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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2018 부활절 1강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5:1-34
전한날짜 2018-04-01
ㆍ조회: 326  
부활의 첫 열매
2018년 부활절 특강 1
말씀 / 고린도전서 15:1-34
요절 / 고린도전서 15:20
부활의 첫 열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20)

예수님의 부활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가장 큰 고통의 문제인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은 천지가 창조된 이래,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죽어도 산다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사망 권세에서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금년에도 부활절을 통해 이 예수님을 다시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생명력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2 주전에 한 형제의 부대 심방을 갔었는데, 출입을 관리하는 담당자님이 우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라 머뭇거리다가 모르겠다고 대답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때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예수님을 배우지 않아서 그런 거입니다. 프로그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콘텐츠의 문제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절도, 행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Happy Easter 하고 인사하는 것도 좋습니다. 부활절을 기념하여, 부활절 달걀을 예쁘게 만들어 먹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부활절에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그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 우리가 그 위에 굳게 서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해마다 부활절을 맞아,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살아있는 부활의 믿음을 가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첫째, 성경대로 이루어진 복음
1-4절에서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1,2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지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일상에는 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식에 우리는 일희일비합니다. 얼마 전, 막내딸이 회장 선거에 나갔습니다. 한 미모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심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퇴근할 때가 되어도 기다리는 전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역시나 떨어졌습니다. 몇 표를 받았는지 물어 보았는데, 회장 선거 역사상 듣도 보도 못한 표를 받아서 놀랐습니다. 0 표였습니다. 딸을 추천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딸 아이 역시 다른 아이를 찍었던 것입니다. 동역자와 저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어떻게 도와야 하는 지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퇴근길에 커다란 조안나 아이스크림을 사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딸아이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고, 다음 학기에도 회장 선거에 나가겠다고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 마디 해주었습니다. 회장 되려면 공부를 잘해야 한다! 나쁜 소식은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더 나쁜 소식은 희망이 사라졌다는 절망의 소식입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다릅니다. 기쁜 소식은 희망을 갖게 하는 소식입니다. 복음은 현실에, 상황과 환경에 절망하지 않고 미래를 기대하게 하는 소식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발견했습니다. 다같이 3,4절을 외어 보시겠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왜 감격이 없습니까? 다시 한번 부활의 감동 속에서 의미를 생각하시면 외어 보시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소식이, 기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이 소식은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심판으로부터 영원히 구원하였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다!’하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은 끝입니다. 더 이상의 소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진짜의 시작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1980년 3월에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폐수종으로 입원했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이 병원에서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을 향하여 고함을 치며 절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 조차 묻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유라는 주제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지만, 정작 그의 마지막은 자유롭지 못하고 실로 비참했습니다. 그는 입원한 지 한달 만에 몹시 괴로워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때 신문들은 샤르트르의 죽음에 대하여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에 대해서, 어떤 독자는 이렇게 투고했습니다. “샤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샤르트르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디트리히 본 훼퍼는 나치에게 항거하다가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어느 날 한 간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데, 그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같이 있던 친구들에 이렇게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제 나에게 죽음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감방을 나서는 그에게는,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넘쳐 났습니다. 그 감옥에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에서, 큰 감동으로 받았습니다. 본 훼퍼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복음은,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팩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한 순간부터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약속하셨습니다(창 3:15). 이사야 9장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때가 되매 시편 22편에 예언된 말씀대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하시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또한, 이사야 53장에는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아무 죄없으신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의해 새 무덤에 묻히셨습니다(요 19:38-42). 그리고 예수님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중에 예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 성전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에게는 직접적으로 당신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시편 16편 말씀에 예언된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 말씀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팩트 체크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로 진실이 무엇인지 짚어본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팩트 체크에 따르면, 복음의 진실은 ‘성경대로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성경대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의 기원이 성경 말씀이요, 곧 하나님이시다는 말입니다. 성경대로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팩트(fact)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팩트로 받은 이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말아야 겠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도, 이 복음에서 흔들리지도 말아야겠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살아나신 예수님은, 우리의 절대희망이 되십니다.

둘째, 부활의 증인들
5-8절에는 예수님 부활의 수많은 증인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여러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먼저는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보이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도 보이시며 못 자국 난 손을 만져 보도록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500여 형제에게도 동시에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바나바를 비롯한 모든 사도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여기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는 NIV에는 ‘one abnormally born’(비정상적으로 태어난)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바울도 자기가 구원받은 사실이, 정상인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이런 그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핍박자였고 다른 12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듣고 배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도가 되기에는 뭔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는 마치 만삭되지 못해 난 사도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도로 거듭나 하나님 교회의 일꾼이요, 예수님의 부활하심의 증인으로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누구보다도 더 많은 수고를 하며 살았습니다.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이렇게 그 인생이 변화고,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의 고백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9-10) 신앙 생활을 하면서 줄곧 제 내면을 괴롭힌 문제는, ‘나는 평범하지 않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키는 작고, 얼굴은 둥글둥글해서 아이들은 저를 호빵맨으로 부릅니다. 자기 밖에 모르고, 인생의 성공만을 위해 달려가던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자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의 사랑으로 다만 주의 은혜로 구속하시고, 양들과 교회를 섬기는 기쁨을 알게 하셨습니다. 목자님들의 지속적이고 끈질긴 사랑의 수고로 말미암아, 복음 안에서 조금씩 자라게 하시고, 만삭되지 못해 태어난 자 같은 저를, 완전 소중한 수진 사모님을 만나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눈이 초롱초롱한 세 아이들의 아빠가 되게 하시고, 양들의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공부하고 논문 쓰는 것도 작은 일이 아니지만, 꽃보다 소중한 2세 형제님들과, 보건대학의 보물들인 여러 형제님들을 섬기는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새벽 5시에 일어나 새벽기도를 준비하고, 센터 말씀 역사와 김모세 목자님을 여러모로 동역하며 섬기게 된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저를 구원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장차 임할 부활의 은혜를 생각하면, 제가 더 많이 수고해야 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부족한 저를 부르시고, 이렇게 주님의 역사를 위해 일군이 되어 수고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제가 일생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고대 캠퍼스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목자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아멘.

셋째,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지만, 우리 몸의 부활은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의 부활이란 애시당초 없는 것인데, 어떻게 부활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헬라 철학에 기초하여, 영은 선한 것이지만 육은 악하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었으면 이제 악한 육체를 벗어나게 되어서 좋은 것인데, 어떻게 악한 육체를 가지고 다시 부활할 수 있느냐며,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든 저런 이유에서든, 예나 지금이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몸의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먼저는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곧 우리의 부활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전파하는 것이나 믿음도 헛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우리 목자들은, 전문 사기꾼이 되고 맙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우리 죄를 위해 죽은 것인지, 자기 죄로 죽은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대속을 확인할 길이 없게 됩니다. 자연히 우리는 여전히 죄의식에 시달리며 죄 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다면, 바울의 말대로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사람도 망할 것입니다. 또한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드리고, 양들을 제자 삼기 위해서 이렇게 시간과 물질을 쏟아 부을 필요도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 인생을 엔조이를 하며 사는 게 최선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부활을 믿고 사는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옵니다(요 5:29).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니라”(롬 6:8,9).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서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다같이 20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나의 부활! 다같이 옆에 사람과 하이파이브를 하시면서 해보시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나의 부활!

넷째,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첫 열매처럼 그 다음에 맺힐 우리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이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은 원수인 죽음도 멸하고, 결국에는 만물을 하나님께 복종시킵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의, 온 우주의 회복역사를 이루십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바울은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말했습니다(롬 5:12-21).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도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었는데, 이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영생의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지난 평창 올림픽의 최대 화두는 우리나라 여자 컬링 대표팀, ‘팀킴’이었습니다. 아쉽게 은메달을 땄지만, 대회기간 내내 안경 선배의 ‘영미’라는 외침과 함께, 우리에게 큰 기쁨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참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경기는 분명히 4명이 했는데, 시상식에 오른 사람은 5명이었습니다. 김초희 라는 분은, 출전하지도 않은 거 같았는데, 팀 승리와 함께 당당히 은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습니다. 복음의 비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롬 6:3).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우리는, 이제 예수님과 한 팀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한 것은 없지만, 한 팀이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가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으심은 곧 우리의 죽음이 되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26,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입니다.

그런데 막상 죽음 자체를 생각하면, 두려운 게 현실입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문상을 가는 회수가 정말 많아지고 있습니다. 남이 일이 아니라, 이제 곧 내 일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솔직히 두렵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9:27에 보면, 사람에게 한번 죽는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죽은 자는 심판을 받으러 부활하든, 영생을 받고자 부활하든 반드시 한번은 부활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을 합니다. 믿지 않는 이는 영원한 심판의 부활로,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의 부활로 살아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섯째, 속지 말라 깨어 의를 행하라
앞에서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의 확실성과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인생에게 주는 희망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부활을 믿는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자신의 예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 받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29). 당시에는 세례 받고자 하는 자가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으면 사후의 구원을 위해서 대신 세례를 받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릎쓰리요’ 이 말은 우리가 한번 죽으면 끝이라면 왜 언제나 위험을 무릎 쓰고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인데 왜 위험을 무릅쓰며 죽기를 자처하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31,3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바울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 때마다 위험을 무릅쓸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좋은 환경 가운데서 편하게 전파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늘 질병, 강도, 궁핍, 유대인의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고자 도처에서 목숨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순간순간 갖가지 위험을 무릅쓰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죽는 생활을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안일하게 살고자 하는 육신의 소욕을 날마다 부인했습니다. 또한, 세상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명예심을 부인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학문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세상에서 얼마든지 존경받으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날마다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자신을 희생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부활의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사도 바울 자기도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 함께 33절 34절을 힘차게 읽어보겠습니다. ‘ 속지 말라 학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우리가 부활이 없다는 말에 속지 말아야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부활로 초청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이 땅에서 담대하게 깨어 의를 행하며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믿음으로 감당하며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힘써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한 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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