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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2018 빌립보서 1강
성경본문 빌립보서 1:1-30
전한날짜 2018/01/07
ㆍ조회: 406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2018년 신년 빌립보서 제1강
말씀 / 빌립보서 1:1-30
요절 / 빌립보서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해마다 12월 31일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새해 첫 일출을 보기 위해 동해로 향합니다. 그리고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담아 기원합니다.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해주세요,’ ‘좋은 학교, 좋은 직장 들어가게 해주세요,’ ‘결혼하게 해주세요,’ ‘사업 잘 되게 해주세요,’ ‘평화통일 되게 해주세요.’ 물론 태양이 그 소원에 응답할 리는 만무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삶의 소박한 소원을 품고 출발합니다. 우리 모두도 새해 좋은 꿈을 꾸며, 그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새해 첫 메시지로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옥에 갇힌 상태에서 썼던 옥중서신 중 하나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여러 차례 갇혔는데,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또 다시 투옥되어 죽음을 직감하며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서신에서 “기뻐하라” 혹은 “기쁨”이라는 말이 열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인생의 끝자락에 감옥 안에서, 그것도 순교를 직감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바울로 인해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입을 옷도 많고, 먹거리도 풍성하며, 거주할 집도 많습니다. 또한 치열한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가능성과 자유, 도전할 기회와 환경이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 뚫고 들어가 안착하기란 맘처럼 쉽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한숨 쉬며 감옥에 갇힌 듯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옥에 갇혀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면,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도전하는가에 따라 결과도 달라질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울이 감옥 안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았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에게 분명한 삶의 가치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을 불타오르게 하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 불꽃을 얻어가기를 기도합니다.

   빌립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모든 교회가 소중하였겠지만 빌립보 교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만난 후 소아시아 지방에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후 바울은 그곳들로 다시 가서 형제자매들의 믿음을 격려하고자 두 번째 전도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여러 성을 다니며 많은 교회를 격려한 후, 북쪽의 흑해 방면으로 가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일이 자꾸 꼬였습니다. 흑해 행 기차를 탄 줄 알았는데 반대로 가는 안디옥 행 기차를 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영이 바울이 가는 길을 막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때 바울의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손짓했습니다. 이는 지금의 유럽 땅에 복음을 전하시려는 하나님의 환상이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방향을 돌려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마게도냐, 즉 지금의 유럽 땅에 첫 발을 디디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빌립보였습니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 곧 으뜸가는 성이었습니다. 이곳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립포스 2세의 이름을 따라 ‘빌립의 도시’라는 뜻을 가지게 된 곳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는데, 로마의 퇴역 군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도시의 모든 시설과 제도가 로마식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또한 근처에 금광과 은광도 가진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곳 빌립보에서 바울은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나 그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고,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었습니다. 이때 그 여종의 주인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다가 간수를 구원해주며 유명한 말을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이때 맺어진 관계성으로 인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복음사역을 열심히 동역했습니다. 무엇보다 빌립보 교회의 복음역사는 이방 세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보편적으로 역사함을 보여주는 첫 사례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화를 돋우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생각할수록 감사하는 마음이 들게 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근심이 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바울이 기쁨으로 기도하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신실하게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계속 받기만 하면 고인 물이 썩듯 심령이 부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받은바 예수님의 은혜를 이웃에게 나눌 때 그 은혜는 맑은 물처럼 흘러넘치게 됩니다. 이런 역사가 빌립보 교회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선한 복음역사를 하나님께서 예수님 재림 때까지 이루실 줄 확신한다며 그들을 칭찬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며 그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이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이 사랑은 지식과 총명에 기초한 분별력 있는 사랑이요, 선한 것을 분별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게 하는 사랑입니다. 또한 바울은 그들이 예수님의 의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의 서신서를 보면, 모범적인 빌립보 교회와 대조되는 문제 많은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 교회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열과 음란과 교리 논쟁 등으로 바울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는 부담스러워 하고 빌립보 교회는 더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서에도 바울이 그들을 인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더구나 바울은 고린도 전후서에서 빌립보서보다 14배나 긴 분량을 쓰면서, 젖 먹이는 유모의 심정으로 간곡히 권면합니다. 오히려 이를 통해 복음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풍성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를 보면 바울이 이 두 교회를 차별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잘 할 때나 못할 때나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교회에 문제가 많다고 등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잘 하는 교회든 잘 못하는 교회든 모두 귀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12절부터 21절에는 바울의 투옥에 대한 사람들의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바울이 투옥되자 한 편에서는 주 안에서 신뢰하며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복음을 더 열심히 전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바울에게 괴로움을 주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에 대한 시기심과 경쟁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을까 의아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봅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바울처럼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들을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면 바울이 배 아파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복음역사가 활발해지면 로마 군병들이 감옥에 있는 바울을 더 괴롭힐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바울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고 화가 날만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자신의 투옥으로 오히려 복음역사가 진전되었음을 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만 전파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는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악을 이기는 길은 선에 충실하게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충실하게 매여 있을 때, 사람과의 갈등을 초월할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문제의 옳고 그름,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존귀하게 되는 것만 보고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 바울에게 왜 그토록 소중한 일이었을까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롬1:16절에서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실존과 구원의 길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는 모든 인류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했습니다. 그 심판의 날에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 진노와 분노로 심판하십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파멸과 고생, 죽음과 최후의 심판만이 죄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의 모든 죄를 너그럽게 눈감아 주심으로써 당신의 의를 나타내십니다. 회개하고 믿는 사람을 의롭다 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죄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게 되며,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며,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원역사를 생각할 때, 바울에게는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 세상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역사 앞에서 다른 것들은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감옥생활, 다가오는 순교, 사람들의 다툼과 경쟁심 등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면, 오직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여김 받는다면 바울 자신이 당하는 고난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옥에서 풀려난다거나, 사람들에게 존경 받고 주목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에서 어른이나 선배 대접 받고자 하지 않았고, 자신의 수고에 대해 보상심리도 갖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무대에서 내려와야 하는 것에도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만을 바랬습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기만을 간절히 기대하고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하고 또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말은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삶의 이유요, 근본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사실 세상을 빨리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살아 있고자 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사도 바울의 내면세계를 생각할 때, 우리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참 훌륭하지만, 나는 나의 한계 속에서 이 정도로 신앙생활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기뻐했다고 하지만, 나는 그냥 내가 갇힌 감옥과 같은 상황에 안주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바울 외에도 바울 같은 삶을 산 예들이 많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이러한 믿음의 영웅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우리도 삶의 감옥에서 벗어나 그들과 같은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가르치며, 우리를 그 믿음의 길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온전한 경외심과 순종심을 나타냈습니다. 이집트 왕자 모세는 장성하게 되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믿음을 지킨다는 이유로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고, 그의 세 친구는 맹렬한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고 그들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문과 조롱,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을 당했습니다. 돌과 톱과 칼에 순교하고, 짐승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으며 광야와 토굴에 유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하나님임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이들을 통해 영광 받으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상급으로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순전한 믿음과 충성심은 사도 바울의 그것과 충분히 견줄만합니다. 이러한 성경의 영웅들은 우리도 간절한 소원을 갖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한다면, 그들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십자가 고난을 참으신 예수님에게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고 소원하시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믿음의 선진들과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은 협력, 두려움, 고난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요즘 혼밥, 혼술, 원룸 등 나 홀로 족을 표현하는 것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신앙생활 할 때 개인신앙도 물론 필요하지만, 함께 협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공동체로서 협력하여 그리스도라는 한 몸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오늘날 인재상을 나타낼 때 4C로 말합니다. Communication(의사소통), Collaboration(협업능력), Creativity(창의성), Critical thinking(비판적 사고)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Collaboration, 협업능력, 즉 동역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또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대적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은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복음역사에는 항상 대적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대적을 두려워하면 주눅 들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천로역정에는 사자 두 마리가 신자의 길을 가로 막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 사자들이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대적을 이기는 길은 그냥 그것을 패싱 해버리는 것입니다. ‘라이언 패싱’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란 내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고난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 아니라, 그분을 위해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 고난이 특권인 이유는 이것이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출발하는 이때 우리 마음에 어떤 기대와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의 인격과 삶은 우리가 소망하는 것에 영향을 받습니다. 무엇을 소망하는가를 따라 미래 우리 자신이 형성될 것입니다. 건강한 몸을 위한다면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행복하고 의로운 삶의 열매를 맺으려면 선하고 의로운 것을 마음에 소망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 세상을 살아갈 꿈과 푸르른 희망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은 소중하며 그것을 향해 땀 흘려 노력하며 힘차게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 삶을 올바르게 인도할 소망,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이끌 참된 소망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꿈을 꾸고 비전을 품는 영적 가치관이 필요합니다. 오늘날은 어른이나 아이나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이러한 개인의 소원은 존중되어야 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잘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과 충돌할 때, 하나님의 뜻과 충돌할 때는 부인해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고 해도 그 하고 싶은 것을 부인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참된 지혜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존귀하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적 가치관입니다. 우리가 올 한 해 영육 간에 선하고 좋은 것을 꿈꾸므로 풍성한 삶의 열매, 의의 열매를 거둘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며 그리스도가 존귀함 받기를 소망하는 영적 불꽃을 품고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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