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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신년특강 제 1 강
성경본문 마가복음 13:1-37
전한날짜 2005/01/09
ㆍ조회: 2955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2005년  신년특강  제 1 강

▣ 말씀 /  마가복음 13:1-37
▣ 요절 /  마가복음 13:10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여 한 분 한 분에게 새로운 믿음과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스피릿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요사이 세계는 지진의 공포 속에 떨고 있습니다. 작년 12월 26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해역에서 발생한 강진과 지진해일(쓰나미)의 피해는 엄청납니다. 7일까지 사망자가 11개국에서 16만 명에 육박하였고, 수만 명이 실종 상태여서 사망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지진해일로 인한 고아가 150만 명이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미국 지질학 연구소의 켄 허드너트 연구원은 “이번 지진은 지구의 지형을 바꿔났다.”고 하였습니다. “수마트라 남서부 섬들은 남서 방향으로 20m, 한반도 면적의 두 배가 넘는 수마트라 섬 자체도 같은 방향으로 36m 가량 옮겨진 것으로 관측 결과 드러났습니다. 이번 지진의 규모는 1995년 일본 고베지진에 비해 약 1000배 정도 강하고, 이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266만개의 위력에 해당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는 단순히 자연현상에 불과한 것일까요? 우리는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진단하고 있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종말의 때에 일어날 여러 가지 징조들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첫째, 세상의 재난들을 어떤 눈으로 볼 것인가? 둘째,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자는 누구인가? 셋째, 인류의 희망은 무엇인가? 넷째,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세상의 재난들을 어떤 눈으로 볼 것인가? (1-8)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성전의 화려한 겉모습에 도취되어 외쳤습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님은 “그래 정말 굉장하구나”라고 동조하실 줄 알았는데 정 반대로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같은 성전을 보는 데 제자들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외형적인 모습만 보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의 화려함 이면에 숨어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상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죄로 인해 철저히 파괴되고 멸망할 것을 보셨습니다. 이처럼 같은 사건이라 할지라도 어떤 눈으로 보는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해석이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의 12두령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였을 때 10두령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 땅의 거민들을 과대평가하고 자신들은 스스로 메뚜기처럼 생각하였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들을 잘 차려놓은 밥으로 보았습니다. 결국 갈렙과 여호수아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 그 땅을 악평한 자들은 다 광야에서 엎드러져 멸망당하였습니다. 1590년 선조 때 김성일과 황윤길이 통신부사로 일본에 건너가 실정을 살피고 귀국하여 왕에게 보고 하였습니다. 그때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을 경고하였으나, 김성일은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 하였습니다. 왕과 신료들은 김성일의 말을 믿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인 재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재난들을 어떤 눈으로 보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생과 사를 가름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전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종말의 때와 징조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종말의 때에는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하여 사람을 미혹하는 적그리스도들이 난무하게 됩니다. 또한 난리와 난리 소문, 민족간의 분쟁, 나라 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처처에 지진이 있고, 기근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런 일들은 인류 종말이 오기 전에 일어날 징조라고 하셨습니다. 7b절에서 “이런 일이 있어야 한다”(Such things must happen)는 것은 인류의 종말이 오는데 그 전에 징조로서 이런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8b절에서 이런 일들은 ‘재난의 시작’(the beginning of birth pains)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새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통을 겪어야 하는 것과 같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겪어야 할 진통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인류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과, 인류의 종말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필연적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류의 종말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한때 과학의 눈부신 발달로 인하여 인류는 장밋빛 희망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인류의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고, 한결같이 인류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재난의 연속으로서 곳곳에서 종말의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990년 이후 발생한 세계 주요 지진만 보더라도 종말의 징조들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으며, 또 그 강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1990년 1월 이란 북부 갈란주에서 4만명 사망, 1992년 12월, 인도네시아 플포레스 섬에서 3000여명 사망, 1993년 9월, 인도 서부 마하라슈트라주에서 7601명 사망, 1995년 1월, 일본 중부 고베에서 6424명 사망, 1998년 2월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타카르주에서 2000명 사망, 1998년 5월 아프가티스탄 북동부에서 약 5000명 사망, 1999년 8월, 터키 북서부에서 2만명 사망, 5만 명 부상, 1999년 9월, 대만 중부 나터우에서 약 2500명 사망, 1만 1000명 부상, 2001년 1월, 인도 구자라트주에서 3만여명 사망, 2003년 12월, 이란 남동부 밤에서 2만 6000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최근 50년간 전 세계에서 발생한 규모 7 이상의 강진은 약 500회에 이릅니다. 지진 뿐 만이 아니라 지구 온난화로 인해 세계 각처에 이상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갑자기 폭우와 폭설이 내린다든지, 폭풍이 일어나고 홍수가 난다든지, 기온 상승으로 극지방의 얼음이 녹아 섬들이 매몰된다든지 등의 현상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일어나게 될 재앙을 다룬 “The day after tomorrow"라는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일어날 자연재난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폭우와 폭풍이 일어나고 홍수와 해일로 인해 맨하탄이 잠기게 됩니다. 주먹만한 우박들이 쏟아져서 사람들의 머리가 깨져 죽기도 하고, 기온이 -60도로 급강하 하여 비행기의 연료가 갑자기 얼어서 비행기가 추락하기도 합니다. 폭풍이 끝난 후에는 빙하기가 도래하여 북쪽 지방의 사람들은 다 얼어 죽게 됩니다. 미국 북부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멕시코에는 거대한 난민촌이 생겨나게 됩니다. 멕시코가 국경을 봉쇄하여 미국 난민들이 아우성을 치자, 미국 대통령은 멕시코에 대한 모든 빚을 탕감해 주겠으니 제발 국경 봉쇄를 풀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지금은 멕시코에서 매일 수천명이 미국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가 물의를 빚고 있지만, 그 때에는 미국 난민들이 멕시코 국경을 불법으로 넘어가 물의를 빚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과 교만으로 인해 얼마든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류의 멸망은 인간의 도덕적 부패와 우상숭배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이번에 남아시아에 일어난 재앙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이번 지진에서 피해를 입은 지역은 한결 같이 우상숭배가 극심한 이슬람과 불교와 섹스관광으로 이름난 곳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오신 김 여호수아, 그레이스 선교사님에 의하면 이번에 재난을 당한 아체 지역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며, 이곳에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회교 사원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를 하는데 새벽 5시에 해일이 덮쳐서 다 쓸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현재 그곳에는 오물과 쓰레기더미 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체 지역 바로 옆에 있는 메단은 크리스천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서 인도네시아 UBF 형제들의 고향인데 그곳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고 합니다. 또 재앙이 일어난 때도 12월 26일 오전으로서 주일을 지키지 않고 크리스마스 연후를 즐기는 자들에게 재앙이 임하였습니다. 교회가 산에 있었기 때문에 그날 예배를 본 사람은 다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종로 센타의 한 목자는 12월 25일에 결혼식을 하고 회사 친구들이 푸켓에 신혼여행을 가도록 권유했지만 그 다음날 주일이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기 위해 그곳에 가기를 포기하고 제주도로 갔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재난들을 종말의 징조로 보고 종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둘째,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자는 누구인가? (9-13)  

  9-13절에는 환난이 심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 겪게 되는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연속되는 재난으로 인해 끊임없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이런 재난들을 면제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더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조롱과 핍박을 받고 매를 맞기도 하고 가정에서 쫓겨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이는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가치관이 다르고 생활양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 진리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면 반드시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됩니다(딤후 3:12).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겪는 환난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이 겪는 환난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환난을 만나면 좌절하고 절망하고 엎드려지지만, 믿는 사람들은 환난을 통해 믿음이 연단되어 정금같이 순수하게 되고 모든 거짓된 희망을 털어버리고 그 내면에 참된 희망을 소유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환난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또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핍박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복음이 전파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9b절에서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핍박을 복음전파의 기회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환난 중에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위로가 필요한 자에게 위로를 주시고, 용기가 필요한 자에게는 용기를 주셔서 환난을 이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핍박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복음이 전파되어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도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기를 바라는 것입니다(딤전 2:4; 벧후 3:9). 이 때문에 예수님은 10절에서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은 복음 전파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것과, 하나님은 세상 역사를 복음전파를 중심으로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역사의 주된 흐름은 복음 전파이며, 복음 전파자들이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들임을 말해 줍니다.

  때로 우리는 이 나라가 몇몇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처럼 생각되고, 세계 역사도 강대국의 몇몇 지도자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앗수르가 세상 역사를 지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앗수르를 가리켜 “나의 진노의 막대기”라고 하셨습니다(사 10:5). 또한 페르샤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는 고레스를 가리켜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는 나의 목자”라고 하셨습니다(사 44:28). 하나님은 세상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되 복음전파를 중심으로 돌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바라볼 때 과연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염려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 미국의 강경파들이 득세하여 북한을 치면 북한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남한을 공격하여 서울은 불바다가 되고 이 나라는 쑥대밭이 될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고, 내 가정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억울하게 결혼도 못하고 죽는 것이 아닌가? 얼마 전에 결혼한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은 전쟁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것도 불안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강도를 만나 권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분이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개인의 인생 뿐만 아니라 세상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할 때 가장 안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먼저 복음이 만국에 전파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역사의 주인공으로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셋째, 인류의 희망은 무엇인가? (14-27)

  14-27절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을 기초로 장차 있게 될 인류 최후의 종말에 대해 예언의 말씀입니다. 인류 최후의 종말이 가까워지면 그 어느 때보다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하여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합니다. 그리고 우주 천체에 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때는 해가 어두워져 빛을 내지 않게 됩니다. 해가 한 순간이라도 비추이지 않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온도가 마이너스 몇 백도로 급강하 하여 모든 생물이 동사하는 끔찍한 사건이 순식간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날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자연히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낙엽 떨어지듯이 우수수 떨어지게 되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게 되는 엄청난 이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천군천사들의 우렁찬 나팔소리와 함께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게 됩니다. 그때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이름을 부르게 되는데 내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끝장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그날은 인류 역사의 종말인 동시에 최후 심판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에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치욕의 날이요 멸망의 날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요, 영광의 날입니다. 역사의 시작이 있으면 종말이 있게 마련입니다. 인류 역사의 시작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로 시작되었지만, 인류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구원주인 동시에 심판주로서 인류 역사의 중심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사망 권세를 파하셨기 때문에 자기를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실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만이 인류의 진정한 희망이 되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희망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살아 갈 수 없습니다. 희망은 삶을 영위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희망을 붙들고 살았는데 그 희망이 거짓된 희망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인생은 그야말로 가장 비참하고 가장 절망적인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참된 희망을 붙들어야 합니다. 물질이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또에 희망을 걸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몇 백만분의 일이고, 또 로또에 당첨된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인생 파탄에 이르게 된 자들이 많습니다. 로또가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권력이나 세상 영광이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기 때문입니다(벧전 1:24). 우리의 진정한 희망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님 뿐이십니다. 또한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온 세상을 그 뜻대로 통치하시고 장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러 오실 우리 주 예수님 뿐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예수님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아니하십니다.

넷째,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28-37)

  예수님은 인류 역사의 종말의 징조와 인류의 참된 희망에 대해 말씀하신 후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까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28,29절에서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무화과 나무는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가 나타나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라고 하십니다.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만일 지체가 높은 고귀한 분이 나의 집을 찾아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해 준비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손님이 예기치 않게 방문한다고 한 날짜보다 일찍 찾아와 문 앞에 이르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준비를 한 사람은 기쁨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지만, 아직 준비할 날짜가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고 전혀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은 몹시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찾아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날과 그 때는 하늘에 있는 천사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오시더라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33-37절에는 “깨어 있으라”는 말이 4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잠도 자지 말고 항상 충혈된 눈으로 있으라는 말입니까?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첫째로, 영적 긴장 상태를 풀지 말고 종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루 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고 또 후회함이 없이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루 하루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고 후회함이 없이 충성스럽게 살아갈 때 인생 전체가 후회함이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둘째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종말 신앙을 가지고 사는 자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주님께 유익을 남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말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현실을 도피하여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장사를 해서 유익을 많이 남기려면 현실에 발을 붙이고 공격적인 경영을 해야 합니다. 겨우 믿음의 중심만 지키는 정도로 소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적극적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인생이 긴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길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을 75년 정도를 산다고 할 때 그 75년을 어떻게 사용하며 사는지 설명했습니다. 그의 의하면 20년은 잠자는 데, 20년은 일하는데, 7년은 노는데, 6년은 먹는데, 5년은 텔레비전 보는데, 5년은 내가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고민하며 옷을 사는 쇼핑에 시간을 보내고, 3년은 누군가를 만나고 기다리는 일에 소모하고, 2년 반은 화장실에서, 2년 반은 잡념과 잡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2년은 차를 마시는 일에, 그리고 1년은 전화 받는 일 등에 75년의 시간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사용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인생을 아침 6시부터 저녁 12시까지 나눠 생각해 보았습니다. 15살이라면 그는 아침 9시 38분을 지나고 있고, 20세라면 10시 51분, 25세라면 12시 4분, 30세라면 1시 17분, 45세라면 4시 56분, 50세라면 6시 8분, 55세라면 7시 55분, 60세가 되면 저녁 8시 34분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65세는 9시 47분, 70세는 11시, 70세를 넘으면 12시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속도로 계산하여 10대는 10km로 달리고, 20대는 20km, 30대는 30km로 달리다가 50대, 60대가 되면 가속도가 붙어서 70 내지 80km로 달리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인생 후반부에 가서는 세월이 훨씬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화살처럼 빨리 날아가는 이 짧은 인생에서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가장 힘써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인생을 결산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요? 내 일만 하다가 주님의 일을 할 시간이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요? 그때는 그런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방황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 빨리 내가 일생 감당해야 할 분명한 사명을 찾아야 하고, 사명을 찾은 후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농구에서와 같이 4쿼터로 나누어서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1쿼터는 20세 전후까지로서 방황하다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시기이고, 2쿼터는 40세 전후까지로서 일생 감당할 사명을 발견하고 이를 위해 영육간에 기초를 놓는 시기이며, 3쿼터는 60세전후까지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는 시기이고, 4쿼터는 80세전후까지로서 후배들과 후손들을 위해 좀더 다른 차원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인생을 정리하는 시기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 뿐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짧은 생애 동안 엄청나고 극적인 성취를 이룬 모델을 든다면 존 웨슬레(John Wesley)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웨슬레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만약 10시간 후에 오셔서 우리 생애의 종말이 된다면 그 동안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이때 웨슬레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평소처럼 내가 계획한 대로 살 것입니다.” 이 짧은 대답을 통해 그의 삶이 얼마나 철저하게 기도와 계획 속에 이루어졌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또 우리가 주님께로 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짧은 생애 동안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듣고 상급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소용돌이치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고, 우리의 참 희망이 되신 예수님을 굳게 붙들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최선을 다해서 감당함으로써 년말을 결산할 때 후회함이 없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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