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읽고
(출판사 – 혜원출판사)
헤밍웨이의 장편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는 제 1차 세계 대전 중 유럽전선에서 부상병 운반 부대의 중위로 일하고 있는 미국인 군의관(헨리)과 영국인 종군 간호사(캐서린) 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전쟁의 처참함이 생생하게 잘 드러나 있지만 전쟁 자체보다는 전쟁 속에서 꽃 핀 사랑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 헨리와 캐서린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아내와 남편으로 여기며 사랑을 키워 나간다. 한 편, 적군의 포탄 공격에 헨리는 다리에 부상을 입어 수술을 한 뒤 몇 개월간 요양치료를 받다가 다시 전선으로 돌아오지만 그가 속해 있는 이탈리아 군대가 독일과 오스트리아 군에게 밀려서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된다. 후퇴하는 도중 적의 공격을 받고 헨리의 가까운 동료가 죽자 헨리는 전쟁에 깊이 회의를 느낀다. 같은 편인데도 후퇴하는 장교들을 즉결 심판하여 사살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장교인 헨리도 붙잡히게 되자 그는 도주를 감행하여 살아난다. 그 후, 헨리와 캐서린은 다시 만나 스위스로 도망을 가 거기서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행복한 나날도 잠시, 스위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만삭의 몸이었던 캐서린은 힘겨운 출산과정을 겪다가, 결국 아기는 죽고 얼마 뒤 캐서린도 죽고 만다. 전쟁 속에서 꽃 핀 애틋한 사랑은 이처럼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헤밍웨이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삶과 작품을 일치시키려고 했던 작가라고 한다. 이 소설 역시 헤밍웨이 자신이 참전한 경험, 그리고 부상을 입은 일, 간호사와 사랑에 빠진 일을 토대로 쓰인 것이다. 이 작품 속에는 헤밍웨이를 지배하고 있는 사상중의 하나인 허무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캐서린이 낳은 아기가 죽은 후 아직 캐서린이 살아있을 때, 헨리는 캐서린마저 죽을까봐 불안해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번에는 캐서린이 죽을 차례다. 인간이란 모두 죽는다.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알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갑자기 세상에 떨어져 사는 방식을 배우고 그러다 죽게 되는 것이다.’
캐서린이 죽은 후 그녀를 붙잡고 그가 오열을 할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그러지 않고 그가 의외로 담담한 반응을 보이자 좀 놀랐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잠시 후에 나는 밖으로 나와서 병원을 뒤로 두고 빗속을 걸어서 호텔로 돌아왔다.”로 끝나고 있다.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의 죽음에 왜 그는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죽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너무나 갑작스럽게 절망적인 일이 일어나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은 것일까? 아무튼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너무나 담담한 그의 모습에 나는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작가는 작중 화자인 헨리의 입을 빌려 전쟁도 허무한 것이라고 말 하고 있다. 헨리는 신성이니 영광이니 희생이니 하는 것들은 공허한 표현일 뿐이라고, 실제로 자기 눈으로 신성한 것을 본 적도 없고, 영광이라고 불려진 것도 조금도 영광이 아니고, 희생이라는 것 역시 고깃덩어리를 매장하는 것이거나 도살장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전쟁의 실상이 아닌가 싶다. 나는 전쟁을 생각할 때 용기와 희생, 명예 이런 것들이 떠오르며 전쟁을 치루는 사람들이 멋있게 느껴지고, 전쟁의 상황이 낭만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 영화나 소설로만 접해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전쟁 중)죽은 자는 고깃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한 헨리의 말에서 전쟁의 비정함, 비인간성, 허무함 등이 확 느껴졌다. 전쟁은 너무나 비참한 것이고 그래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 소설에 대해 들여다보고자 한다. 소설을 읽던 도중 나는 이 소설이 형식적인 측면에서 매우 특이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소설의 90% 정도가 인물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고,(그래서 희곡 같은 느낌이 든다.) 두 번째는 대화 문장이 굉장히 짤막짤막하고 대부분이 표면적인 수준에서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인물들이 깊이 있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절제되고, 객관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식이다. (예를 들면, “그럼 어떻게 되나요?” “전쟁을 그만두겠죠” “누가요?” “쌍방이” “그랬으면 좋겠는데”) 헤밍웨이에 대해 찾아보니 헤밍웨이는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고 지극히 사실주의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소설은 대개 인물의 감정이나 심리 묘사가 최대한 억제된 채 객관적 사실만을 정확히 전달하는, 단문 위주의 간결한 문장들이 이야기를 명쾌하게 끌고 간다. 이런 문체는 신문 기자들이 주로 쓰는 문체인데 오랫동안 기자 활동을 했던 헤밍웨이의 젊은 시절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짧은 대화가 많으면 소설을 읽기 쉽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대화로만 이루어진 소설이 이해하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소설에서 작중 화자가 설명하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면 그 설명이 인물들의 말과 행동의 의미나 작품에 대해서 친절하게 많은 부분들을 알려주기 때문에 소설을 이해하기가 더 쉽다. 반면, 단문 위주의 대화들로만 이루어져 있으면 그 대화의 이면에 담긴 뜻을 독자 스스로가 유추하고 파악해 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쉽게 말해서 구구절절이 설명하고 늘어놓는 것보다 짧고 명료한 한마디가 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고, 그래서 더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훌륭한 문학작품이란 비유적인 표현이 많고, 묘사가 풍부하며, 수식어구가 많이 달린 긴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헤밍웨이의 소설을 통해 신문기사 같은 절제되고 딱딱한 언어로도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는 헤밍웨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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