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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2018 마가복음 5강
성경본문 마가복음 2:18-3:8
전한날짜 2018-04-15
ㆍ조회: 334  
어느 것이 옳으냐?
마가복음 5강
                                      어느 것이 옳으냐
말씀/마가복음 2:18-3:6
요절/마가복음 3:4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제자들과 양들을 보호하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배우고자 합니다. 하나님 역사를 섬기는 우리에게 이것 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판하고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법을 이용해 예수님을 고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고 있음을 지적하시며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본래의 정신을, 곧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 것이겠는가를 생각해 보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저 남의 이야기만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형식과 법 내세우며 남을 비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형식과 법보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정작 우리가 지키고 보호해야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의 반영이요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예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배우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은 당시 금식 전통과 안식일 규례를 배경으로 합니다.  
 
I. 어찌하여 금식하지 아니하나니까(18-22)
18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제자 훈련으로, 혹은 종교적인 규례로 금식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금식을 가르쳤습니다. 금식 훈련은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고 회개하고 기도하기에 힘쓰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정하신 금식은 일 년에 한번 대 속죄일에 할 뿐입니다. 이때는 모든 백성이 지난 일 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죄 지은 것을 회개하면서 속죄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러면서 긍휼을 구하며 죄사함을 받고 새로운 마음으로 살고자 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외에는 성경을 보면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또 자기가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심각한 죄를 범했을 때 애통해하며 하는 금식기도도 있습니다. 유대 민족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율법을 지키며 경건을 유지하고자 금식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문제라면 신앙생활을 엉망으로 하면서 회개도 없는 것이 문제지 요한의 제자들이 하는 기도는 오히려 배울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말고도 바리새인들이 매주 규칙적인 금식을 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금식을 자기신앙생활의 한 형식으로 여기고 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종교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일주일에 2번 내지 4번 금식하면서 신앙의 본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이들의 금식이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금식은 어느덧 경건한 사람으로서는 꼭 해야 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일주일에 금식하는 바리새인들을 존경하고 이것을 또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만히 보니 금식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세리,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내는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과 같은 훌륭하신 분의 제자들이 요한의 제자, 바리새인들이 다 하는 금식은 안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와서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18b).
예수님의 답이 어떠합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혼인집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랑 신부 축하하고 함께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혼인집에서는 축하객들을 위해 고급 포도주를 내고 맛 있은 음식을 많이 준비합니다. 이날 신랑의 친구들은 신랑을 축하하고 함께 기뻐합니다. 이날에는 종교적인 금식 규례도 해제해서 함께 먹고 마시며 마음껏 즐거워하도록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금식한다고 인상 쓰고 있으면 분위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때는 금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본문 속의 신랑과 같은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그 친구들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주, 기쁨의 주이십니다. 누구든 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행복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지낸다는 것 자체는 하나의 큰 생명의 잔치, 기쁨의 잔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찬양하지 않습니까? ‘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속에 내 마음속에,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속에 내 마음 속에 있네 ~ 나는 기뻐도 정말 기뻐요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맘에 ... ’ 이렇게 정말 기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금식해야할까요? 지금 제자들이 해야할 일은 이 예수님을 배우고 그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이 항상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장차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얼마나 슬플까요? 그때 아픈 마음으로 금식하며 하나님께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금식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식적으로 때가 아닌데도 금식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들이 은혜 가운데 잘 성장하도록 돕고 계십니다. 그들 내면에 은혜의 살이 포동포동 쪄가며 예수님을 잘 배우며 즐거워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금식이라니!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금식이 나쁜 것 아니다.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좋은 것이다. 금식이 좋은 사람은 계속 해라. 그러나 자기가 금식한다고 남에게 까지 금식하라고 강요한다거나 금식 안하는 것을 문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대로, 바리새인은 바리새인대로 잘 하도록,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대로 예수님을 잘 배우며 기뻐하도록 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서 제자들의 생활을 변호하시고 보호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은 얼마나 보호하고자 하시는 줄 아십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생베 조각은 탄력이 있고 강합니다. 그러나 낡은 옷의 이제 탄력을 잃어 좀 헐렁하고 느슨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옷이 뜯어졌을 때 여기에 생베 조각을 붙이면 어떻게 될까요? 이 생베 조각이 낡은 옷을 잡아 당겨 옷이 더 뜯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예수님이 지금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낡은 옷입니다. 여기서 낡은 옷은 연약함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연약한 자들로 보셨습니다. 이들은 아직 더 배우고 자라야하는데 이들에게 기존의 억센 종교적 율례나 관습, 형식을 갖다 대면 제자들이 상처입고 더 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연약한 것은 연약한 것에 맞게 다루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존의 형식에 제자들을 강제 구속시켜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고자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실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내는 가스 때문에 가죽부대가 팽창하다가 터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새 포도주도, 낡은 부대도 둘 다 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새 포도주는 탄력성이 좋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된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넣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하게 낡은 부대를 옛날의 율법주의로만 비유해 낡은 부대를 버려야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각각의 특성에 따라 잘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말의 반복입니다. 요한의 제자나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것이 좋아 보이면 그러면 그 규례를 따라 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을 그런 종교의 형태, 그런 종교정신에 담고자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오는 기쁨, 새로운 복음 역사를 어떻게 옛 종교의 형식과 틀어 넣을 수는 없습니다. 만일 복음 역사를 맞지도 않는 형식과 틀에 넣으려고 하면 서로 충돌하고 갈등하다가 둘 다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이 좋으면 그것을 해라’ 하시면서 그들과의 충돌을 피하고 제자들 중심의 복음 역사를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좋은 것은 좋은 대로 잘 보존해주어야 합니다. 그게 좋으면 그걸 하면 됩니다. 남이 금식을 하느니 마니 따지며 문제 삼을 필요 없습니다. 좋으면 그냥 자기가 하면 됩니다. 왜 예수님 안에서 은혜 잘 받고 있는 사람을 너는 왜 이걸 안하느냐 저걸 안하느냐하며 옭아매려 할까요?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신앙을 도와줄 때 자기가 익숙했던 그 패턴에 집어넣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 패턴에 부모 세대들에게 맞는 패턴이지 그들에게는 아닙니다.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재미있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세대 차이가 있으면 관심사도 다르고 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도 접근 방법이 각각 다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저마다 상대방에서 자기 스타일을 주장하고 요구해도 안됩니다. 목자님도 양들 도울 때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살려주며 가르쳐줄 때 성장하는 것입니다. 목자의 문화와 양의 문화가 다릅니다. 율법의 문화와 복음의 문화가 다릅니다. 그런데 서로 섞으려고 하면 사고하는 것입니다. 생베 조각과 낡은 옷이 서로 안맞습니다. 생베 조각은 강합니다. 그래서 낡은 것에 붙이면 안됩니다. 새포도주와 낢은 가죽 부대가 서로 안맞습니다. 처음에는 괜잖을 것 같지만 나중에는 찢어지고 터집니다.
지난 주에 카타르를 다녀왔는데 거기 양들 중에 이집트의 콥틱 기독교도가 있었습니다. 콥틱교는 예수님의 신성, 인성 논란에서 예수님 안의 신성이 인성을 흡수했다고 해서 예수님의 신성만 인정하는 단성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슬람 틈 속에서 지금도 자기들의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데 주기적으로 금식을 합니다. 제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 날 그곳에서 한 자매 선교사가 선교사님들과 양들을 데리고 특별히 나를 위해 양고기 맛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우리는 다 맛있게 먹는데 그 콥틱교도 형제는 자기는 금식이라며 안먹는 겁니다. 특별히 이 금식은 고기를 먹지 않는 거라며 채식만 먹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은 이게 마음에 안드는 것입니다. 왜 금식하는가? 본문은 왜 금식 안하는가 인데 여기는 반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보면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예수님도 잘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러면 금식 문제 삼지 말고 예수님을 잘 배우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더니 한 선교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기껏 배우가 가서는 금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어보니 은혜받으면 금식을 더 열심히 한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양이 예수님을 열심히 배우다보면 마음에 기쁨이 넘쳐 언젠가는 금식 안하면서 신앙생활 할 날이 오지 않을까요? 예수님 믿으면서 금식하면 그대로 둘 수 밖에 없습니다. 그대로 두세요. 그것이 예수님께 대역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경건히 살겠다는데 ‘잘 하라’고 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열심히 가르치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신앙생활의 어떤 모습을 보고 어찌하여 금식하는가 하며 자꾸 문제 삼으면 안됩니다. 자꾸 금식 문제 삼으면 그런 사람은 결국 떠나가게 됩니다. 그냥 예수님 잘 믿고 은혜 충만하게 살도록 기도해주고 필요한 것을 잘 도와주면 됩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떤 것으로든 억압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면 안됩니다. 그 영혼에 부담이 되는 것을 강요하면서 그게 더 좋으니 억지로 하라고 해도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은혜를 잘 누리며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잘 믿고 happy 해하고 성장하고 하나님 역사도 잘 섬긴다면 뭐가 문제입니까? 가만히 보면 사람마다 예수님을 믿는 은혜 받는 방식이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새벽기도로 힘을 얻고, 어떤 사람은 다른 것을 못해도 일용할 양식으로 승리하는 삶을 삽니다. 어떤 사람은 매주 소감쓰기나 성경 다독, 일대일을 통해 아주 행복하게 신앙생활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하면서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섬기는 재미에 행복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감사합니까?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좋은 방법을 따라 열심히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우리 개인간의 인격적인 만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꼭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는 모두 예수님 안에 하나라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는 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 소속이요 그중에서도 안암센터라는 것, 이것을 잘 기억하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이 모임에 있으면서 기본적인 무엇을 배워야할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지가 아주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열심히 배우고 전파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서로 존중하며 섬기며 성장해나간다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자꾸 어떤 기준을 대면서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하고 묻고 따지지 말고 그냥 잘 하도록 두면 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이 금식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 좋은 것을 택해 예수님과 함께 있으니 그대로 두면 됩니다. 우리도 어찌하여 해가며 자기 방식을 고집하기보다 잘 들어주고 보호해주며 그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기도해주면 됩니다. 우리가 욕심과 형식을 버리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을 수 있는 지혜를 배우며 활기찬 복음역사를 섬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II.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는가(2:23-3:6)
예수님은 안식일 문제로 바래새인들과 충돌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가만히 보면 당시의 율법주의와 예수님과의 충돌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그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길을 가다가 이삭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손에 비벼 껍질이 벗겨내고 그것을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밀을 이렇게 먹어본 적 있습니까? 배고플 때 우물우물 씹어 먹으면 맛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보았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하고 따졌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밀을 따서 먹는 것은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계명에 비추어보면 그것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과거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지 않고 함부로 죄를 지으며 살다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러던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이제 다시는 전과 같은 죄를 범하지 말자며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습니다. 안식일에 관해서는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고자 어디까지가 일이고 아닌지를 아주 상세하게 정했습니다. 이 당시 이들이 사용하고 있던 규례집인 미쉬나를 보면 안식일의 금지 사항이 30개 항목이 있는데 이중에 ‘곡식 수확 행위’를 세 번째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른 것은 안식일 법을 범한 것이 됩니다. 이것은 고발 대상입니다. 이런 만큼 그들은 안식일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제자들이 이날 밀 이삭을 잘라 먹었으니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그들은 종교 경찰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하셨습니까? 먼저 25절과 26절에서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들어 제자들을 변화하십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에 있는 진설병은 일반 사람이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아비아달은 배고픈 다윗과 그 일행에게 그것을 주어 먹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대제사장은 왜 그런 떡을 일반사람에게 주었느냐, 다윗은 어쩌자고 그런 떡을 먹었느냐며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배고파 지쳐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얼마나 귀한 사람입니까? 이것을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 주어 먹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예로 들어서 제자들이 안식일 배가 고파 밀을 좀 따서 먹었기로 그것을 뭐 그렇게 크게 문제 삼느냐며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윗과 같은 귀한 사람들로 보신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장차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예수님을 이어 구속사를 섬겨나갈 것입니다. 이들은 얼마나 귀한 사람들입니까? 지금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겨주고 보호해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섬기느라고 밥도 못 먹고 있다가 마침 밀밭 사이를 지나갈 때 배가 고파 밀이삭을 좀 따서 먹었기로 그게 뭐 그렇게 문제냐는 것입니다. 남의 밀밭에 들어가 밀이삭을 왕창 따서 간다면 그것은 도둑질입니다. 그러나 지나가는 길에 배가 고파 조금 꺽어 먹은 것도 죄도 아닙니다. 배가 고프면 그 정도는 괜찮다는 자비의 정신이 율법에도 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조금도 책망하지 않고 다윗 수준으로 올려 변호하고 바리새인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를 믿고 배워가는 형제 자매들, 하나님 역사를 섬기는 종들, 목자님들을 세상으로부터 그들의 수고를 알고 귀하게 여겨주면서 잘 보호해주어야 합니다. 이들에게 대해 바리새인과 같이 법조문을 갖다 대고 ‘어찌하여 ...’하고 말하면 자기에게나 교회에게나 뭐가 좋겠습니까

27과 28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사람이 오늘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여전히 아파야하고 여전히 배고파야한다면 그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안식일 법은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법인데 그  핵심내용은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 법을 세워서 우리에게 뭔가가 얻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먹고 사느라고 일주일 내내 일만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6일 일하고 하루는 쉬면서 가족하고도 지내고 하나님도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깊이 있는 법학자이셨습니다. 법의 처음 의도, 그 정신을 잘 알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안식일 법을 해석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28절에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주이십니다. 성부하나님과 함께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만드시고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제정해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엿새 동안의 날도 주인이시지만 안식일에도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을 가장 잘 아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니라.’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이런 오해는 3장에서도 이어집니다. 3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날도 안식일이기 때문에 말씀을 전파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6절을 보면 이들은 바리새인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셔서 이런 사람을 안식일에도 고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이 사람을 고쳐주면 안식일법 위반으로 고발하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안식일 법에 의하면 아주 급한 것이 아니면 아파도 고쳐주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손마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자기 손이 말랐다는 자의식과 운명적인 생각,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갈지 않다는 마음의 고통이 있고, 여기에 먹고 살기도 힘드니 얼마나 가엽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그대로 그 손을 안식일에 고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더 악한 것은 바로 법 그 자체를 지키려고 한다기보다는 예수님이 미워 안식일 법을 이용해서, 그리고 이 손마른 사람을 이용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보신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 앞에서 말한 대로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 사람을 위해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는 적극적으로 불우한 이웃을 고통 가운데서 구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날 마침 예수님도 계시니 이 사람을 고쳐줄 수 있는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날은 오랜 세월동안 손이 말라 버린 그 사람을 고통에서 구해주는 선을 행하는 날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안식일 정신을 이렇게 아주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바리새인들을 안타까워하시고 에게 올바른 안식일 법에 대해 가르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4b를 보십시오.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예수님이 그 사람의 손을 고쳐주어도 고발할 수 없으니 그냥 잠잠히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세상의 이런 사람들이 종교지도자라니 기가 막히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탄식하시고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네 손을 내밀라’하시고 그의 손을 고쳐주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회개하기는 커녕 평소에는 원수처럼 지내던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까 모의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은혜의 역사, 능력의 역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데 과거의 법과 규례에 얽매여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어떤 위험 속에서도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고 살려주는 것입니다. 카타르에서 세례식과 성찬식을 집례했습니다. 그런데 성례식이 다 끝난 후에 인도네시아에서 온 파디다 자매가 예수님이 자기 죄를 다 용서했다고 고백하며 감사의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이 자매는 원래 무슬림 자매였는데 인도네시아에서 카타르로 와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마음에 많은 상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서 먼저 온 요안나 자매님이 이 자매를 불쌍히 여겨주고 들어주고 도와주고 성경을 가르치면서 마침내 이 자매가 개종해서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이 자매의 어두웠던 얼굴이 성찬식이 끝난 후에 아주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에는 기쁨의 소감발표를 한참 했습니다. 자매가 살아난 것입니다.
안식일 법이든 무슨 법이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법은 우리가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런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을 배우고 은혜와 사랑, 능력을 베풀며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법은 이 모든 것을 위한 보조 장치일 뿐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법이 꼭 있어야하지만 그 법은 원래의 정신을 따라 정의와 사랑의 정신에 기초해 집행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공의로우시면서 동시에 누구보다도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율법주의는 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이것을 범한 자를 가차 없이 정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법의 정신을 아시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십니다. 우리가 혹시 이런 율법주의자는 아닌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뭔가 원칙을 따지고 남의 잘 잘못, 허물이나 뒤지고 고발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처럼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사람들이요 장차 하나님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고발보다는 변호해주고 불쌍히 여겨주고 기도해주고 도와주어야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 마음이 완악해져있고 비판의식에 가득 차 있다면 도무지 그게 누구를 위한 것인지,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실 것인지 기도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이 생명의 역사, 성령의 역사를 보호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배워야할 것입니다. 이 커다른 생명의 역사를 두고 ‘어찌하여 금식하지 않느냐’ 한다거나 ‘어찌하여 밀 이삭을 따먹는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는가’ 하는 율법주의자들이나 완악한 바리새인들의 마음을 늘 경계하면서 우리가 이 생명의 역사를 섬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계열을 따라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 세우고 가는 복음주의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는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예수님의 제자들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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