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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2018 마가복음 8강
성경본문 마가복음 4:21-34
ㆍ조회: 419  
씨가 나서 자라되
2018 봄학기 마가복음 제 8 강
                                   하나님 나라는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 말씀 : 마가복음 4:21-34
■ 요절 : 마가복음 4: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 역사는 말씀을 듣고 전파하는 말씀 역사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힘쓰신 것은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갖고 왔지만 예수님은 ‘내가 이 일을 위해 왔노라’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여러 마을로 다니시면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산에서, 바닷가에서, 집에서, 그리고 회당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말씀이 사람을 깨우치고 회개하게 하고 그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만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말씀 전파의 중요성을 가르치셨고 또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듣고 받는 사람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구원을 이루는지에 대해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니까 말씀 자체가 가진 생명력과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우리도 매주 말씀을 배우며 또 말씀을 전파하는 목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말씀을 귀를 쫑긋 세우고 잘 들어야하겠습니다. 듣는 자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Ⅰ. 등경 위의 등불 (21-25)
 오늘 본문의 21-25절은 예수님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 그 유익이 무엇인가에 대해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통해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리는가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함이 아니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뒤집어씌우거나 상 아래 두지 않습니다. 등불을 켜는 이유는 널리 비추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불은 등경 위 높은 곳에 둡니다. 그러면 방안이 넓게 골고루 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비유로 가르치는 이유는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게 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등불을 등경 위에 두듯이 더 많은 사람들이 듣고 깨달아 구원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비유는 직설적인 것이 아니라 얼핏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바람 앞에 등불이다’하는 이 말은 쉬우면서도 긴박한 위기 상황을 너무 잘 나타내주는 효과만점의 비유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비유도 효과만점으로 이 비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도 말씀을 등불에 비유하게 계십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어둡습니다. 무지로 어둡습니다. 죄로 어둡습니다. 자기 장래가 어떻게 될지 몰라 늘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현대를 사는 사람 마음속에 있는 일차 좌절은 바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결혼도 안하려고 하고 자녀도 낳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 빛이 됩니다. 우리 인생의 빛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05)라고 말했습니다. 빛이 있으면 우리는 안심하고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어둠 속에서도 갈 길을 확신하며 나갈 수 있습니다. 두려움 대신 담대하게 나가 주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은혜와 능력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장차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이중부정은 보다 강한 긍정입니다. 예수님은 드러내려고 숨기셨고 나타내려고 잠깐 비유로 감추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의 심정이 충만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시며 구원의 비밀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드러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력한 계시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알기 원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을 말씀의 깊은 세계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24a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24a) 비유는 얼핏 듣기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주의 깊게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면 생각하면 생각하는 만큼 그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24b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여기서 헤아린다는 말은 어떤 기준 잣대-measure-를 가지고 말씀을 대하는가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나 복음을 존귀한 것으로 여는 사람은 그런만큼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의미를 알고자 애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가 말씀을 그렇게 존귀하게 여기고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말씀의 축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아 나 그거 벌써 몇 번 씩이나 공부했어 하고 다 아는 듯 대하면 하나님은 그래 너는 다 아니까 내가 더 이상 줄 은혜가 없구나 하면서 받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귀중하게 생각하면서 대해야 합니다. 이 뜻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하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참고 서적들도 살펴보고 뜻을 파고 들어갈 때 그런 만큼 말씀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십니다. 그가 헤아리는대로 헤아려주십니다.
예수님이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도 제자들이 “아,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라” 하며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생각하며 말씀의 깊은 세계로 나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생각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제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받아쓰려고 하지 생각은 잘 안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즉흥적인 감정과 본성대로 행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죄악된 습성으로서 조상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단이 인간을 유혹할 때 그때 조금만 더 생각해 보았더라면 사단의 유혹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사단의 말을 듣고 그만 욕심에 사로 잡혔고 아담은 여자를 너무 사랑해 분별력을 잃고 함께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생각 없이 욕심과 감정대로  행하다가 망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다가, 그들이 사용한 그 헤아림대로 그들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범죄도 대부분 생각 없이 행하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똑같은 말씀을 두고도 우리가 말씀에 대해 갖고 있는 measure, 즉 그 잣대를 따라 우리의 자세가 달라지고 그 결과에 엄청난 차이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가 하며 깊이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말씀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니 내가 믿고 순종해야 하겠다’하며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고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깊이 있는 말씀의 종이 되고 어느덧 영적인 지도자가 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다 안다는 생각하고 그런 가벼운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은 말씀으로부터 은혜를 받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는 은혜 대신 율법이 들어옵니다. 마음이 힘듭니다. 내가 왜 이렇게 힘들까? 그리고 주로 남이 나에게 뭐라고 하는가 이런 것에 신경을 쓰고 예민해집니다. 그러면 이내 율법적인 되어 그 신앙에 기쁨이 없습니다. 내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내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 하며 갑자기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그나마 있던 은혜도 다 사라진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말씀의 뜻을 헤아려가며 묵상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받은 은혜 위에 은혜를 더 할 것이고,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안다며 묵상하지도 헤아리지도 않는 사람은 그나마 누리던 은혜다 더 빼앗겨버릴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서 1장을 보면 하나님은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네가 형통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멋진 교회에 가고, 어떤 동네에서 살면 자기 인생이 형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곳에 사람이 많고 집값도 비쌉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조그만 교회를 다녀도, 제기동 개천가에 살아도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 그 말씀을 깨닫고 마음에 새겨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형통한 것입니다. 말씀을 생각하는 것, 이거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실 때 생각하는 훈련을 많이 시키셨습니다. 이런 저런 것을 동원해 늘 생각해보도록 하셨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마 6:28)하시면서 그러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기고 염려를 이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너희 생각은 어떠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마 18:12) 생각해보면 이런 판단이 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각도 똑바로 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막 8:33) 그리고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제자들은 생각하는 지성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감정과 혈기대로 하기보다 생각하는 제자, 생각하는 목자가 되고자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말씀 앞에서 조급해하지 않고 진득하게 앉아서 진리의 별이 떠오르기까지 읽고 또 읽고 묵상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특별히 글을 쓰는 훈련은 가장 좋은 생각훈련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쓰는 소감을 쓰는데 이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나오고 그것이 말씀 앞에서 정리되면서 우리는 말씀을 깊이 파고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만큼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힘있게 축복해주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그래도 심령에 은혜가 충만하고 기쁨이 넘쳤을 때는 생각하며 소감을 쓸 때가 아닙니까? 이것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소감쓰기가 좀 힘들어도 써야하는 이유입니다. 어쨌든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사상성 있는 믿음의 사람들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경외심의 잣대로 대하고 그런만큼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생각하게 하시고 특별히 주의 말씀을 더 깊이 생각하게 하셔서 높은 수준의 제자들이 되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영육간에 풍성한 삶을 누리고 또한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구속사에 아주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게 해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Ⅱ. 자라나는 씨의 비유 (26-29)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또 다른 비유를 가르쳐주셨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우리는 이미 하나님 역사는 말씀 역사임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역사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성경선생으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전파자입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대로 말씀을 세상에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말씀의 씨를 뿌려야 하는 이유는 세상이 아무리 삭막하고 어둡고 절망적이라 해도 그럴 때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때문입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구원 받으며 병든 자가 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뿌리면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은 스스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뿌려진 씨는 스스로 자랍니다. 농부의 코치를 받아가면서 자라지 않습니다. 농부는 그런 짓 안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뿌린 씨가 자랄지 안 자랄지 걱정하지 않습니다. 농부는 뿌리고 나서 그냥 자고 깨고 자고 깨고 할 뿐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씨가 스스로 자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씨만 그렇습니까? 28절 첫머리를 보십시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 와~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니! 땅은 씨가 자기에게 떨어지면 ‘와, 드디어 씨가 내게 떨어졌구나’ 하는 소리 없는 탄성을 발하면서 스스로 일해 씨가 성장해 열매 맺기까지 모든 것을 제공해줍니다. 씨와 땅이 만나면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씨와 땅의 만남은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만남입니다.  

이 교훈은 말씀을 전파하는 우리 목자님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큽니다. 우리도 말씀의 씨를 뿌릴 때 뿌리고 난 후에 이 씨가 자랄까 안 자랄까 걱정하면 안됩니다. 오늘 그 양은 인상이 험악했는데 말씀을 받았을까? 일대일 공부할 때 그렇게 반발했는데 오늘 공부는 망친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농부가 뿌린 씨에 대해 의심하지 않듯이 우리도 의심하면 안됩니다. 사람에게는 마음, 곧 heart 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heart는 말씀 앞에서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이 말씀이 마음에 똑, 똑 하고 떨어지는 순간 마음에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안받으려고 몸부림쳐도 마음에 떨어진 말씀은 거기에 뿌리를 내리며 파고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유행가 가사에 ‘마음 약해서 실수를 했네..’하는 말이 있는데 마음은 말씀 앞에서 약합니다. 목자님의 사랑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할 수 없이 일대일 해주었는데 그런 사람 안에 말씀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말씀은 마음 앞에서 더 약합니다. 이러면서 구원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사람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존재요 그런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습니다. 영어에 miserable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참하다’라는 뜻인데요, 이 단어가 독일어에서는 Elend입니다. 이 단어는 고향 땅을 떠나 있다거나, 혹은 나라에게 쫓겨났을 때의 마음의 상태나 감정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자기가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교제하며 행복하게 살아야하는데 이렇게 기약없이 고향 부모형제를 떠나 있으니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낙원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있어야하는데 죄 때문에 이 낙원에서 추방되었으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마음에 허전하고 외롭습니다. 영혼이 고통스러워합니다. 이런 만큼 사람은 의식 무의식적으로든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를 갈구합니다. 거기에 내 마음의 평온과 안식이 있다고 생각하며 탄식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똑! 떨어지는 순간 우리 마음은 바로 이것이야 하며 감동받고 기쁨으로 반응합니다. 중세에 어떤 성인이 말했습니다. ‘나의 님이 말씀하실 때 내 마음은 녹아버렸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배우던 어느 날 소감을 쓰다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이 말씀이 내 마음이 떨어졌을 때 내 마음은 완전히 녹았습니다. 이 말씀을 받고 감사의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모릅니다. 어떨 때 우리 마음은 완악해 있어서 말씀에 반발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씨는 우리 모르는 사이에 우리 마음 밭에 조용히 뿌리늘 내리면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이 역사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감동의 물을 주어 그 말씀이 자라게 하시고 우리는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어느덧 그 씨는 이삭이 되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틈에 하나님나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고 풍성한 생명의 은혜를 누립니다. 사람의 마음은 태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주변의 친구들 중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나도 언젠가는 하나님을 믿을 거야!’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의 씨가 떨어질 때 말씀이 거기서 자라 어느덧 이삭이 되고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말씀의 떨어지는데 어찌 열매가 맺혀지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코드가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다만 열심히 말씀의 씨를 뿌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자고 깨고를 반복하면 될 뿐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가서 자고 깨고 또 말씀을 뿌리고 .. 그러면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마음도 제대로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그 마음에 말씀이 자라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뿌려놓은 말씀을 기초로 그 사람과 대화하며 일하십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느니라’(고전 3:6). 우리는 심고 하나님은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말씀을 가르친 후에는 자고 깨고 자고 깨고하며 잠 잘 자는 사람이 열매 맺습니다.

둘째, 성장에는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28, 29절을 다시 보십시오. “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의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러라 ” 씨는 그 자체 내에 성장 project를 가지고 큽니다. 먼저는 씨가 싹이 되고 그 다음에 이삭이 되고 그것이 한여름 뜨거운 태양을 받아 자라면서 가을에 거기 충실한 알곡이 맺힙니다. 씨는 결코 비약하지 않습니다. 씨에서 싹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갑자기 이삭으로 월반하는 경우도 없고 싹이 바쁘다며 갑자기 열매가 되는 일도 없습니다. 씨의 성장과정에는 인간이 끼어들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며칠 전 임야곱 목자님이 화단에 해바라기 씨를 심으셨습니다. 먼저는 씨를 물에 넣어 불리고 한 알 한 할 총 50알 정도를 심었습니다. 나는 이 해바라기가 빨리 자라 그 화사하면서도 수줍어하는 듯이 빛나는 그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싹이 나야하고 줄기가 자라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 여름 어느 날 우리는 회단에 줄지어 피어있는 해바라기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씨를 심었으면 이제는 그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말씀을 심었으면 꿈을 가지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때가 되어 모든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뽑거나 push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잠도 안자고 꼬챙이 들고 밭을 들쑤시고 자라는 싹의 목을 잡아 뺀다고 뭐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성장까지 책임을 져야한다면 우리는 이내 지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사람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 도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뿌리고 난 후에 너희들은 자고 깨고 자고 깨기를 반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가 악하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들이 마음에 소원이 없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소원은 없어도 마음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떠하든 우리가 할 일은 다만 말씀의 씨를 널리 뿌리는 것입니다. 양하고 일대일 한 후에 집에 가서 잠을 자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확신 가운데 씨를 뿌리되 자고 깨고 하는 것을 배우며  주님 키우시는 것을 보고  추수하는 기쁨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Ⅲ. 겨자씨 비유 (30-34)
 이어서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해주셨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겨자씨는 볼펜으로 점을 찍어 놓은 정도로 작은 씨입니다. 땅에 떨어진 겨자씨는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눈 좋은 새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씨가 자라면 크게는 4-7m 까지 자라 공중의 새들이 찾아와 가지에 깃들며 안식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아주 작고 미미하게 시작하지만 그것이 후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것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구원 역사를 섬기며 처음 하는 일은 아주 미미하여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대 로마 제국이라는 엄청난 나라를 생각하고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수많은 종교들을 생각하면 제자들의 말씀 역사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으면서 그것은 아주 힘 있게 성장해나갔고 마침내 로마 제국 내에 유일한 합법적 국교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법이 기독교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고 제정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작은 일대일 성경공부는 문제 많은 이 세상에 정말 겨자씨 한 알같이 아주 작게 여기지고 그래서 별것 아닌 것같이 보입니다. 우리가 이루는 작은 기도모임이 어떻게 세상에 영향을 미칠지 이것도 사소해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역사는 늘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크게 자라났습니다. 큰 구원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임의 시작도 고 이 사무엘 선교사님과 배사라 선교사님 두 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한팀 한팀 일대일을 하면서 큰 모임이 이루어졌고 우리 안암센터도 처음부터 이랬던 것이 아니라 일대일을 한팀 두팀 하면서 이렇게 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왕에 하는 거 한번 크게 해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역사는 겨자씨 같이 작게 시작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지금 겨자씨 같은 작은 역사를 귀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사람을 키우시면서 400년 후, 그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고 출애굽해 광활한 가나안 땅을 정복해 살 것을 꿈꾸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 한사람으로 인해, 또 우리 가운데 이루는 조그만 겨자씨 같은 역사가 200년, 300년 후에 큰 나무가 되고 더 나아가 숲을 이룰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과 비전을 가지고 오늘 씨를 뿌리며 기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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