 때 금신상에게 엎드려 절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을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항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공포에 시달려야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는 어떠했을까요?

드디어 개막을 알리는 팡파레가 울리고 낙성 예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왕이 테이프를 당기자 금신상을 가린 천에 내려오면서 화려하고 장대한 금신상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저마다 ‘와~’하며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금신상 앞에 섰습니다. 그러자 반포하는 자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로 말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 (4-6)." 그리고 웅장한 음악이 울려 나오자 곧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금 신상에게 엎드리어 절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제국과 왕에 대한 절대 복종의 표시로 이 모든 것이 마음에 안들어도 살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고개를 곧게 하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금신상에게 절하는 것은 거부했습니다. 이러면 곧장 풀무불에 던져지는데 그들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이렇게 한다는 것은 생각같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도 사람인데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직 나이가 젊은데 말입니다. 누가 저 무시무시한 풀무불에서 죽고싶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 아닙니까? 그러니 신앙양심을 지켜야한다? 아니야~ 이렇게 신상 앞에서 절하는 것은 단 한번만 하면 되는 거야. 그 시간은 매우 짧아! 이렇게 잠깐 엎드린 후 그때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 되지 않을까? 또한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더라도 자기 목숨과 지위를 잘 보존하여 바벨론에 흩어져 고생하며 살고 있는 동족들을 돕는 것이 진정으로 민족을 섬기는 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처자식을 생각하면  그냥 타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대로 풀무불 속에 던져지면 이후 가족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될까요! 이렇게나 그들은 얼마든지 현실과 타협해볼 수 있는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아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3-6)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므로 그들은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므로’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심지어 저 무시무시한 풀무불 속에 던져진다고 해도 그들은 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데 여기에 무슨 토를 달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 말씀에 우선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행동을 눈여겨 보고 있다가 그들이 곧곧하게 서 있는 것을 보고 왕에게 참소하였습니다.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갈대아 사람들은 그들의 정적이요 경쟁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열등한 식민지 백성이면서도 자기들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하자 시기심과 함께 마음에 원한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바로 이때 고소한 것입니다.  
 그러자 왕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참소를 들은 느부갓네살 왕은 노하고 분하여 당장에 그들을 끌어오라 명하였습니다. 이것은 대 제국의 왕으로서 자존심 심히 상하는 일이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한 일이었습니다. 절대 왕권을 세우고자 하는데 아니 이런 놈이 있다니! 그는 너무 분했습니다. 그것도 자기가 각별히 총애해서 출세시켜준 그들이 그랬다니 그동안의 모든 것을 다 배반당하는 것같이 더욱 분했습니다. 그러나 이러는 가운데서도 왕은 그들을 회유하며 구겨진 자존심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에 왕이 분노를 참고 말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14). 그러면서 다시 엄하게 말하게 위협하였습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누구겠느냐?"(15) 정말 느부갓네살 왕이 그들을 불속에 던지면 그대로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이런 말을 들을 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들도 왕이 자기들에게 각별한 은혜를 베풀어주고 높여주었는데 그런 왕을 이렇게 화나게 하는 것은 웬지 은혜를 배반하는 것 같이 여겨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또 이런 말을 들으면 방금 전에는 결단하고 몸을 곧곧하게 세웠지만 뭔가 이런 기회가 한번 오면 마음이 흔들리기 쉬웠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거 완전히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의 이 말을 듣고 살길을 찾아 순간적으로 타협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회유와 협박은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되고 있습니다. 대학원 연구실에서는 교수님이 주일 예배를 절대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사람에게 “네가 그런 식으로 해서 나와 함께 있을 수 있겠느냐?”며 위협합니다. 그런면 옆에 있던 같은 연구원들이 “야, 야, 지금은 교수님 말을 들어야해. 일단 졸업은 해야할 거 아니니. 이게 현실이야.” 직장에서는 회식 자리에게 술 안마시면 상사가 찍어 놓고 미워합니다. ‘나는 쟤 때문에 술맛 떨어져. 야, 너 회사 다닐거야?’ 하면서 겁주면 당장에 생계가 날라갈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는 제발 UBF만은 나가지 핍박하고 용돈, 등록금 등 여러방법으로 위협합니다. 그래도 계속 말을 안들으면 어느날 갑자기 맛있는 뷔페집에 데려가고 옷도 사주고 하면서 마음을 녹이며 우리의 결심을 무너뜨리고자 합니다. 어떤 때는 어머님이 눈물을 흐리며 ‘아버지가 저렇게 노발대발이시니 이제 교회 그만 나가라. 너 때문에 집안 꼴이 이다. 너 시집가면 그때는 네 마음대로 해. 그리나 지금은 제발 이 엄마 말 좀 들어다오’하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면 정말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 모든 불행의 화근인 것 같이 마음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정말 결혼하고 나서 그때부터 제대로 해도 늦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왕에 대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당신의 말은 대답을 위해 일고의 가치도 없으니 긴 말하지 맙시다. 우리를 당신의 풀무불에 넣으시오. 와~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어디있겠습니까? 그것도 세 사람이 똑같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기상에 이번에는 느브갓네살의 권력이나 그의 금신상이 다 그 앞에 엎드릴 지경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 그들이 한 말은 어떠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들이 이렇게 용감하게 싸움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불이 무엇이요? 당신 손에 있는 권력이 무엇이요? 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요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저 풀무불과 당신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이요. 왕이시여, 우리와 한번 해봅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런 전능한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실 때 10가지 재앙을 쏟아부어 하나님의 권능을 보이셨습니다. 앞에 홍해가 가로막혔을 때는 이 바다를 갈라 그 가운데 마른 길을 내시고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사막에서는 불기둥 구름기둥을 세우시고 밤낮으로 그들을 덮어 보호하시고 40년 동안 만나를 내려 먹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하고자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성경을 기록하면서 그 맨 처음 문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보호하시고자한다면 무엇이 안되겠습니까?

이어지는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들은 살든 죽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 믿음에는 자기들이 원하는대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있지 주권자 하나님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늘 시험합니다. 하나님, 내가 왜 오늘 이꼴인가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를 사랑하시면 내가 왜 이래요? 내게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세요 하고 뭔가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안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의심하지 않는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저것에 원망이 많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상황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영접하지 못하니까 그게 용납이 안되고 그게 여전히 억울하고 슬픈 겁니다. 이러니 하나님 뜻을 도무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어떠했습니까? 이게 다 느브갓네살 때문이야? 하고 말합니까? 그들은 하나님에게도 느부갓네살에게도 원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에게 지금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상에게는 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자기 자신들 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되는 것이지 느브갓네살 왕 당신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다고 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전능하신 하나님이 죽게 하시는데 – 다시 말해 살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신데 죽게하시는 것은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 큰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생을 믿었습니다. 지금 비록 불에 타죽는다고 해도 그 후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이 하나님은 이미 큰 위로요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16세기 종교개혁의 피 비린내 나는 와중에 참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신앙고백서입니다. 이 당시 개혁신앙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로마카톨릭으로 인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약자요, 소수자였습니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과 화형으로 죽어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자기들도 이 개혁신앙을 믿다가 언제 이렇게 죽을지 모를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념은 확고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신앙고백인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문1. 사나 죽으나 당신의 위로가 무엇입니까? 답: 사나 죽으나 나는 내 것이 아니요 내 몸과 영혼은 모두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로 내 모든 죄값을 온전히 치르시고 나를 마귀의 권세에게 자유케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면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시며, 나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분명히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의 성령으로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주시며 이제부터는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그리고 언제라도 주를 위해 살게 하십니다.’

저는 이 1번 문답을 볼 때마다 마음의 큰 감동을 받습니다. 얼마나 순수하고 힘있는 신앙입니까? 내가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인데 누가 내 목숨을 마음대로 건드리겠는가. 나는 주의 것이니 죽어도 주를 위해 죽고 살아도 주를 위해 죽는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그 보혈로 나를 구원해주시고 자기 것 삼으시고 영생을 주셨는데 누가 나의 영혼을 건드릴 수 있겠느냐. 그러니 나는 이제 온 마음을 다하여 언제라도 기꺼이 주를 위해 죽겠노라. -- 이런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예수님 안에서 이 땅에서 사느냐 죽느냐로 무슨 갈등이 있게느냐는 것입니다. 요즘 학생들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계산이 많습니다. 이때 내가 이걸하면 손해보지 않을까? 난 지금 바빠, 알바해야지, 학점 따야지, 취직 준비해야지... 지금은 때가 아니야... 이것 저것 다하면 아무래도 내 인생 망할 것 같은 생각에 마음이 오그라듭니다. 믿음도 오그라들고 그러면 내 하나님도 오그라든 것처럼 보입니다.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 우리가 이성으로만 현실을 바라보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렇게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매여 있으니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그 안에 도전도 없고,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 하는 헌신도 없습니다. 그 마음과 믿음은 이미 식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말한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는 이 말은 이렇게 역사 속에서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의 심장을 뜨겁게 하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주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참된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그도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고 하나님 자체로 기뻐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Ⅱ.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구원하신 하나님(19-30)
 그들의 타협치 않는 분명한 자세로 인해 느부갓네살 왕은 낯빛이 변할 만큼 대노했습니다. 왕은 자존심이 상하고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므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풀무를 평일보다 일곱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그들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느부갓네살은 끓어올랐던 분을 삭였습니다. 그러면서 불속을 들여다 보았는데 아니 거기 네 사람이 그 속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거기 한 사람이 더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신하들에게 ‘우리가 결박해서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그들 결박이 풀렀고 한 사람이 더 있지 않느냐. 네 번째 사람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 같다!’ 이 불 속에 있는 제 4의 존재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상징이며 실제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느부갓네살은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26). 그들이 불에서 나왔는데 사람들이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탄 냄새도 없었습니다(27).  이사야 43:2,3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 ” 이 말씀이 응한 것입니다. 이에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리고 왕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습니다.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찌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였습니다. 결국 그들의 믿음이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타협치 않는 믿음의 사람들을 인정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오늘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죄악의 용광로가 타오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오르는 용광로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이런 주권 신앙이 있다면 세상에 어떤 것이 우리를 굴복시키며 삼킬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나타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우리가 다니엘의 세 친구들과 같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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