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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2018 마가복음 9강
성경본문 마가복음 4:35-5:20
ㆍ조회: 285  
그가 누구이기에

2018년 마가복음 9강                                     찬 251장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불쌍히 여겨주셨는가

■ 말씀 / 마가복음 4:35-5:20
■ 요절 / 마가복음 5:19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잡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입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에 나오는 기록들, 사건 사건을 하나 하나 공부하다보면 우리는 마침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부터 저자 마가는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난 4개의 기적을 연이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귀신들린 한 청년을 구원해주신 예수님, 12년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을 고쳐주신 예수님,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주신 예수님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 위해 밟고 건너가야 하는 징검다리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이 한 사건 한 사건을 밟아 건너가다 보면 우리는 저편에 도달해서 “아,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 하면서 어떤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4개의 기적 중 처음 두 개, 곧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신 예수님과 떼 귀신 들려 고통하는 한 청년을 구원하신 예수님에 대해 함께 배워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이 청년을 구원하기 위해 돼지 2,000마리를 희생시키는 예수님의 자비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것을 통해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불쌍히 여겨주시고 구원해주셨는지 함께 생각해보면서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 온전한 경배를 올려 드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I.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 (4:35-41)
오늘 본문의 앞부분을 보면 예수님은 온종일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해주시고 이것을 풀어주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그날 저물 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이제 무리를 떠나 쉬게 되었다며 좋아했습니다. “야호 MT다. 가즈아!” 제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노를 저었고, 배는 순풍에 돛 단 것처럼 갈릴리 호수를 미끄러지듯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과 함께 가즈아 MT에 제자들은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호수 한가운데 들어섰을 때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고 광풍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삼각 파도가 일어나 배는 높이 띄웠다가 이내 아래로 곤두박질치듯 떨어졌습니다. 어두운 밤에 이런 일을 당하자 제자들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이런 일 경험해보셨습니까? 대낮의 파도도 무서운데 이런 광풍을 칠흑같은 밤에 만나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이때는 어부였던 제자들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39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예수님은 지금 이 사태를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저 태평스럽게 코를 골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을 깨우며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무관심하시고 잠만 자신다고  원망 섞인 호소를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Quiet, Be still – 예수님은 교실에서 떠드는 아이들에게 말씀하시듯 하셨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바람과 바다는 잔잔해졌고 사방은 고요해졌습니다. 수면 위로 달빛이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방금 전에 그 무시무시하던 바람과 파도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이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이것은 책망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그것은 믿음이 없으면 야단맞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역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두려움 이 없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이 그들을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은 파도를 보고 무서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때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제자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때 그들을 이해해주시기는커녕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을 때는 책망하십니다. 그것이 제자인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동안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그 능력을 체험하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귀신을 좇아내고 중풍병자를 말씀으로 고치고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이럴 때마다 이런 사건들 하나하나를 연결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기만 했는지 그러질 못했습니다. 뭔가 열심히 말씀을 배우고 아멘 아멘 하면서 믿음이 성장하는 것 같았지만 이렇게 광풍 앞에서 두려워 떨고 원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고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말은 “너희가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나와 함께 있었으면 이제 이 정도는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했는데 어째서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하고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이 예수님의 목표가 분명한 만큼 가는 도중 무슨 일이 생겨도 결국에는 건너편에 가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함께 배에 탄 제자들도 저 건너편으로 안전하게 도착할 겁니다. 제자들도 주무시는 예수님을 보고 ‘아, 예수님이 저렇게 걱정없이 주무시는 것을 보니 이 바람과 파도 잠깐 있다가 말 일이구나, 예수님 정말 잘 주무시네’ 하면서 ‘나도 피곤한데 잠 좀 자즈아 ’하면서 예수님 옆에 누워 함께 자야하는 겁니다.  폭풍 중에 잠자는 거! 이게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큰 구원의 방주에 탄 사람들입니다. 40일 동안 주야로 비가 퍼붓고 땅에 샘이 터져 온 세상이 물로 다 덮인다고 해도 안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셔서 예수님과 함께 사명의 배를 탄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저 끝까지 가는 겁니다. 물론 가는 도중에 이런 무시무시한 큰 광풍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고 해서 인생의 광풍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과 직장등 우리의 삶과 사명의 현장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생깁니다. 이런 것들은 잠시 잠깐 우리에게 큰 시험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라도 우리는 근본적으로 망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안믿는 사람들도 이런 환란을 잘 견딥니다.  사람 친구들이 술자리에 모여 하는 말 들어보세요. “야, 야,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을 있다잖아. 야,야 걱정말고 술이나 마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요즘은 이런 것보다는 좀 더 세련된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의 삶이라고 앞에 꽃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역사가 잘 될 때도 있지만 침체기도 있습니다. 애매하게 비난받고 고난 받을 때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사단의 역사도 일어납니다. 이 광풍이 때론 강력하게 일어나서 빠져 죽을 것 같은, 그야말로 다 망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들기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을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배에 함께 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음부의 권세가 하나님의 교회를 결코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마16:18). 우리 인생의 배, 제자의 삶의 배에는 예수님께서 함께 타고 계시기 때문에, 마침내 우리를 건너편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을 연단하시고자 이런 광풍훈련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말씀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을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만물의 명령권자요 섭리자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제자 훈련을 위해 광풍이 일어나게 하시고 본인은 주무신 것입니다. 아무리 광풍이 불어도 죽을 것 갈지만 안죽는다는 것, 그래서 예수님과 같이 이런 때도 잠을 잘 수 있어야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온실 속의 나약한 화초는 바람에 쓰러집니다. 그러나 광풍 속에서 많이 흔들려본 나무는 뿌리가 깊습니다. 그것은 큰 거목으로 자랍니다. 그렇듯 이런 훈련을 받은 사람이 믿음이 견고해집니다. 어떤 험한 사명의 현장에서도 복음역사를 감당할 수 있는 강한 믿음의 용사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광풍은 우리를 하나님의 쓰실만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요, 고차원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훈련의 끝에서는 일어나 말씀으로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시고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이 훈련의 방점을 찍으신 것입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놀라며 말했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제자들은 광풍훈련을 통해 예수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눈이 떠지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II. 귀신들린 청년을 구원하신 예수님 (5:1-20)
예수님 일행이 광풍을 헤치고 마침내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마 새벽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사방이 무덤이었습니다. 때마침 어디선가 늑대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아오 ~’ 제자들은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시커면 물체가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 앞으로 달려나왔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예수님 뒤로 숨었습니다. 바다에나 땅에나 온통 무시무시한 것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 가즈아 MT는 영 맛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귀신입니까 사람입니까? 그는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만큼 그는 온 몸이 더럽고 악취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무덤은 주로 굴을 파 만들었고 그 입구를 돌로 막았습니다. 무덤이 있는 곳은 음산하고 또 여기저기서 시체가 썩는 냄새도 납니다. 사람들은 이런 곳을 꺼려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람들을 떠나 이렇게 무덤 사이에서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난동을 많이 부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제어하려고 쇠사슬로 매어두고 혹은 발에 고랑을 채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귀신에 들려 그 힘이 엄청났습니다. 쇠사슬을 끊고 고랑도 다 깨버리고 사람이 간섭하지 않는 이곳 무덤으로 도망왔습니다. 이런 그는 밤이면 밤마다 날이면 날마다 무덤이나 산을 돌아다니면서 늘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서 소리 지른다는 말은 ‘cry out’ 으로 한맺힌 사람이 복수를 위해 소리 지르듯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뭐가 그렇게 분하고 답답했는지 이렇게 악악 대고 소리지르며 돌아다녔습니다. 그의 영혼은 쉼이 없었습니다. 그는 또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그의 온 몸에는 상처투성이 피투성이였습니다. 사람이 자기 욕망의 출구가 없으면 이렇게 자해합니다. 자해는 자기 미움의 표시이고 반대로 극한 자기 사랑과 세상에 대한 원망의 표현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극심한 좌절을 겪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옷을 다 벗어던지고 터질 것 같은 분노로 세상을 욕하고 원망하며 뛰어 다녔습니다. 그는 이렇게 모두에게 버림받고 귀신의 세력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격이 다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입고 난 고귀한 존재인데 그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이렇게 귀신에 들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이방 사회인 거라사 지방의 우상숭배와 정욕에 빠져 이성과 자제력을 잃고 죄를 범하다가 귀신에게 붙들리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귀신이 이 사람에게 또 들어가고 또 들어가 그는 떼귀신에 들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되어 천하에 가장 비참하고 추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를 보시자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넙죽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 귀신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예수님께 경배하거나 관계성을 맺고자 하지 않고 멸망할 것 같은 두려움에 떨며 자기를 떠나도록 간청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귀신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심으로 그 사람과 귀신을 분리해서 보셨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귀신 들린 자를 볼 때 그 사람 자체가 못쓰게 된 것으로 생각하고 소망을 아예 끊어버립니다. 그리고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과 귀신을 분리시켜 생각하셨습니다. 그 사람 속에 역사하는 귀신이 문제이며, 귀신만 쫓아내면 그 사람이 온전케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셨습니다. 괴물과 같이 변한 그에게 실제 이런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인간관입니다. 우리가 사람과 귀신, 사람과 문제를 분리시켜 보는 인간관을 가질 때 포기치 않는 사랑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한다면 어떤 사람에게도 소망을 두고 도와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 양들을 돕고자 할 때,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 사람의 인격과 분리해서 잘 보아야 합니다. 누가 미움이나 정욕, 게임에 깊이 빠졌다면 이런 것과 그 사람을 하나로 묶어 사람 자체를 문제 삼아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보게 된다는 우리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며 정죄하면서 그 사람에 대한 소망을 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양들도 가만히 보면 본래 자아는 하나님을 원하는데 그 속에 역사하는 이런 죄의 세력이 모든 것을 방해하고 끌고 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가 가서 도와주려고 하면 심하게 반발하고 자기를 내버려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간섭받지않는 자기만의 세계로 도망가버립니다. 심방도 못오게 합니다. 그러나 목자가 양들이 이렇게 반발한다고 포기해버린다면 어느 누가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사람 자체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이렇게 보는 한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문제는 귀신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어떻게 계속 도와주셨습니까? 예수님은 반발하는 그 사람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수님께서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첫째로, 귀신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서입니다. 귀신의 속성 중의 하나는 속이는 것입니다. 귀신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다른 원인 때문에 이 사람이 못쓰게 된 것처럼 속이고자 합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이런다거나 무슨 일에 상처를 받아서 그런다거나 온갖 그렇듯한 이유를 대며 문제를 자꾸 밖에 있는 그 무엇으로 돌립니다. 목자가 이런 말에 속아 넘어가면 문제의 근본은 찾을 수가 없고 귀신은 계속 그 사람 안에 숨어서 활동합니다. 그러나 일단 귀신은 자기 정체가 드러나면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spy 가 정체가 드러나면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고 떠나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둘째로, 그의 본래 자아를 회복토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귀신을 쫓아내고 그 사람에게는 본래 이름을 찾아주고자 하셨습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전 존재를 나타냅니다. 이 사람은 이제까지 자기 이름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귀신이 자기인지 자기가 귀신인지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귀신이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을 볼 때 자기는 귀신들려 울부짖는 한 소망 없는 괴물과 같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거짓된 이름을 버리고 참된 자기 이름을 찾도록 도전하신 것입니다. 자기의 이름, 곧 자기의 본래 존재를 찾도록 질문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누구인지, 본래 내가 어떤 자였는지 올바로 인식할 때 비로소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자기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 특별히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은 문제 해결의 길잡이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너무 자학하느라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기 과거의 죄라든가, 자기 가족의 내력, 미움이나 한때의 실패를 생각하며 운명적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늘 어둡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을 누가 알까봐 두려워하고 그런만큼 또 감추고자 하고 그러다가 어느 틈에 자신을 자학하며 낮은 자존감에 갇혀 고통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자존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할 때 생겨납니다.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 때 비로서 우리의 자존감을 높아지고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하는 것, 이것은 새로운 삶의 출발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너는 어떤 존재이냐.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가 참된 자아를 회복하도록 도와주십니다. 거짓된 세상 속에서 우리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도록 도우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귀신이 대답했습니다.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여기서 군대란 레기온으로서 6,000명으로 구성된 로마의 군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 군단 만큼이나 귀신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나 많은 떼 귀신이 이 사람에게 들어와 지배하고 있으니 이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정체가 폭로된 귀신들은 더 이상 그 사람 속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이 지방을 떠나지 않고자 자기들은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 지방이 귀신이 살기에 좋은 곳이었던 것같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더러운 귀신들이 그에게서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이때 거의 2,000 마리의 돼지 떼가 갑자기 꿀꿀거리며 미친 듯이 바다를 향해 비탈로 내리달아 몰사하였습니다. 그러자 귀신들렸던 사람은 정신이 온전하여져서 단정히 옷을 입고 예수님 곁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하나님 나라의 왕자같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2,000마리의 돼지떼를 희생시키시며 이 사람을 구한 것입니다. 2,000마리의 돼지이면 요금 시가 한마디 당 40만 원, 총 8억 원에 해당합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이를 위해서 8억 원이라는 엄청난 물질적인 희생도 마다 않으십니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세상 어떤 것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이 예수님은 후에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목숨도 내어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우리를 위한 온전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십니까! 우리가 이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해야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확신하며 살아나가야 하겠습니다. 자기 목숨을 주시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요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떤 못쓸 죄에 빠지고 어떤 악마의 세력이 우리를 끌고가려고 해도 예수님은 어떤 것이라도 희생하시며, 심지어 자기 목숨을 내어 놓으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십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면 이것을 본 그 동네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께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돼지 2,000마리나 되는 큰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그동안 귀신들려 고통하던 사람이 온전하여 진 것을 보고 놀라기만 했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이 예수님이 여기 있으면 계속해서 이런 손해를 볼 것이라며 이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접하지 않는 그들을 떠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저에 말씀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how much the Lord has done for you and how he has had mercy on you입니다. 주께서 정말 이 사람을 위해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돼지 2,000마리의 희생은 참으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러운 떼 귀신에 들려 산이나 무덤사이를 다니며 고래고래 소리지르다가 죽을 수밖에 없던 그를 이렇게 많은 돼지 떼를 희생시키시며 구하신 예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주님, merciful Lord 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더럽고 추해도 우리를 한없는 자비로 구원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십니다. 이로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주님께 나와 단정히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감사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큰일입니다. 귀신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가족과 데가볼리를 다니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행해주신 큰 일을 전파했습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놀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데가볼리 지방의 선교사가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저도 주께서 저를 위해 하신 큰일을 생각하면 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인생을 참으로 허무하게 여기며 어떻게 할줄을 몰라 이리저리 방황하던 자였습니다. 아, 어디가서 무엇을 하면 이 허무가 내 마음에서 떠나갈까 늘 마음의 고통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를 창세기 말씀을 공부하게 하시고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욕과 불순종은 저에게도 고질적인 죄였습니다. 저는 이런 죄들 때문에 지옥의 문턱까지 갖다오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두려움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저에게 많은 주의 종들을 보내주시고 수 년동안 계속해서 일방적인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해주시고 때마다 들어주고 섬겨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죄와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알게 하시고 충만한 생명의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자격없는 자를 결혼도 하게 해주시고 아들도 낳게 하시고 양들의 목자가 되게 하신 것을 생각하면 이 모든 은혜가 그저 놀랍고 놀라운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해 내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며 자기 생명을 내어놓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고 더욱 감사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이 시간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하시고 섬겨주셨는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까지 예비하셨으니 더욱 그러합니다. 한때는 너무 인생이 허무해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도 슬펐는데 이제는 언제나 죽어 하나님 나라에 가게될까 하나님은 언제 나를 불러주실까 하며 그날을 설레이며 기다리게 하십니다. 세상에 이런 반전이 있을까요? 내가 누구길레 주께서 이렇게 내 안에 이런 큰일을 하셨는지 다만 놀랍고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알게 하시고 복음을 만민에게 전파하게 하신 그 은혜가 놀랍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제자들은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을 보고 그가 누구길레 이럴 수 있는가 하며 놀랐습니다. 정말 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도대체 나는 누구길레 주께서 이렇게 나를 불쌍히 여겨 구원해주셨는지 이것도 놀라울 뿐입니다. 내가 일생 이 은혜를 기억하고 더욱 주님을 사모하며 그가 하신 큰일을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에 관한 두 개의 이야기만을 살펴보았지만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잠잠케 하신 권능의 주님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것이라도 희생하시는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번 학기 마가복음을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통해 징검다리 밟아가듯 예수님에 관해 하나하나 배워나가며 마침내 예수님의 권능의 세계, 그 깊고 깊은 은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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