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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2018 마가복음 4강
성경본문 마가복음 2:1-17
ㆍ조회: 405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2018년 마가복음 제 4 강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말씀 / 마가복음 2:1-17
요절 / 마가복음 2:17b -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나’
272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528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우리는 마가공부를 시작하면서 마가복음의 전체 제목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마가가 마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며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이런 관점에서 탐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명의 죄인이 나옵니다. 한명은 중풍병이 들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누워있어야만 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능력은 많은데 동족들에게서 죄인으로 낙인찍혀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세리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해줍니다.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십니까?

I.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
1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수일 후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들어가 집에 계셨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해변에 있는 조그만 도시로서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시던 곳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문 앞에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만큼 몰려들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을 고쳐달라고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이를 위하러 왔노라’하시면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시며 열심히 말씀을 전하셨듯이, 지금도 몰려온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회개도 하고 복음을 알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 저절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구원받습니다. 그래야 사람이 깨닫고 회개하고 그 내면이 변화되고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서 왔습니까? 말씀을 듣고 배우는데서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디를 가셔도 이렇게 항상 말씀 가르치기에 힘을 쓰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예수님이 알마나 귀하게 여기시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는 그 때는 정말 진지하고 중요한 시간입니다. 이때는 사람이 천국으로 초대받는 때입니다.

그런데 이때였습니다.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어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런데 와 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얼른 지붕으로 올라가 거기에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과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한참 말씀의 은혜를 받고 있는데 지붕이 뜯기면서 흙먼지가 떨어지고 하늘에 구멍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이 열리고 천사가 내려오려나 보구나 하고 놀라고 뭔가를 기대했는데 이렇게 병자가 줄에 데롱데롱 매달려 내려오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냥 말문이 막혀 모두들 헐!, 헐! 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하시니”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달아내린 네 사람들에게서 믿음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이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중에 남의 집 지붕을 뚫고 이렇게 사람을 달아 내린 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무엇보다도 말씀 전파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예수님을 방해한 것이며 말씀을 듣는 청중들에게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병 고치러 온 사람이 자기들 뿐이겠습니까? 게다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의 집 지붕을 왜 뚫습니까? 세간에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다원화 사회 속에서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독단성과 과격성을 벗어나 정중한 태도를 가져야하는가에 대해 방향을 제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무례함을 종종 혼돈하며 과격한 십자군식 승리주의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런 사람들도 어찌보면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그 행동이 무례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경찰서로 끌려가 조사 좀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볼 때 무례함을 본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셨습니다. 이들 마음속에 있는 예수님께 대한 뜨거운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첫째, 예수님은 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각색 병든 자들을 고치셨고 심지어 불치와 저주의 병이라고 하는 나병에 걸린 사람까지 고치셨습니다. 이들은 이것을 통해 예수님이 이 중풍병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예수님은 이렇게 중풍병에 걸려 누워 냄새나는 삶을 살아야하는 이 사람을 불쌍혀 이겨주시고 받아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왔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몸에 손을 대시고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중풍병자를 어찌하든지 고쳐주고자 하는 자기들의 간절한 마음을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갔다가는 여차하면 병 고치는 것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고 쫓겨날 수도 있지만 그들은 누가 뭐라고 하든 어찌하든지 이 친구를 고쳐주고자 하는 자기들의 열망을 예수님이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랬기 때문에 그들은 지붕까지 뚫어가며 예수님께 담대하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믿음을 보시고 감동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뻐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니 하시면서 그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과정에서 생긴 무례한 일을 아무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예수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신가요? 요즘은 세상 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어제 뉴스에는 9급 7급 공무원 시험 평균 경쟁률이 63:1이라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젊은이들이 장래가 불안해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말 많은 젊은이들이 꿈은 고사하고 당장 어떻게 먹고 살아야할지 이만 저만 고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라도 예수님이 나를 도와주실 수 있어 하고 믿고 나오면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뻐하시고 도와주십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나가야합니다. 장애물이 있다고 물러서지 말고 방법을 찾으면 지붕이 보이는 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힘든 양이라도 목자님들이 함께 메고가면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도와주십니다. 우리 가운데는 새벽에 모여 함께 중보기도하시는 사모님들이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열망이 있고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시는 분들이십니다. 이분들은 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놓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합심해서 기도하십니다. 사정을 살펴보면 얼마든지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 안하고 다만 믿음으로 모여 주께 간절히 기도할 뿐입니다. 어떤 사모님은 새벽에 나올 수 없어 그 시간에 집에서 함께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분들의 믿음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기뻐하시고 때가되면 다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께 담대하고 나가야겠습니다. 히브리서 4:16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것이니라’ .  

그러면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을 어떻게 맞아주습니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작은 자야 하는 이 말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쓰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붕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내려오는 그 중풍병자를 보시고 이렇게 사랑과 기쁨으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병을 고치러 나온 이 사람에게 병은 안고쳐주시고 왜 이렇게 죄사함을 선포하셨을까요? 이것은 그에게는 지금 다른 어떤 것보다도 죄 사함의 선포가 최고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내면의 문제를 먼저 보셨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이런 중풍병과 같은 중병은 죄와 연결시켜보았습니다. 오직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이 저렇게 벌하실까, 저주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병에 걸린 당사자는 내면에 죄의식으로 인한 비참한 생각, 그리고 자기가 그동안 범한 죄를 돌아보면서 자기는 이 죄 때문에 이렇게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며 아주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의 내면의 고통을 아시고 이렇게 먼저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스스로 자기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죄를 씻으려 하면 할수록 죄의식은 더 깊어지고 그만큼 더 절망하게 됩니다. 멕베드의 유명한 독백이 있지 않습니까? 그는 자기 손에 묻은 붉은 피를 보면서 놀라며 이런 말을 합니다. “바다의 모든 물로 내 손의 이 피를 씻어낼 수 있을까? ... 아니야, 내가 바닷물로 이 손을 씻으려한다면 모든 바다가 다 피로 물들 거야!”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단번에 그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죄의 권세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차 십자가에서 이 사람의 죄를 십자가 피로 씻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이 예수님 앞에 믿음으로 나가면 죄사함을 받고 그 영혼이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죄 사함을 선포하자 이에 대해 놀라며 비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라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들의 생각을 옳습니다. 죄를 용서하고 말고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어디 감히 사람이 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면 그 사람이 정말 일어나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이 말은 정말 권세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네 죄사함을 받았으니라’ 하고 말하는 것은 당장에 죄 사함의 증거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니까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거짓말을 해도 당장에 드러나지 않으니까 아주 쉽게 거짓말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이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해야 합니다. 10절,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스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나님 외에 누가 중풍병자를 말씀으로 일으켜 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중풍병자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 ’ 이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이 증거되었고 그런만큼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분이심도 증거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은 실제적으로 그 사람의 삶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제가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구원받은 것이 생각합니다. 저는 한때 오랫 동안 죄의식에 많이 시달리며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찬송가를 불러도 사라지지 않는 내면에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주일날 바로 이 말씀 ‘네 죄사함을 받았으니라’하는 이 말씀이 저의 심령에 들어왔을 때 제 안에서 갑자기 무슨 사슬이 끊겨지는 것처럼 뚝!하는 소리와 함께 저는 죄의 결박에서 온전히 벗어났습니다. 이후로 저는 다시는 이전의 그런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았고 그야말로 감사와 기쁨 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의 권세는 이론이 아닙니다. 죄사함은  지금 이 시간에도 믿는 자에게 임하는 실제적인 하나님의 권세입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이 말씀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임하길 기도합니다. 이로서 일어나 걸어가는 활기찬 역사가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임하신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그들은 이 모습을 보고 다들 ‘대박’, ‘대박’,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예수님은 온전한 사람이시며 온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II. 나를 따르라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가버나움 집을 떠나 다시 바닷가로 나가셨습니다. 그러자 큰 무리가 예수님께 나왔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회가 되는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신 후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셨습니다. 여기서의 세관은 큰 건물이 아니라 세금 받는 작은 부스를 말합니다. 레위는 여기에 앉아 주로 어부를 대상으로 세금을 받았습니다. 그는 바닷가 선착장에 배들이 들어올 때마다 어부 한사람 한사람씩 붙들고 오늘 몇 마리 잡았느냐, 모두 무게는 얼마나 되느냐, 배에는 몇 명이나 타고 있었느냐 며 이것저것을 조사를 하고 나중에는 바다 사용료까지 내게 해서 돈을 뜯어냈습니다. 당시 세리는 이렇게 돈을 뜯어내서 로마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다 갖는 등 이런 식으로 돈을 모았습니다. 남에게 돈을 뺏는 거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능력 있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는 동족들로부터 매국노요 흡혈귀와 같다는 비난을 받고 창기같은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렇게 살아온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는 어부들과 매번 싸우고 욕을 듣고 세금 받아내는 일이 지겨워졌습니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삶을 살게 되었는가 하며 비참한 자신을 생각하고 그날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세관에 앉아있었습니다. 방금도 한 어부와 싸우고 욕을 먹고난 뒤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이런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레위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아니 저런 악질 같은 놈을 제자로 부르시다니, 제자 중에 레위 비슷한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내쫓아야 할 판에 이런 사람을 제자로 부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나를 따르라’는 이 부르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이것은 구원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이미 죄인이요 이제 죄인으로 낙인찍혀 세상으로부터 사실상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불러주셨습니다. 세상은 그를 버리지만 예수님은 낭패와 절망에 빠진 그를 거기서 건져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도 잘 아십니다. 우리 인생의 절망과 운명을 잘 아십니다. ‘아, 내가 왜 그런 죄를 저질렀을까’, ‘아, 왜 내 인생의 운명은 이런거야’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정죄하기보다는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여주십니다. 거기서 벗어나 자기와 함께 하는 제자로 부르셔서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새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가 장차 하나님 구속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사도로서의 비전을 가지셨습니다. 레위는 그대로 두면 계속 로마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면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괴로워하며 살다가 끝내 인생 망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새로운 인생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인류 구속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그는 이제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더 뜯어낼 수 있을까 하는 연구를 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후 그는 실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해서 해박한 성경 지식을 갖게 되어 아름답고 힘 있는 마태복음을 썼습니다. 그가 산상수훈을 자세히 기록했다는 것은 그의 내면의 감동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세금을 받기 위해서 사람을 끝까지 따라가 무엇이라도 뺏어오던 그였지만 그는 이제 남이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고, 남이 오리를 가지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고, 남이 완뺨을 치면 오른 뺨을 내밀라는 이 놀라운 기록을 했습니다. 그가 쓴 마태복음을 상세히 보면 그는 아주 빼어난 성경선생이요 신학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설명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그는 인류의 스승이었고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그가 쓴 마태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험악한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산상수훈을 읽고 있다는 것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방향을 가지고 살아가는가는 언제나 중요합니다. 특별히 젊은 학생시절에 예수님을 따르고자 방향 잡을 때 나이 들어 그 삶에 후회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배우며 따라가는 제자의 삶에는 헛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보람과 감사가 남고 그 심령에는 예수님으로 인한 은혜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이 복되신 예수님께서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우리는 지금 저마다 앞날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학생들은 어디서 어떻게 취직을 하고 먹고 살 것인지 걱정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 너무 빠지다보면 어느덧 본문의 레위와 같이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지만 비전에 없게 됩니다. 정말 우리가 바라던 인생의 꿈은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러다보면 어느 새 우리 자신이 초라해진 것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정말 꽃씨 만큼이나 작아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만물을 주관하시고 자기 자녀를 축복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든지 도와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당신의 자녀 삼으시고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발 잠에서 잠을 잘 때 우리의 귀에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야 합니다.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내가 네 인생 책임져주지 않겠니?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배우는 제자의 삶을 살기 시작할 때 우리의 삶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구속사에 쓰임 받으면서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배운다는 것은 정말 복된 삶입니다. 요한1서 2:17은 말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시간 예수님이 레위를 보며 하신 말씀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이 우리 심령에 임하고 우리 각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을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른 레위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4절 후반을 보십시오. ‘.. 일어나 따르니라’ 그러지 않아도 누가 나를 불러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랬는데 그는 예수님이 불러주실 때 일어나 세관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고 결단했습니다. 이 결단은 아주 작고 사소해 보였겠지만 이 결단은 그의 삶에 위대한 변화를 가져다주고 역사 속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복음에서 은혜를 받고 변화되었습니다. 장차 임할 새예루살렘 성에는 12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 하나에 레위 마태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일어나 첫걸음 내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제 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레위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레위는 자기를 부르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동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해 맛있은 음식으로 대접했습니다. 본문을 보니 거기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리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으로부터 감동을 받고 많은 위로를 받안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레위의  집에 모여 함께 잔치급 식사를 했습니다. 짜장면에 복음밥, 칸초 새우, 북경 탕수육, 내내 치킨, 오구 피자 등을 주문해 함께 먹으며 예수님과 대화했습니다. 이 식탁은 태어나서 처음 누려보는 천국의 식탁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6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 이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놀라서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당시 세리와 죄인들은 율법을 어기고 함부로 사는 사람들로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죄인들과 식사를 하다니 그들은 도무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듣고 말씀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나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로 말미암아 고통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의인을 불러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구원하며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병든 사람은 의사가 필요합니다. 죄인들은 중풍병자와 같이 세리 레위와 같이 그 마음이 병들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죄로 인해 죄의식에 시달리고 마음에 큰 고통을 겪습니다. 너무 견디기 어려우면 자살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불러 구원하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중풍병자와 같이 무기력하게 누워 원망하는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세리와 같이 남이 어떻든 자기를 위해 사는 이기적인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부르러 오셨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내가 죄인인 것이 감사할 지경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께 나가야겠습니다. 우리고 죄인된 우리를 의탁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의 말씀을 배우며 한발 한발 나가면서 내면을 치료받고 은혜와 진리를, 영생을 충만히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왕이요 구원자이십니다. 우리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시고 이제는 일어나 걸어가게 하시며, 나를 따르라 며 분명한 인생 방향을 주십니다. 이 예수님 안에 우리의 삶이 변화되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불러 치유와 소망의 역사를 이루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가 이 봄학기 죄인을 불러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배우면서 예수님을 알아가는 기쁨 속에서 은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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