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신앙고백
순교의 가치!!!
UBF | 기도요청 | 주일말씀 | 게 시 판 | 안암까페 | 페이스북
UBF해외|한국|모바일
양마가선교사님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   UBF공식까페
 
UBF > 안암 > 성경강해 > 주일말씀
첨부#2 2018년_신년_빌립보서_제4강m.hwp (24KB) (Down:51)
강의순서 2018 빌립보서 4강
성경본문 빌립보서 4:1-23
전한날짜 2018-02-04
ㆍ조회: 670  
평강의 하나님
2018년 신년 빌립보서 제4강
말씀 / 빌립보서 4:1-23
요절 / 빌립보서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평강의 하나님

우리는 빌립보서를 살펴보면서 사도 바울의 마음에 있는 기쁨과 평강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차갑고 어두운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이런 마음이 생길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그리스도를 나타내었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으며, 그리스도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는 몸은 갇혀 있었으나 심령엔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종종 삶의 풍파로 스트레스에 싸여 지낼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평강을 사모하며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간 본문을 ‘평강’이라는 주제로 일곱 가지 면에서 재구성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인간갈등을 이기고 화목해야 평강을 얻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훌륭한 교회였지만, 그래도 사람의 모임이라 갈등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말하는 것을 볼 때, 둘 사이에 불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오디아는 ‘순조로운 여행,’ 순두게는 ‘행운의 기회’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름은 행운, 순조로움이지만, 그들의 관계는 그리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동역자들이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귀한 분들이었지만, 화목하지 못했을 때 마음의 평강을 잃었을 것입니다. 개인신앙이 훌륭하더라도 인간갈등을 하면 평강을 잃습니다. 우리가 인간갈등 하려고 교회 온 것은 아닌데, 원치 않게 꼭 이런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람을 피해서 교회를 옮기지만, 그런 사람이 그곳에 또 있기 마련입니다. 인간갈등을 유발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서로에 대한 견제, 오해나 시기심, 알 수 없는 미움일 수 있습니다. 대부분 자기를 높이려는 교만이 문제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인간갈등이 해결 안 되면 교회에서 평강도 없습니다. 아무리 튼튼한 쇠사슬이라도 고리 하나만 끊어지면 쓸모없게 됩니다. 18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 막강한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유대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습니다. 이 가문의 문장인 붉은 방패에는 다섯 개의 화살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창시자인 마이어가 임종 때 다섯 아들에게 남긴 스키타이 왕의 유언에 기초한 것입니다. 한때 흑해 연안에서 강성했던 스키타이의 한 왕이 임종 때 자녀들을 불러 놓고 묶은 화살다발을 꺾어보라고 했지만 누구도 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화살다발을 풀어서 하나씩 꺾어 보이며 이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너희들은 이 화살다발처럼 하나로 뭉치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속이 무너지면 그 힘을 잃고 번영도 사라질 것이다.” 이에 마이어의 다섯 아들은 다섯 개의 화살을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에 새겨 가문의 결속을 지켰고, 이후 가문의 번영을 이어갔습니다. 이처럼 갈등은 피를 나눈 가족들 사이에도 빈번한 일이며, 화목은 가족이든 교회든 공동체의 지속적 번영을 위한 필수요소입니다. 바울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는데, 같은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빌립보서 1장을 따르면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이려 한다면, 방법은 달라도 같은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을 따르면, 같은 마음이란 겸손으로 남을 낫게 여기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핵심 가치 중의 하나는 협력, 곧 collaboration인데,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고는 협력할 수 없습니다. 같이 협력하여 일하는 중에 의견충돌이 일어날 때,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각각 양보하여 타협점을 찾으면 한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복음역사를 섬길 때도 협력이 중요합니다. 좀 늦게 가더라도 함께 갈 때 더 멀리 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얻어, 공동체에 평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서로 존중하고 화목함으로 평강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주 안에서 갖는 기쁨과 관용이 평강의 길입니다.
   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말합니다. 기쁨의 서신 빌립보서는 중요한 대목마다 “기뻐하라” 말하고 있습니다. 감옥 안의 바울이 감옥 밖의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황보다는 주님 안에 있는 믿음이 기쁨을 좌우함을 말합니다. 또한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주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향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기쁘지 않은데 기뻐할 수 있습니까? 이는 주님 안의 승리를 믿고 기쁨을 위한 씨름을 하라는 것입니다. 때론 어려운 상황이 우리의 기쁨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이때 누구나 슬픔과 두려움, 염려에 빠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빨리 빠져 나오고자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뻐하고자, 항상 기뻐하고자 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살전5:16-18). 자녀가 해맑은 얼굴로 기쁨으로 뛰노는 것은 부모의 기쁨입니다. 이처럼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가 기쁨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삶의 기쁨을 잘 누리길 기도합니다.
   5절에서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최후 승리를 이끄는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 마음에 여유를 줍니다. 이 여유는 타인에 대한 관용으로 이어집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관용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이기 때문에 당하는 민원, 재산적, 공간적 피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벙어리 냉가슴 앓듯 참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으로 신자는 옳은 것을 지향하기에, 때로는 관용하지 못하고 원칙을 고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싸우고 분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A학점보다는 B학점을 가도록 하라. 이것이 A학점으로 가는 길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실타래처럼 얽힌 인간관계를 푸는 열쇠는 타협점을 찾아 양보하고 관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죄인을 관용하셨습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하셨습니다. 죄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기쁨을 지키고, 세상을 향해 관용을 베풀도록 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평강이 있습니다.

셋째, 염려하지 않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는 평강의 집을 찾아오는 불청객입니다. 아무리 염려하지 않으려 해도 찾아오는 이 불청객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인의 기도 소리에 염려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파묻히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것입니다. 잠4:23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서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염려라는 불청객을 끊임없는 기도의 싸움으로 쫓아내야 하겠습니다. 요즘 미래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너무 심하여 처음부터 많은 것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이 없어서 결혼을 안 하려는 사람이 있고, 교육비 때문에 아이를 안 낳고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지나친 생각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중에 사랑 하나로 자식들을 길러 오신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 너무나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입니다. 돈이 없어 시도조차 할 수 없겠다는 마음은 일면 이해가 되지만, 이런 염려를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악인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지 않겠습니까? 힘든 삶을 하나씩 헤쳐 나갈 지혜와 용기를 반드시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적대적인 세상에서 염려가 많았을 것입니다. 주저앉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어려움에 처했던 바울이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하나님의 평강이 임할 것이다.’ 이는 우리의 하나님께 해결의 열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정말 염려투성이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오직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룀으로써 평강으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넷째, 좋은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의 평강을 얻습니다.
   8절에서 바울은 이런 것들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 받을 만한 것, 명예스러운 것, 덕스러운 것, 칭찬 받을 만한 것입니다. 어떤 생각의 컨텐츠를 갖는가 하는 것은 마음의 평강과 관계가 큽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강을 얻고는 싶은데 생각의 컨텐츠 때문에 실패합니다. 하루 종일 염려하고 힘든 것만 생각하다가 저녁에 ‘왜 내 마음에 평강이 없지?’ 라고 한다면 맞지 않습니다. 상처 받은 생각, 미운 생각, 후회스런 생각, 장래에 대한 염려, 절망적인 것들을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에 평강이 자리할 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의 대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좋은 것, 선한 것, 희망적인 것을 생각해야지 마음에도 좋은 것, 선한 것, 희망적인 것이 마음에 자리 잡습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찾아옵니다. 평강을 생각해야 평강이 찾아옵니다.

다섯째, 배운 바를 행할 때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평강의 근원이며 평강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손과 발이 죄를 행한다면 평강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말씀하셨습니다(사48::22).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행할 때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 지,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몰라 평강을 맛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삶의 구체적인 매뉴얼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우리가 행할 구체적인 매뉴얼이 됩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는 복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따라 ‘복음 중심적인 삶’을 살 때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평강이란 평온한 잔디밭에서 쉴 때 혹은 나른한 오후에 낮잠을 잘 때도 찾아오지만, 열심히 일하고 퇴근한 후, 땀 흘려 운동한 후에도 찾아옵니다. 이는 평강이란 마음과 육체 모두와 연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적으로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갈 때, 바르고 선한 것을 행할 때 평강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주중에 사회생활 하다가 지쳐 평강 없는 생활을 하다가, 주말에 교회에서 말씀과 교제와 예배를 통해 평강을 얻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회로 나가는 월요일에는 평강도 우리 맘에서 나가버립니다. 사회생활 하는 중에도 평강을 얻는 길은 무엇일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 중에는 영적인 모임에 참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임은 지친 나를 이끌어주는 견인차가 되며 평강을 줍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마18:20). 유명한 히10:25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교회의 여러 거룩한 모임들이 우리에게 평강을 줄 것입니다. 평강을 위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여 평강을 나누기를 기도합니다.

여섯째, 자족하는 마음이 평강을 가져옵니다.
   10절에서 19절은 물질문제와 평강과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먼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족할 때 평강이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기를 배웠습니다. 그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 비결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고, 늘 잘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 곧 풍부와 궁핍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자족에 대해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그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니, 이런 것을 피하고 의, 경건, 믿음, 사랑, 인내, 온유를 따르라고 했습니다(딤전6:6-12a). 물질은 사람에게 필수적이고, 풍부하면 물론 더 좋습니다. 그러나 물질이 목적이 되고 지나치게 매이면 병이 되기도 합니다. 빅토리아 호수는 아프리카 최대의 호수입니다. 이곳에는 옛부터 시클리드라는 물고기가 서식했는데 한때 300여종이 넘기도 했습니다. 20세기에 영국인들은 시클리드의 크기가 작아서 상업적 가치가 떨어지므로, 나일 퍼치라는 육식어류를 이 호수에서 키우고자 했습니다. 최대 2미터에 200키로 이상 자라는 나일 퍼치는 맛도 좋았고 대량의 고기를 제공하며 부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나일 퍼치 산업은 큰 호황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빅토리아 호수에 방류된 나일 퍼치는 시클리드를 거의 다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초식성 시클리드가 사라지자 호수에는 수초가 마구 자랐고, 썩은 수초는 호수 바닥을 뒤덮고 녹조류를 대량 번식시켜 호수를 썩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모기 유충을 잡아먹던 시클리드가 사라지자 모기가 번성했고 말라리아가 창궐했습니다. 더러워진 물로 사람들은 수인병에 시달렸습니다. 20세기 후반 시클리드는 호수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고 나일 퍼치도 급감하자, 어업은 몰락했고 호수의 생태계는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물질을 목적 삼아 탐욕을 부릴 때 모든 것이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족이란 말은 바울 당시 헬레니즘 시대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스토아 철학의 자족은 정념에서 해방된, 초월한 상태를 뜻하는 개념이었습니다. 자족은 우주의 커다란 흐름에 순응하여 조화 있게 살고자 하는 주체적 태도, 혹은 어떤 것에도 마음의 동요를 받지 않는 상태를 의미했고, 이를 ‘아파테이아’(apatheia)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러한 철학의 자족과 바울이 말하는 자족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마음의 평정, 결핍과 풍부 자체에 매이지 않는 평강,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자족을 누린다는 점에서 철학의 자족과 차이가 있습니다. 심지어 결핍으로 인해 죽더라도 부활할 소망이 있기에 그 무엇도 그 평강을 앗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도 철학의 자족과 차별성을 갖습니다. 헬라 철학이 추구한 자족을 감옥의 바울이 완벽히 보여주었고, 하나님의 평강으로 그것 이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궁핍할 때나 풍부할 때나 모든 상황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30:8,9절의 아굴의 기도는 우리에게 본이 됩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가난과 부요에 휘둘리지 않는 자족하는 마음은 믿는 자가 가진 능력입니다.

일곱째, 풍성히 채우시는 하나님께 평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궁핍함은 괴로운 것입니다. 바울도 궁핍함과 배고픔이 괴로웠습니다. 이것이 솔직한 인간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 자체에 매이거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주시는 자족하는 마음과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과 물질 공급으로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해 풍성한 물질적인 축복을 간구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사람들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대부분의 문제가 물질문제입니다. 물질은 많아도 문제, 적어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물질문제를 맡기지 않으면 평강이 없습니다. 물질을 풍족히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평강이 있습니다. 우리는 궁핍할 때도 자족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물질적으로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도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구유 정신도 소중하지만, 많이 벌어서 잘 누리고 좋은 곳에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요점은 물질이 많던 적든 물질문제에 매이지 않아야 마음에 평강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우상을 떠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은 물질적이고 현세적입니다. 자녀가 많아지고, 토지소산이 늘어나며, 짐승이 새끼를 잘 낳습니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아 먹거리가 넘칩니다. 대적을 이기며, 그들은 머리가 되며 꼬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문제와 믿음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믿음으로 하고, 물질문제는 내 힘으로 해결하려는 이분법적인 태도는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과 모든 것을 주시듯이, 물질의 공급자이심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물질을 주시되 풍성히 채워주실 것도 기대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운 삶뿐만 아니라, 충실한 노동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문제의 주관자이며, 풍성히 채우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물질문제로 염려하는 가난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우리가 물질문제를 믿음으로 해결하지 않을 때까지 결코 평강이 없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풍부에 처한 사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물질적으로 부요해졌지만, 이제는 더 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배고픈 중에 하나님을 찾는 것은 잘 했지만, 배부른 중에 하나님 찾는 법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이것은 배고플 때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 해야 이 나라의 미래가 있습니다. 예전에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가 넘으면 교회성장이 멈추고 교회는 쇠퇴한다면서 마치 공식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풍요로워진다고 꼭 교회가 쇠퇴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는 빈곤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물질적 풍요 자체를 죄악시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물질적으로 축복하시며 풍요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풍요의 시대라 해도 마음 자세에 따라 얼마든지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신명기 말씀은 풍요의 시대를 살아갈 세대들에게 그 풍요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사랑하며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명기 세대와 같습니다. 우리가 풍요의 시대에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축복을 잘 지켜가는 백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성도에 대한 축복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서로 문안인사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고난 중에 믿음을 지키며 복음역사에 충성하는 동역자들끼리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전합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평강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하나님의 평강을 위한 여러 방안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평강을 앗아가는 요소들인 인간갈등, 나쁜 생각과 행동, 욕심, 물질적 결핍에 대한 염려 등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반면, 서로 존중하고, 주님 안에 거하며, 기도의 싸움을 하고, 좋은 것을 생각하고,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며, 자족하는 마음을 갖고, 물질적으로 풍성히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어 마음에 평강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평강으로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Bookmark and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