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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순서 '15년 신년 제1강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4:1-18
전한날짜 2014/12/27
ㆍ조회: 1388  
질그릇에 담긴 보배
2015년 신년수양회 제1강 (김병준)
말씀 / 고린도후서 4:1-18
요절 / 고린도후서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에 담긴 보배

2014년은 어느 해보다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했던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지난 4월 온 국민을 슬픔에 빠지게 만들었던 세월호 참사와 사람의 잔인함과 폭력성을 보여준 윤일병 사건, 그리고 소위 갑질의 정점을 찍었다는 '땅콩리턴' 사건까지, 우리 사회 전반에 곪을 대로 곪아 있던 많은 문제들이 터져 나온 한해였습니다. 게다가 성도들은 교회 지도자의 성추행 사건과 분열과 다툼, 회계비리와 같은 일들로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한 해였습니다.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신앙생활까지도 힘들어진 이중고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이러한 우리의 삶에 힘과 위로를 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낙심하지 마라. 그리고 보배이신 예수님만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묵상하며 힘들고 지친 우리의 마음에 위로를 얻고, 예수님을 깊이 만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낙심하지 말라

   바울은 1절에서 우리가 직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고후3:6에 따르면 이는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직분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이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으며, 우리도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구약을 보면 모세와 같은 영적 지도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했던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기적을 행하며 많은 역사를 이루어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옛 언약의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권면하였지만 아직 예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사람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온전하게 회복되도록 도와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일꾼들은 다릅니다. 새 언약의 일꾼들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생명구원에까지 이르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새 언약의 일꾼으로 쓰임 받고 있는 우리들은 구약의 영적 지도자들보다 더 놀라운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근본적으로 살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이 놀라운 사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우리는 이 직분을 받을 만한 자격이나 감당할만한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성숙하거나 발전 가능성이 있어서 선택받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주신 사명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명을 감당하다가 고난을 당하게 되면 쉽게 지치고 낙심합니다. 열심히 캠퍼스에 복음의 씨를 뿌리며 많이 수고했지만 양들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낙심합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바울이 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다같이 1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우리도 알고 있는 것처럼 바울의 삶에는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회심하기 전 사울로서의 삶에 대한 앙금도 남아 있었고, 회심 후에는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것이 못마땅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자기가 과거에는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새 언약의 일꾼으로 변화되었고, 유대뿐만 아니라 열방에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라고 변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의 진심을 왜곡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나의 진심을 몰라주고 왜곡하고, 빈정대는 것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 일입니까? 하지만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파하다보면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정죄와 비난을 받곤 합니다. 때로는 성숙하지 못한 자기의 내면 문제와 죄와 허물로 인해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공동체를 열심히 섬기고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왔는데 집안 꼴이 엉망일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일대일하고 왔는데 남편과 아이들이 째려보면서 "엄마는 밥도 안 주고 왜 이렇게 늦어!"라고 구박합니다. 그래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갈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가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이 길을 간다면 반드시 열매를 맺고, 모든 수고를 보상받게 될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얼마 전 한 신문사에서 전국의 대학 교수님들 700여명을 상대로 "2014년을 대변할 수 있는 사자성어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과연 교수님들은 어떤 사자성어를 꼽았을까요? 바로 지록위마(指鹿爲馬)였습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속인다."라는 뜻으로 거짓을 말하고 우겨가면서 남을 속이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속임수와 중상모략이 판을 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습니다. 그 옛날 고린도 교회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습니다. 고린도 지역은 헬라지방의 크고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상업이 발달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헬라철학, 영지주의, 율법주의 등 다양한 사상들이 교류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이런 시류에 영향을 받았고, 하나님의 진리와 세상의 가르침 속에서 혼란을 느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이런 환경을 악용합니다. 그들은 거짓과 속임수로 진리의 말씀과 거짓 사상들을 섞어가며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바울을 의심하게 하고 몰아내려는 정치적인 공작을 벌였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런 상황에 굴하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증거했습니다. 고후 13:8절에서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라고 고백하며 진리를 향한 자신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진리대로 살면 손해 본다고, 낙오한다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거짓과 속임수를 써가며 자기 나름의 정치적인 행동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떤 손해와 불이익이 오더라도 진리에 기초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낙심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새 언약의 일꾼에 자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도 여전히 복음을 영접하지도 않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좋은 것, 선한 것을 보면 으레 관심을 두기 마련인데 왜 복음과 진리에는 도무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요?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오늘날 사람들은 한국교회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이 마치 우리 모두의 죄 인양 비난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요즘에는 캠퍼스에서 전도활동을 하면 경범죄를 위반한 것과 같은 대우까지 받게 됩니다. 그래서 캠퍼스폴리스에게 걸리면 지적받고 쫓겨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산다는 것이 참으로 씁쓸해집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문제에 있어서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 또는 사단이 역사하여 그 마음을 어둡게 했기 때문에 영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어두움을 몰아낼 하나님의 빛을 계속해서 비추이면 된다." 바울이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영적인 분별력과 복음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이러한 분별력과 믿음을 잘 새기고 복음전파 사명을 감당하기를 기도합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바울은 빛과 같은 복음의 역사에 강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가 빛 되신 예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성도들을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사울에게 비추어 집니다(행9:3).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빛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빛이 사울을 사로잡았을 때, 그는 회심하게 되고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마치 태초에 어둠 가운데 빛이 임하고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처럼, 사울의 어두움 심령에 예수님의 빛이 임하면서 바울이라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복음 역사의 핵심도 이것입니다. 새 언약의 일꾼들은 복음의 광채, 그 빛을 사람들에게 잘 비추어야 합니다. 물질과 성공에 눈이 멀어버린 양들에게는 세상 영광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전해주고, 이성의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양들에게는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의 빛을 전해 주면 됩니다. 진리를 몰라 방황하는 영혼에게는 진리의 빛을, 현실문제에 좌절한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능력의 빛을 잘 전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빛이 임하게 되면 방황하는 영혼들의 눈꺼풀이 벗겨지고, 영광스런 예수님을 바로 보고 만나게 됩니다. 바로 그 때 놀라운 생명구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속에 어두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어두움이 있어서 예수님을 바로 보지 못하고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바른 분별력을 가지지 못해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두움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딤후 1:7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두움은 사단이 심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복음의 빛으로 몰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고 하셨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길 되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할 삶의 자세입니다. 올 한해 우리를 낙심시키는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강력한 복음의 빛을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비추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믿고 따르는,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보배이신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지난 11월에 프로야구 선수들의 몸값 경쟁이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4년을 계약하면서 어떤 선수는 50억, 누구는 65억, 최고 80억까지 체결 되는 걸 봤습니다. 어마어마한 금액이 어떤 기준으로 계산되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그만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선수이니깐 구단에서도 계약한 것 같습니다. 선수들의 연봉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직장인들도 보통 연말연시가 되면 연봉재계약과 협상을 합니다. 사실 협상은 말뿐이고 통보를 받습니다. "내년 나의 연봉에 인센티브가 얼마나 붙을까? 혹시 작년보다 떨어지는 건 아닌가?"하며 초조해하는 때입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봉이라는 것은 마치 우리의 몸 값, 가치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과연 우리의 몸값을 얼마로 측정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직접적으로 액수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비유로 이르기를 '너희는 질그릇이다.'라고 합니다.

   7절 전반부를 보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어진 쉽게 깨어지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싸게 팔리고, 우리에게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그런 그릇입니다. 오늘날로 생각하면 아마도 마트에 진열된 제일 저렴한 접시, 다이소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플라스틱 그릇이 질그릇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우리를 질그릇이라고 무시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비록 질그릇과 같지만 우리 속에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진 보배,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말씀입니다. 골 2:3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담은 복음서에는 보배 되신 예수님의 모습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떠한 점들이 우리에게는 소중한 보배와도 같습니까? 먼저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생명의 주인으로서 보배가 되십니다(요1:4). 그리고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갈급한 인생들에게 영생수를 주시는 영생의 보배이십니다(요4:14). 또한 배고픈 자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주시고(요6:35), 소경들에게 빛을 주십니다(요9:5). 사망권세에 신음하는 이들에게는 부활의 산 소망이 되십니다(요11:25). 이처럼 보배로운 예수님께는 어두움이 없고 운명이 없고 슬픔이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과 빛과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여 찬란하게 빛납니다. 보배로운 예수님을 간직한 사람은 그 예수님을 닮아 보배와 같은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고도 놀라운 사실은 우리 속에 예수님이 이미 계신다는 것입니다. 보배 되신 예수님께서 질그릇과 같은 우리에게 먼저 친히 찾아 오셨습니다. 눅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외로운 삭개오를 찾아가서 그의 집에 머무셨던 예수님, 예수님은 그와 같은 모습으로 친히 우리 안에 담기고자, 나의 좁고 지저분한 마음속에 질그릇 같은 인생 속에 찾아 오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예수님은 보배이시고, 그 보배를 담은 우리는 질그릇이다.'라는 정체성을 깊이 인정한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 결코 교만해하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처럼 질그릇 같은 나의 동역자들을 판단하고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내 안에 담긴 예수님만을 생각하면 감사가 넘치고, 다른 사람에게 담긴 예수님의 형상을 보면 그들을 사랑하고 힘써 동역하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알더라도 바라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내 마음에 계신데 그 광채를 바라보지 않으니 우리가 영적 소경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보배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7절 하반부를 보면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이던 시절, 그는 자신의 힘과 열정으로 동족들을 구원하려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살인자로 추락하고 광야로 도망칩니다. 모세의 인간적인 힘과 의지를 낮추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40년 동안 광야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모세를 이스라엘의 인도자로 부르십니다. 모세는 그 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내가 누구입니까? 내게 무슨 능력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여 냅니까?"(출 3:11) 하나님은 모세의 겸손한 고백을 받아주시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는 인간적인 힘만 의지하는 왕자, 모세가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발도 벗을 줄 알고, 아무런 힘이 없다고 고백할 줄도 아는 겸손한 모세가 필요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이 한 마디에 용기를 얻고 일어서고,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믿음의 모세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열심히 자기 계발하고, 실력을 갈고 닦아 다이아몬드가 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는다면, 질그릇 같은 우리 자신에게 능력이 없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게는 그저 허물만 보인다고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그 능력은 내 속에 있는 예수님을 통해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간적인 힘과 의지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8, 9절은 이 능력이 얼마나 큰지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이란 보배를 가진 사람은 어떤 시련이 와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게 하시고, 찬송하며 길을 뚫어 나아가게 하십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난처한 일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고난과 박해를 당해도 우리를 깨뜨리지 않고 보호하십니다.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보배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잠시 넘어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깨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무게중심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에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도 갇히고, 매도 맞고, 성도들에게 비판과 따돌림도 당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고, 독사에게 물리고,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생하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안 좋은 시나리오는 그의 인생에서 다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심한 고난 때문에 살아갈 소망이 끊어졌다.'고 고백한 적도 있었습니다(고후1:8).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던 그 때, 바울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고후1:9). 그는 부활 신앙을 힘입어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10절과 11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우리가 죽을 것 같은 환난에 쓰러져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의 시간들이 복음 역사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15절에"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의 고난이 자기의 양들을 위한 것임을 발견합니다. 자신은 비록 고생했지만 그 고생으로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변화하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생각하며 감사해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직장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솟구칠 때,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가라앉힙니까? 토끼 같은 부인과 여우같은 자식들이 있는 가족사진을 보며 마음을 달래지 않습니까? 목자 생활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무시당하고, 피곤하고 힘들어서 그만 두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영적인 자녀들, 우리가 섬긴 양들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간의 모든 어려움들이 깨끗이 씻어져 나갑니다. 목자 생활하면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양들이 지금은 든든한 동역자로 성장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힘들고 괴로워도 내 옆에 있는 영적 자녀들을 바라보면서 목자의 직분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16-17절에서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말해줍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겉사람은 늙어 가지만,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아무리 잘 먹고, 꾸준히 운동을 해도 세월이 지나면 낡아지게 됩니다. 젊고 팽팽했던 이마에 주름살이 생기고, 흰머리가 생기고, 눈도 침침해지고, 힘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보배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부활의 믿음으로 살아가면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신앙연수가 쌓일수록 스피릿이 더욱 충만해집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와 한나라 시기에 중국을 엄청 괴롭혔던 흉노족이라는 민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북방 유목민족으로 매우 호전적이고, 잔인해서 끊임없이 남쪽 대륙사람들을 약탈하고 괴롭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골칫거리인 흉노족을 크게 토벌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는 후한 시대에 살았던 마원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그가 흉노족을 물리치려고 전쟁터에 나갔을 때, 그의 나이가 62세였다는 것입니다. 웬만큼 젊고 강건한 사람도 마다했던 흉노족과의 전쟁을 이순이 넘은 노장이 감당하고 큰 승리를 이룬 것입니다. 마원은 평소에도 스피릿이 충만하여 이런 말을 자주했다고 합니다. "대장부가 뜻을 품었으면 어려울수록 굳세어져야 하고, 늙을수록 건장해야 한다." '늙을수록 건장해야 한다.'를 한자로 쓰면 노당익장(老當益壯), 즉 오늘날 우리가 쓰는 노익장이라는 말의 유래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노익장의 스피릿이 있기를 원합니다. 다음 주가 지나면 또 한 살 먹게 되는데, 나이만 들고 늙어만 간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나이가 들수록 내 안에 속사람을 더욱 건장하게 만들어야겠다, 신앙의 노익장을 발휘해야겠다.'는 영적인 방향을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이에 낙심하지 않고, 항상 영적으로 패기 넘치는 청년으로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대구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낯가림 심한 소심한 아이였습니다.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해 늘 혼자 집에만 있었습니다. 집안도 가난하여 학원을 다녀본 적도 없고, 학교에 갔다 오면 거의 매일 집에만 있었습니다. 집에서만 뒹구는 제게 부모님은 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빠, 엄마가 해줄 것이 없다. 니가 알아서 해라." 그래서 늘 알아서 했습니다. 눈치로 세상살이를 판단하면서 자라왔습니다. 저희 집은 올해 수능 만점자를 4명이나 배출한 대구 경신고등학교 근처입니다. 저희 동네는 경신고를 비롯한 여러 우수한 학교들이 모여서 강남학군에 견줄만한 막강한 학군을 자랑하는 동네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저의 성적은 항상 상위권이었습니다. 남들처럼 학원, 과외, 학습지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는데도 학습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과목은 시험 당일 새벽에 일어나 공부해도 90점 이상 받았고, 대학에 갈 때도 요약집 3권 붙들고, 여름부터 3달 정도 대충 수능 공부하며 경북대학교 건축학부에 쉽게 입학했습니다. 이런 학창시절의 경험은 저를 교만하게 했고, 결국 대학시절에는 공부와 담을 쌓았습니다. 당연히 학점은 엉망이었습니다. 그래도 교수님들은 제가 ROTC로 졸업해야 했기에 불쌍히 여기시고, 최소 학점을 맞추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사해하지 않았습니다. '대학 성적도 이렇게 쉽게 얻는 거구나.'라고 삐딱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서 ROTC장교 생활을 끝내고 서울에 올라왔고, 명동에 있는 한국영화교육원에 입학했습니다. 그즈음 UBF에서 말씀공부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감독은 공부하며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밑바닥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래서 영화교육원을 자퇴하고, 다짜고짜 방송영화프로덕션들을 찾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당연히 저를 뽑는 곳은 없었습니다. 겨우 일을 얻어서 간 곳은, 방송국에서 프로그램 제작의 하도급을 주면, 거기서 하도급을 받고, 거기서 또 하도급을 주면 그것을 또 받아서 일하는, 갑을 관계로 따지자면 갑을병정의 '정'쯤에 해당하는 정말 밑바닥의 프로덕션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열정과 패기로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생활은 정말 바닥이었습니다. 기회는커녕, 패기와 꿈들이 철저하게 망가져 갔습니다. 저는 너무 힘들어서 어느 겨울날 밤 몰래 도망쳤습니다. 도망치고 난 뒤 목자님과 말씀공부를 하다가 저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깊은 좌절감을 느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고, 건축 전공을 살려서 다시 취업을 준비했습니다. 감사하게도 4개월 만에 건축기사에 합격하고, 기사 합격한지 2달 뒤 현재 직장에 취직했습니다. 이력서를 제대로 써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남들은 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100부 이상도 쓴다는데 저는 1부만 쓰고, 그냥 1번에 취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를 입은 것인데 저는 또 다시 교만해졌습니다. 입사 후에는 금방 인정을 받았습니다. 임원들의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임원과 같이 일하면서 신입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부서의 사람들에게 존재가 알려지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결혼식 때 직장 동료들이 많이 와줘서 축의금도 넉넉히 받았습니다. 저를 눈여겨보신 임원은 제게 능력과 가능성이 보인다며 현재 일하고 있는 디자인 부서로 이동시켜 주었습니다. 저 또한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부서를 바꾼 이후 지난 3년간 저의 성과는 "0," Nothing입니다. 여태껏 아무 성과가 없습니다. 저의 업무는 공공기관이나 단체에 좋은 전시관을 계획하고 제안해서 사업을 따내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게는 10명 많게는 30명이상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협업하며 일을 진행합니다. 3년 동안 약 9개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그 중 8개는 떨어졌고, 1개는 당선 되었다가 사업이 취소되었습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약 600~700억 정도의 사업을 놓친 것입니다. 계속되는 실패로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습니다. 때로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넋을 놓고 혼자 중얼거리며 욕을 퍼붓다가 정신을 차린 적도 있었습니다. 마이너스의 손, 불운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것 같아 너무 괴로웠습니다. 성과가 좋은 한 직장동료가 저와 같이한 프로젝트에서 떨어진 후 "병준씨는 기가 너무 센 거 같아."라고 말했을 때는 많이 속상했습니다. 팀장님도 기도 좀 열심히 하라고, 아니면 기도원에 가서 푸닥거리라도 하고 오라며 핀잔을 주었습니다.
   목자로서의 삶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제가 섬긴 학생양은 이진혁 목자님이 전부입니다. 그것도 바빠서 말씀공부를 잘 이루지 못했습니다. 보통 기도제목을 나누면 목자가 양을 생각하면서 "우리 양이 일대일을 꾸준하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라고 그러는데, 저희는 오히려 이진혁 목자님이 "우리 목자님이 일대일을 꾸준히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하는 형편입니다. 목자로서 면이 서질 않습니다. 나는 뭔가를 잘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명절이나 혹은 겸사겸사 고향에 내려가면 저희 부모님과 장인어른, 장모님은 항상 저희 가정에 대해 걱정하십니다. 왜냐하면 저희에게 미래를 보장해 줄만한 돈이나 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직장의 정년이 길어봤자 40 중반이나 50이라며 저를 앞에다 두고 늘 걱정하시는데, 저도 어떻게 할지 몰라 그냥 같이 앉아 걱정만 하다가 올라옵니다. 이렇게 살다보니 가슴 깊이 느끼는 한 가지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잘하는 것도 없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무게에 눌려 재작년부터 올해 중순까지 영적으로 어두운 터널과 같은 시간들을 지내왔습니다. 회사에서는 성과도 없이 늘 바쁘기만 하고, 교회에서는 목자로서 부끄럽고, 고생하는 가족들에, 돈 없는 제 인생을 생각하며 깊은 자기연민과 자괴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저는 크게 낙심하고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 있던 쌓아왔던 모든 것들이 몽땅 다 털려버리고, 빈털터리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어두움의 시간들을 묵묵히 함께 하시다가 한 줄기 빛과 같은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의지해라. 너 자신만 바라보며 낙심하지 말라."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깨닫고 비로소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쉼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과제들과 인생의 무게와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의 삶을 감당할 용기가 생겼습니다. 힘이 되살아나고, 감사하는 마음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신년수양회 메신저로 의뢰받았을 때 여느 때처럼 회사 일로 바쁜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 '질그릇에 담긴 보배'라는 말씀이라면 바쁘더라도 전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게는 자랑할 것이 보배이신 예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삶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순수하게 증거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허름하고 보잘 것 없는 질그릇입니다. 하지만 제 안에는 보배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바라기는 이 보배이신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 보여줄 수 있는 투명한 질그릇, 사람들이 편하게 와서 예수님의 향기를 맡고 가는 낮고 넓은 접시 같은 겸손한 질그릇으로 다듬어 지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에 대해 말하며 앞선 권면의 메시지들 일단락 짓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의 고난은 잠깐이고 가벼운 것이다. 하지만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광은 심히 크고 영원한 것이다.' 이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이 땅에 보이는 것들만 바라보며 낙심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산 소망을 두고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가고, 내 안에 계신 보배로운 예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5년 신년 제 1 강

질그릇에 담긴 보배

말씀/ 고린도후서 4:1-18
요절/ 고린도후서 4:7


1. 바울이 받은 직분이 무엇입니까(1a, 3:6-11)? 그는 이 직분을 어떤 자세로 감당했습니까(1b,2)?


2. 복음은 어떤 사람들에게 가리워져 있습니까(3)? 사람들이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는 근본 이유가 무엇입니까(4)?


3. 우리가 전파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5)?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어떤 빛을 비추셨습니까(6)? 하나님이 비추시는 신령한 빛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4. 바울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무엇에 비유합니까(7a)? 하나님께서 이 보배를 질그릇에 담으신 뜻이 무엇입니까(7b)?


5. 바울은 어떤 고난을 받았으며 어떻게 승리했습니까(8,9)?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질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10-12)?



6. 그가 믿음의 확신가운데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13-15)?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왜 낙심하지 않습니까(16)?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무엇입니까(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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